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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정토교는 권진교

“아미타불 성불과 중생 극락왕생이 권진의 진면목”

▲ 영천 은해사 염불왕생첩경도(보물 제1857호) 일부. 출처 문화재청

제가 자주 쓰는 용어 중 ‘권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다음과 같이 2번 나옵니다.

권진, 관무량수경 나오는 말
극락 왕생하려는 사람에게
수행 더 잘하라는 응원의 뜻

부처님의 전도선언도 권진
정토교, 권진 강조하는 불교
사랑하면 자랑하고 싶듯이
염불하면 절로 권진하게 돼

그저 아미타불 본원만을 믿고
염불권하는데 권진 참뜻 있어

“셋째는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발하고, 깊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믿으며, 대승경전을 독송하고, 행자(行者)를 권진하는 것이다(勸進行者).”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한 없이 많은 보살들과 함께 행자를 찬탄하면서 그 마음을 권진하신다(勸進其心).”

첫 번째 인용문에서 ‘셋째’라고 한 것은 이른바 ‘세 가지 복(三福)’ 중에서 셋째라는 뜻입니다. 세 가지 복은 극락에 왕생하려는 사람이 닦아야 할 것들입니다. 이때 ‘권진’은 동사로 쓰인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권진하다’라는 동사는 어떤 뜻일까요?

이미 수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욱 더 잘 수행하라고 격려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만 불광산에서 나온 ‘정토삼경(淨土三經)’에서 왕월청(王月淸)은 “권설책진(勸說策進)”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즉 권유하는 말을 해서 정진을 책려(策勵)한다고 본 것입니다.

두 번째 인용문은 구품왕생(九品往生) 중 상품상생(上品上生)을 설하는 맥락에서 나옵니다. 아미타불에 이어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행자를 찬탄하면서 계속 더욱더 정진하라고 합니다. ‘그 마음’이라 한 것도 극락에 왕생하려는 그 마음일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처럼 앞으로도 그대로 지속하라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관무량수경’에서 등장하는 ‘권진’이라는 말의 두 가지 용례를 살펴보면 그 의미는 동일하게 ‘격려하다’ 정도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삼복의 셋째에서는 권진의 주체가 바로 행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점 하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극락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만 인과의 법칙을 믿고 대승경전을 독송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른 행자들을 격려하여 함께 극락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극락에 태어나기를(同生極樂國)” 늘 원하는 것도 이런 뜻에서입니다.

상품상생에 나오는 ‘권진’의 주체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입니다. 아미타불과 함께 상품상생하게 될 행자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야말로 아미타불의 일이고 관음세지 두 보살의 일일 것입니다. 그런 점은 ‘무량수경’에서도 아미타불의 권진을 볼 수 있습니다. 제18원의 원문(願文)을 다시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가령 내가 부처가 된다고 하더라도 온누리의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이 발원을) 믿고 좋아하여 나의 국토에 태어나고자 해서 십념 정도를 한다고 하자. (그렇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국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정각을 이루지 않으리라.”

이 원에 대하여 종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 지심신요원(至心信樂願), 범부성불원(凡夫成佛願) 등으로 불러왔습니다. 그러한 원명(願名)이 다 타당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만 저는 제18원에 권진염불원(勸進念佛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더 부여해 봅니다. 바로 아미타불께서 이 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염불을 권진해 주시고 있다고 보아서입니다.

‘권진’을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비단 정토불교만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선을 하는 분들은 선을 권진하여야 하고 진언을 하시는 분들은 진언을 권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불교를 공부하시든 어떤 수행을 하시든 모두 “권진을 하면서” 해야 합니다. “~하면서”는 산스크리트(梵語)라면 현재분사 용법을 써야 합니다. 현재 두 가지 동사를 동시에 하는 것이 현재분사입니다. 자! 보십시오. 제18원을 꼼꼼히 살펴보시면 아미타불의 성불과 중생의 왕생극락이 동시(同時)라고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중생의 왕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미타불의 성불 역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고 아미타불의 성불이 이루어진다면 중생의 왕생 역시 이루어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권진불교의 진면목입니다. 지금까지 포교, 전도, 전법 등을 다 말해왔습니다만 실제로 잘 안 되는 이유는 스스로의 깨달음(상구보리)과 중생제도(하화중생)가 서로 방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위로’와 ‘아래로’를 동시에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부처가 되지 않고서는 중생을 제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포교에 등한히 한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제18원에서 보듯이 정토불교의 권진에는 그러한 모순이나 길항(拮抗)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극락에 가는 일은 먼저 다녀온 사람만이 “극락을 가자”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 법장보살이었을 때 세우신 원)을 믿고 염불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고 염불합니다. 그래서 극락에 갈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고 염불하시지요?”

이렇게 권진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관무량수경’의 문맥에서는 ‘격려하다’의 의미로 쓰였다고 하는 ‘권진’이라는 말이 ‘권유하다’로 쓰이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이미 염불을 하고 있는 염불행자라고 한다면, ‘격려하다’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염불하고 있는 분이 아니고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분이 아니라면 그분에게는 ‘권유하다’의 의미로 쓰이게 됩니다.

정토교는 권진교(勸進敎)입니다. 물론 제가 생각하기에는 모든 불교가 다 권진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을 설하라.”고 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저 유명한 ‘전도의 선언’에 이미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권진을 가장 강조하는 불교 중의 하나가 정토교라는 생각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잇펜(一遍) 스님이나 원효 스님 같은 분이 방방곡곡을 걸어 다니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전하고자 했던 것 역시 권진이었습니다. 그렇게 권진하신 분들, 혹은 지금 권진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또 ‘권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때는 명사의 의미로 쓰는 것입니다.

저는 권진입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에 응답하기 위해서, 제 스스로 권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권진이 되어주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불교는 원래 조용한 종교다. 남이 믿든지 말든지 모두 지켜보고 본인의 선택을 존중한다. 당신처럼 권진을 한다는 것은 시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불교답지 않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답했습니다.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든가 좋아한다든가 하면 억지로 그 마음을 속에 꾹꾹 억누르기가 어렵게 된다. 그 사람에 대해서 자꾸 이야기를 하게 된다. 자랑하게 된다. 그래서 금방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들키게 된다. 정말로 불교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권진하지 말라고 해도 권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저는 “염불하라”고 권진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염불하시도록 권진해 주세요”라고 권진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권진하는 권진이라면 스스로의 염불은 당연히 전제됩니다. 하지만 염불을 하게 된다고 해서 자동 발생적으로 권진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권진하기 위해서는 원을 세워야 합니다. 저 법장 보살의 제18원처럼 말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28호 / 2018년 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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