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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테네 학당과 용문석굴 간경사동

기자명 주수완

옛 성인들, 작가 살던 시대 현자 모습으로 재현해 사실성 극대화

▲ 성 베드로 성당 ‘라파엘로의 방’ 중 ‘서명의 방’에 그려진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 산치오, 1508~1511년.

천지창조가 있는 시스틴 체플로 들어가기 전에는 라파엘로 산치니(1483~1520)가 벽화를 담당한 4개의 방을 지나게 된다. 이 방들은 원래 특별한 용도에 따라 이름이 있었지만, 현재는 단지 벽에 그림을 그렸던 예술가의 이름을 따라 기억되고 있으니 새삼 예술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이들 방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서명의 방’이다. 1508년, 그러니까 그가 25세일 무렵, 라파엘로와 같은 우루비노 출신의 선배 예술가이자 바티칸 성당의 설계를 주도했던 도나토 브라만테는 그를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추천했고, 교황은 그에게 자신의 개인적 스탄차(stanza, 거소, 방)들을 장식할 것을 지시했다. 그 중에서 서명의 방(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에는 ‘천상과 지상의 지혜’라는 주제를 담도록 했는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아테네 학당(Scuola di Atene)’과 ‘성체에 관한 논쟁(Disputa del Sacramento)’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신을 인간으로 표현했다면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은
인간을 신화적으로 묘사해

고대의 그리스 철학자들을
주변 인물로 자연스레 배치

심각하고 심오한 느낌 대신
생동감 있고 화사하게 표현

용문석굴 간경사동도 비슷
아라한, 당대 고승으로 조각

간경사동 초상조각 전통은
석굴암 십대제자로 이어져

특히 ‘아테네 학당’이 유명한데, 이 작품은 라파엘로에게 주어진 주제, 즉 ‘천상과 지상의 지혜’에 있어 천상의 지혜가 기독교의 교리라면, 지상의 지혜에 대한 상징으로서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묘사한 것이다. 이는 ‘르네상스’라는 말 자체가 바로 그리스 인문주의의 부활을 상징하는 만큼, 그 시대의 성향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라 하겠다. 원래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그들이 야만족이라고 비판했던 게르만인들이 훈족에 쫓겨 ‘대이동’함으로써 중세가 시작되자 역사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들 야만적 게르만 문화를 지칭하는 ‘고딕(Gothic)’이란 표현도 게르만족에 속했던 ‘고트족(Goths)’에서 온 말로 ‘고트족스럽다’는 표현이니 결국 야만스럽다는 것이었다. 제국의 수도마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이후 로마는 거듭된 약탈로 황폐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금 이탈리아가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로마제국 뿐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 그리스 문화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나아가 고트족의 중세문화를 대신할 고대문화의 계승자임을 주창한 것이 르네상스시대였다. 그 안에는 다시금 로마제국을 꿈꾸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문화적 자존심이 담겨진 셈이었고, 프랑스나 영국의 고딕문화에 대한 우월감이 팽만했던 시대였다. 그런 만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상징되는 그리스의 철학이야말로 르네상스 시대를 지탱하는 두 다리나 마찬가지였다. 천상의 지혜에 대응되는 지상의 지혜로서 그리스, 특히 아테네의 철학자들을 묘사한 것은 르네상스 정신의 집약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위대한 철학자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미켈란젤로의 표현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미켈란젤로가 신마저 인간적인 매력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에 반해 라파엘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인간들을 묘사하면서도 신화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들 철학계의 대스타들을 표현하는데 모델이 되었던 것은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아테네 학당의 중심인물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예를 들어 플라톤의 얼굴은 라파엘로가 존경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얼굴을 빌려온 것이었다. 위대한 철학자들을 당시 인물 얼굴을 빌려 신화적으로 표현했으니 말하자면 고대의 인물, 현재적 인물, 그리고 천상의 인물이 한 군데에 오버랩 돼 있는 셈이다.

▲ 헤라클레이토스로 묘사된 미켈란젤로.

특히 플라톤은 자신의 우주론을 집대성한 저서 ‘티마이오스’를 든 채 이데아론을 설명하듯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의미하듯 ‘에티카’라고 적힌 책을 들고 손바닥을 땅으로 향해 인간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거기다 매우 그럴듯한 라파엘로 당시의 인물을 등장시켜 옛 사람들을 표현했으니 이 방을 들락날락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마치 새로 개봉한 영화라도 보듯이 라파엘로의 그림을 궁금해 했을 것 같다. 이렇듯 누구나 무릎을 탁 칠 수 있게끔 고대의 인물을 우리 눈앞으로 소환시키는 특별한 재주야말로 라파엘로를 많은 사람들이 찾게 만드는 요소였던가 보다.

그에게 예술적으로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당연하게도 미켈란젤로였다. 특히 인체의 해부학적인 표현이나 극적인 자세를 보면 대선배인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많이 보이는데, 조르지오 바자리의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작업하다 잠시 교황과의 의견충돌로 작업을 중단한 틈을 타 브라만테는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가 작업 중이던 그림을 연구할 수 있도록 몰래 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완성된 그림을 보며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중간 과정을 본다는 것은 라파엘로에게 더더욱 큰 공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자리의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실제 라파엘로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자리의 ‘르네상스 미술사 열전’에는 미켈란젤로의 화풍을 연구한 라파엘로는 오히려 자신이 미켈란젤로를 넘어설 수 없음을 알고는 미켈란젤로와는 다른 방식으로 일종의 승부를 걸었다고 하였다. 바자리는 미켈란젤로를 이미 최고의 예술가로 염두에 두고 글을 썼지만, 각 화가들을 소개하면서 나름대로 최상의 칭송을 하고 있고, 굳이 미켈란젤로와 비교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이 어쩌면 그의 미덕일지도 모른다. 그는 다른 화가를 미켈란젤로와 비교해 깎아내림으로써 미켈란젤로를 띄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흔히 비평가들이 하는 실수다) 다른 모든 화가를 최고로 띄워놓고 미켈란젤로는 다만 그 최고의 칭송으로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존재라는 분위기로서 거장을 자리매김했다. 그런 그가 라파엘로 스스로 미켈란젤로와 비교해 넘어설 수 없다고 자각했다고 기술한 것은 사실 라파엘로를 낮추려는 의도가 아니라,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미켈란젤로에 다가갔었다는 그 나름의 최고의 칭찬이었던 것 같다.

여하간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그 범접할 수 없는 심오함과 심각함 대신 보다 모든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러면서 밝고 화사한 분위기로, 더불어 훨씬 다양한 레퍼토리로 승부를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함께 그의 미켈란젤로에 대한 존경심은 벽화 속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미켈란젤로의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드러냈다. 라파엘로가 묘사한 미켈란젤로의 모습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미국 배우 커크 더글러스도 닮은 것 같지만,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제작과정을 영화화한 ‘고통과 환희(The Agony and Ecstasy)’에서 미켈란젤로역은 찰톤 헤스톤이 맡았다.(참고로 커크 더글러스는 반 고흐 역할로 출현한 바 있다)

여하간 라파엘로는 그림뿐 아니라 이렇게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예술적 거장들을 그들이 지향했던 고대 그리스의 사상적 거장들에 덧씌움으로써 그들이 이룬 업적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강조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서명의 방에 들어서면 라파엘로 뿐 아니라 필자 자신도 존경해마지 않는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더불어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을 한 자리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고무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그런 정신세계의 영웅들을 만나는 과정은 불교미술에서 사실적인 표현이 꽃피었던 당나라 시기의 대표적 유적인 용문석굴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었다.

용문석굴의 수많은 석굴 중 간경사(看經寺)동은 29분의 조사상으로 유명한데, 부처님 이후 불교교단을 이끌었던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로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선종불교를 창시한 마지막의 달마대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불교사의 쟁쟁한 성인들을 망라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 실상 인도승려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중국승려의 모습에 더 가까운 듯하다. 마치 불교가 원래부터 중국과 무한한 연관 속에서 성장해왔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마치 라파엘로가 당대의 거장들을 모델로 했던 것처럼, 이 간경사동의 조사들 역시 당나라 당시의 쟁쟁한 고승들의 모습을 일부러 차용해 옮겨놓은 것 같다.

▲ ‘간경사동’ 나한상의 얼굴 세부.

뿐만 아니라 조사 한분 한분의 모습이 지극히 사실적이고 인간적이며, 무엇보다 각 스님들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어떤 분은 깐깐하게 보이고, 어떤 분은 너그럽고 털털하게 보이고, 어떤 분은 치열하게 자기 자신과 싸우는 듯이 보이기도 하다. 이 스님들이 넓은 무대를 배경으로 지금 우리 앞에 등장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 염불을 하는 듯, 요잡의식을 행하는 듯 보이는 것이 마치 큰 연극무대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드라마틱하다는 표현은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극(劇)’적이라는 뜻이니, 생각해보면 라파엘로나 이 간경사동의 조각가나 모두 고대의 성인들을 불러내어 한편의 연극을 연출한 셈이다. 그 중의 마하가섭을 플라톤이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보리달마를 헤라클레이토스이자 미켈란젤로로 본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 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플라톤의 모습에서 마하가섭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간경사동의 위대한 초상조각전통이 그대로 신라의 석굴암 10대제자상으로 이어진 것은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다.

라파엘로는 천재성이 한창 원숙해가던 37세에 요절했다. 천재적이면서도 남들과 잘 화합할 줄 알았던 보기 드문 형태의 이 천재가 죽자 그를 아끼던 수많은 사람들이 애석해하며 글을 남겼는데, 추기경 벰보(Pietro Bembo, 1470~1547)가 로마 판테온에 있는 그의 무덤 묘비에 새긴 글귀가 특히 유명하다. “자연은 그가 살아있을 때는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하였으나, 그가 죽자 이제 자연은 그와 함께 잊혀질까 두려워하고 있다.” 사실적이고 정확한 표현으로 어떤 일이든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처럼 보여줌으로써 자연의 신비를 파헤쳤던 작가가 세상을 뜨자 이제 더 이상 그런 작가는 없을 것이라는 최고의 칭송이었다. 하지만 비록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보다 1년 전 작고했지만, 선배였던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보다 더 오래 살아 1564년에 작고했으니 자연은 한참 더 정복의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28호 / 2018년 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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