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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북 상주 동방사지(東方寺址)

기자명 임석규

여래형 좌권인 비로자나불은 한국 불교만의 독특한 특성

▲ 불국사 비로전 비로자나불좌상.

상주 복룡동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19호)은 원래 복룡동 207번지 일원에 있던 동방사지(東方寺址)에 있었으나, 1975년 ‘왕산(王山)’에 역사공원이 조성되면서 이 공원 안에 보호각을 만들어 봉안하고 있다.

창건과 폐사 시기 알 수 없지만
고려의 ‘동국이상국집’서 확인

보물119호 지정된 석조불상은
124cm의 비로자나불로 추정

육계 사라지고 양손도 파손
양손 가슴 모은 지권인 추정

오른손 검지 왼손으로 감싼
지권인과 반대의 수인 모습

다른 나라에도 사례 있지만
유독 한국에 많이 남아 눈길

좌권인을 한 대표 불상으로
불국사 비로자나불상 있어

고려 이후로 좌권인 불상이
비로자나불의 50%가 넘어

좌권인이 많이 조성된 이유
연구 미진해 아쉬움으로 남아

왕산은 고도 상주의 중앙에 자리한 명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31대 신문왕 7년(687)에 주위 1천1백9보의 상주성을 쌓았는데 성의 4대문 중앙에 자리한 작은 산이 왕산이다. 고려 31대 공민왕11년(1362)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공민왕이 이곳에 피난하여 상주목 관아를 임시행궁으로 삼으면서 왕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동방사지는 ‘돌방아샘’ 또는 ‘새봇들’로 불리는 곳에 있다. 이곳은 북쪽의 북천과 동쪽의 병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평탄지이며 당간지주가 있는 207번지 일원이다. 동방사의 창건과 폐사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사명은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처음 확인된다. 또한 사찰의 위치는 ‘동해사사실기(東海寺事實記)’에 언급되어 있는데 ‘식산(息山) 근처의 두 하천 사이에 동방사가 창건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는 ‘복룡폐사(伏龍廢寺)’라는 명칭으로 당간지주를 조사하였고, 그 일원을 사지로 추정하고 있다. 1969년에는 정영호 교수가 당간지주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불상과의 관계성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이후에 간행된 보고서는 당간지주와 불상을 동일사지의 유물로 판단하고 있으며, 불상은 1975년 상주시내 왕산으로 이전되었다.

▲ 상주 동방사지 비로자나불좌상.

상주 복룡동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왕산역사공원 내 보호각에 안치되어 있다. 불상의 원래 광배와 대좌는 결실되었고, 지금은 새롭게 조성된 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다. 머리 윗부분과 팔, 어깨, 무릎 등 군데군데 파손이 심하다.

불상 크기는 높이 약 124㎝, 머리 높이 46㎝, 머리 너비 37㎝, 어깨 너비 98㎝이다. 신체는 전체적으로 부드러우면서도 둔중할 정도로 풍만한 모습이다.

머리는 파손이 심해서 이마와 정수리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육계도 남아 있지 않다. 머리의 온전한 부위에는 큼지막한 나발이 성글게 새겨져 있다. 살찐 얼굴은 방형에 가까우며, 턱은 이중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입은 작고 도톰한 편이고, 미소를 띠고 있어서 복스럽고 정감 있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든다.

양손은 파손되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으나, 가슴 앞에서 모은 것으로 보아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부처님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오른손이 위로 가야하는데 이 부처님은 손의 위치가 바뀌었다. 게다가 발도 결가부좌를 했지만 석굴암 본존불이 하고 있는 길상좌가 아닌 항마좌를 하고 있다. 손이 바뀐 경우는 가끔 볼 수 있지만, 앉는 자세를 항마좌로 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좌권인의 항마좌 비로자나불상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왼손을 주먹 쥔 상태에서 검지만을 곧추 세우고, 그것을 오른손으로 감싸듯이 쥐는 부처님의 손 모양을 지권인이라고 하고, 반대로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 쥔 수인을 역지권인 또는 좌권인(左拳印)이라고 한다. 좌권인 비로자나불상 중 가장 유명한 예는 불국사에 모셔져 있는 금동비로자나불상일 것이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앉은키가 성인의 평균 키에 해당하는 거대한 금동불상이다. 이 정도 크기의 금동불을 주조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막강한 후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며, 틀림없이 왕실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불국사이기에 가능한 역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불국사에서도 좌권인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일까?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로자나불상 도상의 기원과 신라로 도입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 석굴암 본존석불상.

한국의 지권인을 결한 비로자나불은 아시아 전체에서도 극히 특수한 형태이고, 성격은 신라 화엄종이 중기밀교 금강계대일여래의 도상을 받아들여 본존으로 삼은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신라 화엄종계열 사찰에서 처음부터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신 것은 아니었다. 의상 스님이 창건한 영주 부석사에서 보듯 초기에는 항마촉지인을 결한 아미타불을 모셨다. 또 의상 스님의 제자인 표훈 스님이 주지로 있던 경주 석굴암의 본존도 촉지인상이다. 그러면 화엄종에서는 왜 항마촉지인상을 본존으로 모신 것일까? 중국의 초기 화엄종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학적으로는 화엄을 연구하면서도 신앙적으로는 아미타정토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는 화엄을 중시했지만 아미타정토신앙이 유행했던 당시의 분위기상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편으로 내세워 그 교화 및 아미타정토신앙과 화엄교학과의 융화를 꾀했던 것이다. 또 당시 그들이 연구했던 60화엄에는 경의 주인이 명확히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의상 스님의 손제자에 해당하는 신림 스님을 포함해 불가사의(不可思議), 혜초(慧超), 의림(義林)같은 많은 당나라 유학승들이 신라로 돌아오면서 화엄종의 소의경전도 ‘육십화엄(十華嚴)’에서 ‘팔십화엄(八十華嚴)’ 중심으로 변하게 되었으며, 본존불도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그 때 비로자나불 도상으로서 신라에 도입된 것이 중기밀교 금강계대일여래의 도상, 즉 지권인을 결한 도상이었다. 이렇게 8세기 중엽 통일신라에 전해진 지권인을 결한 비로자나불상은 금강계 대일여래도상에 의해 조상된 것이었고, 9세기가 되면 아미타불을 대신해서 신라화엄종의 본존이 됨과 동시에 통일신라 불교조각의 주류가 된다.

통일신라의 비로자나불은 중기밀교의 금강계대일여래 지권인 도상을 도입한 것이지만 일본의 금강계대일여래가 보관을 쓰고 조백(條帛)을 착용하고 목걸이나 팔찌로 장식한 보살의 모습이 많은 것에 비해 통일신라의 비로자나불은 나발을 하고 법의를 입고 장신구를 하지 않은 여래의 모습을 한 것이 많다. 동일하게 금강계대일여래의 도상을 도입했으면서도 한국과 일본에서는 수용하는 토양(신앙이나 사상배경)이 달라서 다른 모습의 부처님이 모셔진 것이다.

한국에 현존하는 비로자나불상의 종류는 다양하다. 나발에 법의를 착용한 여래형과 보관을 쓰고 법의를 착용한 보관여래형, 그리고 보관을 쓰고 장신구를 착용한 보살형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인 모습인 여래형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은 경상남도 산청 내원사 소장 석남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766년경)이다. 그리고 보관을 쓰고 법의를 착용한 보관여래형 비로자나불상의 현존 최고 사례는 세끼노 타다시(關野貞)가 소장하고 있던 금동비로자나불좌상(8세기중엽, 현소재지 불명)이고, 보살형 중 가장 오래된 예는 리움미술관 소장 신라화엄경변상도의 본존 비로자나불상이다. 이 상은 755년에 완성된 것인데 보관을 쓰고, 조백과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다. 그리고 수인을 보면 일반적인 지권인(智拳印,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는 형태)과 그 반대인 좌권인(左拳印)을 결한 비로자나불상이 있다. 좌권인 비로자나불상 중 대표적인 상은 경주 불국사 비로전 비로자나불좌상이다. 여기에 입상형식을 하고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소장 영양출토 석조비로자나불입상(9세기초경)을 포함한다면, 우리나라에는 여래형, 보관여래형, 보살형의 3형식 그리고 자세면에서 좌상과 입상, 착의법으로서는 통견식과 편단우견식, 수인에 있어서 지권인과 좌권인 형식 등 도상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비로자나불상의 모든 형식이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비로자나불상을 수용하는 초기에는 중기밀교 금강계대일여래의 3가지 형식을 모두 받아들였으나 9세기 이후가 되면 여래형이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상주 동방사에 모셔졌던 비로자나불좌상 또한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조성되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비로자나불상은 양손이 파손되었지만, 일반적인 지권인이 아니라 반대로 왼손이 올라가는 좌권인을 결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 홍천 물걸리사지 비로자나불좌상.

현재 좌권인 비로자나불상은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에도 그 작례가 남아있고, 특히 한국의 비로자나불상 중에는 좌권인상이 상당수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한국 비로자나불상 94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좌권인을 결한 불상이 10세기 이전에는 49구 중 16구이고, 그 이후에는 45구 중 24구라는 통계가 발표되어 있다. 고려 이후가 되면 50%가 넘는 비로자나불이 좌권인을 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나라에 지권인 도상이 전래된 거의 같은 시기에 좌권인 도상도 전래되었고, 지권인 도상과 똑같이 화엄의 비로자나불상으로서 조선시대까지 좌권인상의 조상이 계속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좌권인이란 명칭은 일본의 13세기 저작 ‘각선초(覺禪鈔)’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책에는 일본 승려가 송나라에 갔을 때 보았던 좌권인상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왜 좌권인을 결했는지는 아직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다. 이 방면의 연구 또한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미진하다. 다만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의 좌권인과 관련해서는 대의를 우견편단으로 입어서 노출된 오른쪽 가슴을 보이기 위해 왼손을 위로한 좌권인을 결했다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

좌권인은 또 이권인(理拳印)이라고도 한다. 이는 ‘금강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금강계 밀교의 지법신(智法身)과 대비되는 개념이고, ‘대일경’을 중시하는 태장계 밀교의 이법신(理法身)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좌권인은 이러한 교리적 이유로 조성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앉는 자세를 살펴보면 길상좌의 불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항마좌를 하고 있는 상은 홍천 물걸리사지 비로자나불좌상을 포함, 단 3구만이 알려져 있었는데 이 상들은 하나 같이 여래형이고, 좌권인을 결하고 있으며, 법의는 통견으로 입고 있다. 무언가 동일 형식의 전통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특이한 불상의 범주에 상주 동방사지 비로자나불상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29호 / 2018년 2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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