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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시대에도 건재한 인종차별

기자명 이중남

지난해 11월27일 영국 왕실이 공표한 해리 왕자(34)의 약혼 소식은 왕실 이슈에 민감한 영국 타블로이드 업계에 좋은 가십거리를 던져주었다. 약혼녀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미국인 배우로 이혼 전력이 있는 개신교도 메건 마클(37)이었다. 메건의 국적이나 나이, 이혼, 종교가 구설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성 평등과 페미니스트 활동 이력도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백인인 아버지와 흑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피 한 방울의 법칙’이 통용되어 왔다. 즉 조상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흑인이 있으면 그 자손은 모조리 흑인이 된다. 요즘은 좀 완화되는 추세여서, 흑인의 피가 32분의 1 이상이어야만 흑인으로 보는 주(洲)도 있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개개인의 일상 속에서 흑인의 신체 특성은 여전히 ‘뭔가 안 좋은 것’을 나타내는 표지로 작용한다.

둘의 교제 사실이 알려진 초기부터 영국 타블로이드에서는 갱들이 판치는 동네의 아프리카계 DNA가 왕실에 섞이게 되었다는 야유가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오죽했으면 해리 왕자가 나서서 메건과 그의 가족에 가해지는 인종차별적 학대와 희롱을 규탄하는 성명까지 냈다고 한다. 일찍이 ‘인종관계법(1965)’을 제정해 인종차별 금지를 선도해 온 영국에서, 그것도 왕실의 인사들마저 인종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적잖이 놀랍다.

인종주의는 인류가 생물학적으로 확연히 구별되는 몇 개의 아종(亞種)으로 나뉜다는 믿음, 그리고 그 각각의 아종은 생물학적 특성에서 유래하는 불변의 문화적‧기질적 특성을 보유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생물학과 유전과학의 발달로 그런 믿음에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음이 밝혀진 지 오래지만, 인종주의에 터 잡은 차별과 폭력은 다문화시대라는 21세기에도 꺾일 줄 모르고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인종에는 자성(自性)이 없다. 예를 하나만 들어도 그것은 명백해진다. 미국에서는 요즘 인종을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으로 나눈다고 한다. 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과반을 일컫는 지명으로 복합적인 기후대와 다양한 사람들과 문명, 종교, 역사를 그 안에 품고 있다. 이 넓은 땅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한 인종이라고 한다면, 그런 인종 개념을 어디에 쓸 것인가. 나머지 ‘인종’들도 따져보면 다 마찬가지다.

인종에 대한 믿음은 인종차별이라는 실천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인종차별 금지가 보편화된 오늘날에는 물론 인종주의를 대놓고 옹호하는 법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해리 왕자의 사례에서 보듯, 민간 영역과 개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질러지는 숱한 인종차별로 인류는 홍역을 치르고 있다. 요즘 유럽에서 이른바 ‘안티 다문화’라는 이름을 내걸고 약진하고 있는 극우파의 논리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결국은 해묵은 인종주의의 새로운 외피에 다름 아니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1978년 유엔 ‘인종차별철폐협약’에 가입했다. 당시는 우리 노동자들이 해외로 나가 인종차별을 당하던 시대였지,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인종차별을 당하는 일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때였다. 협약의 정신에 맞춰 대응입법을 할 필요성도 몰랐다. 시대가 바뀌어 이제는 체류 외국인 200만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과거에 비해 그다지 진전된 것이 없다. 특히 제3세계 출신자들 대다수가 우리사회에서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겪은 적 있다는 진술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일부 국민들은 인종차별금지법이 왜 필요하냐는 식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3월21일은 유엔이 정한 ‘인종차별 철폐의 날’이다. 인종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인간성 자체에 대한 침해이고,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까지도 결국은 그로 인해 존엄성을 손상당한다는 이치를 새겨 보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이중남 마하이주민지원단체협의회 운영위원 dogak@daum.net
 


[1430호 / 2018년 3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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