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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엄성중의 옹호

기자명 해주 스님

신라에 화엄성중 신앙 정착하기까지 의상 스님 영향이 절대적

▲ 남산율종의 개산조 도선율사의 주석처인 종남산 정업사.

의상 스님은 화엄성중의 옹호를 받은 화엄행자(華嚴行者)이다. 화엄성중은 ‘화엄경’에 출현하는 신중(神衆)이다. 신중은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옹호하는 호법신인데, 성스러운 무리라고 하여 성중(聖衆)이라고 부르며 신 가운데 장군이라 하여 신장(神將)이라고도 한다.

화엄성중을 통칭해서 신중
신중들이 의상 스님을 외호

신중의 범위에 화엄성중 외
무속의 신까지 전부 습합돼

신중들을 모신 단이 신중단
상중하단 중 중단에 모셔져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 조
의상 스님과 신중 관련 설화

신중 부리는 의상 스님 법력
사리 봉안에 도선율사 조력

불자라면 화엄성중이 옹호
스스로 신중 역할 수행해야

의상 스님이 신중의 호위를 받은 사실이 ‘삼국유사’의 ‘전후소장사리’ 조에 보인다. 스님이 남산율종의 도선율사가 주석하고 있었던 정업사로 초대받아 갔을 때 신중이 따라 모신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이다.

“옛적에 의상법사가 입당하여 종남산 지상사 지엄존자에게 가서 수업했다. 이웃에 도선(道宣) 율사가 있어 항상 천공(天供)을 받으니 재(齋)를 올릴 때마다 하늘주방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하루는 도선율사가 의상 스님을 청하여 재를 올렸다. 그런데 의상 스님이 가서 자리 잡고 앉은 지 오래도록 천공이 이르지 아니하였다. 스님이 헛되이 빈 발우로 돌아가자 그때서야 하늘 사자가 내려왔다. 율사가 오늘은 어째서 늦었느냐고 물으니 하늘사자가 대답하기를 온 골짜기[洞內]에 신병(神兵)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도선율사는 의상 스님에게 신의 호위가 있는 것을 알고 그 도의 우월함에 탄복하고 그 천공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다시 지엄과 의상 두 스님을 재에 청하고 자세히 그 사유를 말하였다.”

도선율사는 의상 스님보다 29세 위로서 학덕이 높고 계행이 청정한 대율사였다. 평소에 재를 올려 천공을 받을 정도로 신이하고 명망이 높은 고승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의상 스님을 청하여 재를 올렸으나 오래도록 천공이 이르지 아니하였다. 의상 스님이 돌아간 뒤에야 도착한 하늘사자 말이 온 골짜기에 신병이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올 수 없어서 늦었다는 것이다.

정업사도 종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데 지상사와는 다른 골짜기에 위치한다. 정업사까지는 차가 들어갈 수 없어서 몇 년 전에 힘들게 걸어 올라가보니 “아~ 이래서 도선율사가 천공을 받으셨구나”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쳐가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천공 이야기는 화엄행자 의상 스님의 신력이 청정범행 도선율사를 능가하였음을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신라 화엄신중 신앙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봉은사판(1856) ‘화엄경’의 첫권(‘화엄소초'의 ‘현담' 권1) 말미에 판각되어 있는 위태존천상.

오늘날 화엄성중을 모시는 화엄신중 신앙이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찰에서 신중을 모시는 단을 신중단이라 하고, 법당의 상·중·하단 가운데 중단에 모신다. 조석으로 예불할 때 언제나 상단 예불 다음에 신중단에 예경을 한다. 마지를 올릴 때에도 부처님께 올린 공양물을 중단으로 퇴공한다. 신중기도가 거의 전국사찰에서 매달 행해지고 있는 점을 보아도 신중신앙이 매우 중요시됨을 알 수 있다.

또 신중단 예경이나 새벽 예불 전 도량석 때 옹호도량의 원으로 ‘약찬게’ (‘대방광불화엄경 용수보살약찬게’)가 암송되기도 한다. ‘약찬게’는 80권 ‘화엄경’을 간략히 엮은 게송인데, 그 가운데 집금강신에서 대자재천왕까지 각기 수많은 권속들과 함께 부처님 회상에 모여온 39류 화엄성중이 다 칭명되고 있다.

신중청에서는 104위 신중이 예경되고 있는데 모두 다 화엄성중으로 일컬어진다. 신중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화엄성중은 물론이고 ‘법화경’과 여타 경전의 신중도 화엄성중이고, 게다가 불교와 습합되어 들어온 민속적이고 무속적인 신중도 모두 화엄신중으로 포섭된 것이다. 신중탱화에는 39위나 104위, 또는 그보다 더 적거나 많이 모셔지기도 한다. 대개 신중 가운데 대표로서 위태(韋䭾) 천신이 신중탱화 한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데 혼자만 따로 모셔지기도 한다. 위태천신은 보통 동진(童眞)보살 또는 동진보안보살로 불리고 있다.

위태천신은 ‘화엄경’ 소초의 판본에 판각되어 있기도 하다. 지리산 대암난야(臺岩蘭若)에서 건륭 39년(1774)에 중간한 ‘보현행원품소’의 말미에 위태존천상(韋䭾尊天像)이 보인다. 또 봉은사판(1856) ‘화엄경’(‘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의 첫째 권(현담 권1) 말미에도 위태존천상이 판각되어 있다. 봉은사판 ‘화엄경’은 그 저본이 징광사판(1690)인데 필자가 동학전문강원에서 공부할 당시 대교과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위태천신은 과거 보화유리광불 때에 성도하여 보안보살이라 이름했고, 석가여래 회상에서 성도하니 이름이 동진보살이라는 설명도 그림의 뒷장에 부기되어 있다. 머리에는 봉황깃털을 단 투구를 쓰고, 검은 신을 신고, 황금쇄갑옷을 입었으며, 손에는 무게가 8만4천근이나 되는 금강보저를 들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이 출세하실 때마다 불법을 옹호하고 스님들(僧尼)의 허물을 보지 않겠다는 원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신중은 삼보를 옹호하는 분이라 하여 신중단에는 절을 하지 않는 스님들도 있다. ‘화엄경’의 ‘입법계품’에는 사자빈신비구니가 햇빛동산에서 금강저를 든 신장들에게 금강지혜의 나라연 장엄 법문을 설하고도 있다.

그런데 ‘화엄경’의 ‘세주묘엄품’ 또는 ‘세간정안품’에 보면 화엄성중들은 언제나 부처님을 모시고 삼보를 옹호하는 큰 원으로 해탈문을 성취한 보살들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해탈한 경계만큼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을 읊어서 부처님 세계를 장엄하고 있다.

▲ 지리산 대암난야 중간(1774)의 ‘보현행원품소' 말미에 판각되어 있는 위태존천상.

예를 들면 집금강신은 항상 부처님을 친근 공양하기를 원하고 내지 부처님 계신 곳을 언제나 부지런히 수호한다. 몸 많은 신중신[身衆神]은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며, 족행신은 과거 한량없는 겁 동안 여래를 친근하고 따라 모셨으며, 도량신은 과거에 한량없는 부처님을 만나 원력을 성취하여 널리 공양을 올렸으며, 주성신은 한량없는 불가사의 겁 동안 여래께서 머무시는 궁전을 깨끗이 장엄하였으며, 주지신은 옛적에 깊은 원을 일으켜 항상 제불여래를 친근하여 한가지로 복업을 닦았으며, 내지 대자재천왕은 부지런히 무상법(無相法)을 관찰하여 행하는 바가 평등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원을 성취한 신중들의 해탈경계가 경에 구체적으로 보인다. 세주인 화엄성중들 중에 제일 먼저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을 읊은 신중은 대자재천왕이다. 80권 ‘화엄경’의 첫 게송이 바로 묘염해(妙焰海) 대자재천왕이 읊은 다음 게송이다.

불신보변제대회(佛身普遍諸大會)
충만법계무궁진(充滿法界無窮盡)
적멸무성불가취(寂滅無性不可取)
위구세간이출현(爲救世間而出現)
부처님께서 널리 모든 대회에 두루하시어
법계에 충만해서 끝까지 다함이 없다.
적멸은 자성이 없어서 취할 수 없으나
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출현하신다.

대자재천왕을 대표하는 묘염혜천왕이 ‘법계 허공계의 적정한 방편력 해탈문’을 얻어서, 부처님께서 시방 법계에 충만하시니 세간을 구제하시기 위하여 출현하심을 게송으로 찬탄한 것이다. 이 게송은 대웅전의 주련으로 걸려 있기도 하다.

그리고 화엄신중 가운데 마지막으로는 ‘여래께서 가없는 색상신을 시현하심을 보는 해탈문’을 얻은 묘색나라연 집금강신이 권속을 대표하여 “그대는 마땅히 법왕을 관하라. 법왕의 법이 이와 같으니 색상이 가없어서 널리 세간에 나타나신다.(汝應觀法王 法王法如是 色相無有邊 普現於世間)”라고 부처님을 찬탄하고 있다. 신중청에서는 집금강신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현[釋迦化現金剛神]이라고까지 일컬어진다.

이러한 화엄신중의 옹호를 의상 스님이 항상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상 스님의 법력을 알게 된 도선율사가 의상 스님을 다시 스승 지엄 스님과 함께 청하여 전날 받아 보관해둔 천공을 대접하였다는 것이다.

이 천공이야기를 전하는 ‘전후소장사리’조에서는 이어서 의상 스님이 부처님 사리를 신라에 모시게 된 일을 소개하고 있다. 의상 스님의 부탁으로 도선율사가 상제에게 청하여 부처님 치아사리[一牙]를 7일간 모셨다는 설화이다. 여기서 도리천의 하루는 인간의 100세에 해당된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 스님은 화엄경교를 전한 의상 스님의 면모는 ‘의상전교’조에서 드러내고, 부처님 치아 사리를 모시게 된 일을 이 ‘전후소장사리’조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성중의 옹호를 극진히 받고 있었던 의상 스님의 법력에 감복하여 도선율사가 도력으로 사리를 모시는 일을 도와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의상 스님은 후에 귀국할 때 호법용(선묘)의 도움을 받고, 귀국 후 보타낙가산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할 때도 화엄신중의 옹호를 받는다. 화엄신중이 항상 스님을 따라 모시며 외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화엄신중 신앙이 이 땅에 정착되고 이어지는 데에 끼친 의상 스님의 영향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고 하겠다. 신심 있는 불자들 누구나 든든하게 화엄신중의 옹호를 받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스스로 화엄신중을 도와 신중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30호 / 2018년 3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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