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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타력과 자력에 대한 오해

“나무아미타불은 자력과 타력의 합력입니다”

▲ 정토신앙은 불교사에서 가장 대중적인 신앙형태였다. 사진은 ‘불암(佛岩)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 새겨 놓은 전북 완주군 무등리입석. 출처=문화재청

요즘 우리나라에서 정토사상이 어떻게 연구되어 왔는지 좀 살펴보는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은 앞의 편지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는 ‘타력컴플렉스’입니다. 타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치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앞에서 폭포를 만나서 그 폭포수로 급전직하(急轉直下)할까 두려워해서 다시 상류로 기수를 돌리려고 할 때의 두려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력의 불교 타력의 불교
평가 내리는 작업이 교판

불교를 타력과 자력으로
교판 제시하는게 정토불교

타력은 48원서 나오는 힘
타력은 “본원력이며 불력”

그런 두려움이 있게 되면 타력을 이해하기 어렵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타력은 바로 그러한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허공 속에 한 걸음 내딛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타력은 그렇게 자신을 포기하는 데에서 이루어집니다.

타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의 증거로서, 타력의 염불을 말할 때 자꾸만 완전한 타력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자력이 있다고 보려는 몸부림을 들 수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자력일까요? 타력일까요?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해서 극락에 간다고 할 때 그것은 타력일까요? 자력일까요? 가장 안전한 타협책으로는 자력과 타력의 합력(合力)에 의해서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를 들어보면 TV를 볼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자력도 아니고 순전히 타력도 아닐 것입니다. 허공에 전파를 쏘아주는 방송국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일정하게 타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TV를 볼 수 없습니다. TV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켜주고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우리 자신의 자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력과 타력의 합력으로 TV를 즐길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서 극락에 가는 것 역시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얼핏 생각하면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우리의 염불이 있어야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열심히 염불하는 우리 자신의 자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력과 타력의 합력이지 타력만은 아니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조를 하게 됩니다.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열심히 하라고 말입니다. 물론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도 주변의 지인들이나 학생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권진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다보면 자칫 “나무아미타불” 염불이라는 것이 마치 자력의 수행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어디에서고 타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됩니다. 이 점을 저는 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TV시청과는 달리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것으로 해서 거기에 자력이 있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범주착오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자력이니 타력이니 하는 말은 TV시청에서의 경우와는 다른 차원에서 쓰이기 시작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자력이라는 말은 자력의 불교에서 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력의 불교에서 스스로의 불교 즉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불교를 타력이라고 하면서 그 이외의 불교를 전부 자력의 불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 전체를 두고서 어떤 불교는 자력의 불교이며 어떤 불교는 타력의 불교라는 식의 평가를 내리는 작업을 교판(敎判)이라고 합니다. 교판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의 줄임말입니다. 교상은 곧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판석은 그 부처님 가르침을 판단하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크게 타력과 자력으로 나누는 교판을 제시하는 것은 바로 정토불교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북위(北魏)의 담란(曇鸞) 스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나 자신의 작용이 없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서 극락에 가서 아미타불을 뵙고서 성불하자는 입장은 타력불교입니다. 타력문이라 하는 것입니다. 자력불교, 자력문에 상대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만약에 TV시청을 할 때 안테나를 세우는 행위와 같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것을 자력이라고 한다면 내 마음 밖에 존재하는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면서 스스로 안에서 부처를 찾고 조사를 찾는 선을 무엇이라 할 것입니까? 그것도 물론 자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게 되면 자력의 범위나 정의가 혼돈스럽게 됩니다.

그러면 타력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타력은 아미타불이 법장보살로 수행하실 때 세운 48원으로부터 나오는 힘을 말합니다. 이 48원을 본원(本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타력은 곧 본원력이고 불력(佛力)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열심히 하더라도 그렇게 염불하는 것이 자력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미타불 즉 법장보살의 48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 48원을 통하여 세운 부처님의 본원력을 느낄 수 없습니다. 본원 속에 들어있는 중생제도의 자비와 힘을 우리가 듣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나무아미타불”이라 염불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아미타불의 목소리에 대한 응답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이름을 불러봐”라고 하는 명령이라고 보아도 좋고 초청의 목소리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그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내가 이름을 부르는 염불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중심은 본원력에 있습니다. 그리고 본원력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이라 이름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무아미타불”이라 이름 부르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힘으로 왕생하는 것이라 보지는 않습니다. 그 이전에 먼저 아미타불의 본원력이 있기에 왕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불러도 부르다가 죽더라도 왕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타력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우리 밖에 존재하는 아미타불의 본원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스스로는 텅 비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 스스로 가득차고 우리 스스로를 굳건히 세워간다고 할 때는 아미타불의 타력에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아미타불의 본원력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정토문에서 말하는 염불 즉 타력의 염불은 그 출발이 내 안에서가 아닙니다. 나 이외의 밖에서입니다. 그 점에서 자력의 불교,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자력인 선불교와 다릅니다. 선은 나 안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밖에서 찾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부처가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 부처를 밖으로 불러내면 그뿐입니다. 그것이 자력이고 선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있는 부처로부터 출발해서 그 부처를 일깨우고 불러내기 위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이라는 수단을 취한다면 비록 그 염불 역시 염불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타력의 염불은 아닙니다. 자력문 안에서의 염불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론에서는 아미타불의 본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력의 염불은 정토문의 불교, 정토삼부경에서 말하는 염불과는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관무량수경’에서 말하는 하품중생들도 왕생한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토신앙은 바로 이러한 하품중생을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높은 근기의 수행자들이라면 선을 통해서도 자력으로 성불할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30호 / 2018년 3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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