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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스러운 보리수 스리마하보디

보드가야 보리수 후손…2400년 스리랑카 신심의 견고한 구심점

▲ 비구니 상가미타 스님이 인도 보드가야로부터 이운해온 보리수 ‘스리마하보디’. 나무 왼쪽의 황금색 기둥이 받치고 있는 가지가 상가미타 스님에 의해 이운된 보리수가지다. 스리랑카불자들에게 이 보리수는 살아있는 부처님과 같다.

아누라다푸라가 싱할라왕조의 수도가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400여년 전이다. 기원전 377년 판두카바야(BC 437~377)왕이 이곳을 수도로 정하면서다. 하지만 아누라다푸라가 왕국의 수도로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데바남피야팃샤왕에 이르러서다. 즉 불교가 전해진 이후다. 이후 1017년 남쪽에 위치한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이전하기까지 1400여년동안 아누라다푸라는 스리랑카 최대의 도시였으며 불교의 중심지였다. 아누라다푸라를 발판으로 삼아 불교는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로 퍼져나갔다. 남방불교의 거대한 줄기가 스리랑카로부터 뻗어나갔다면 아누라다푸라는 그 줄기의 뿌리였다.

마힌다 스님 동생 상가미타
스리랑카에 비구니계 전하며
보드가야 보리수 가지 가져와
불상·탑과 함께 사찰의 필수

살아있는 부처님 여겨지며
스리랑카불자 신행의 중심

티샤왕 부인 아눌라 왕비 출가
비구니계맥 해외전파의 시초

그러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니 어디서 끝내야 할까. 이 넓은 고대의 도시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살펴봐야 할 것인가 쉽게 결정 내릴 수가 없다. 아누라다푸라는 발길 닿는 곳, 눈길 머무는 곳곳 치열한 역사의 증인이다. 옛 사람들 신심 서려있는 불교사의 현장이다.

하지만 딱 한 곳, 아누라다푸라를 가장 아누라다푸라답게 만드는 곳을 택하라면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지금도 스리랑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바로 성스러운 보리수 ‘스리마하보디’다.

아쇼카왕의 아들이자 마힌다 스님이 스리랑카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하던 그 시절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 스리마하보디가 있다. 마힌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귀의한 데바남피야팃샤왕의 부인 아눌라왕비 또한 정법을 만난 기쁨을 감출수가 없었다. 기쁨은 눈부신 신심이 되었고 타오르는 구도의 열정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출가수행자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왕비의 요청에 데바남피야팃샤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가 출가의 뜻을 밝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마힌다 스님의 기쁨도 컸다. 하지만 스리랑카에는 아눌라왕비에게 비구니계를 전해줄 비구니스님이 아직 없었다. 마힌다 스님은 서둘러 부왕 아쇼카에게 비구니계를 전할 스님을 파견해 달라고 서신을 보냈다. 왕비에게 비구니계를 전한다는 것은 스리랑카에 비구니승가가 탄생한다는 뜻이었다. 비구니계가 인도를 떠나 다른 나라에 또 하나의 뿌리를 내리는, 불교사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그 대작불사를 이끌 적임자로 마힌다 스님은 자신의 동생 상가미타를 추천했다.

아쇼카왕은 잠시 고민했다. 비록 출가해 속세의 인연을 접었다지만,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더 없이 위대한 전법의 소임이지만 남매가 모두 자신의 품을 떠난다는 것은 왕으로서도 감출 수 없는 서운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힌다 스님의 뜻을 전해들은 비구니 상가미타 스님의 의지도 결연했다. 아버지라 해도, 왕이라 해도 그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아쇼카왕은 손수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 보리수의 가지를 하나 꺾어 상가미타 스님에게 건네주었다. 상가미타 스님의 파견을 요청한 마힌다 스님의 부탁이기도 했다. 당시 스리랑카 사람들은 나무를 숭상하는 민간신앙을 갖고 있었다. 마힌다 스님은 이러한 점에 착안해 불교가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보다 깊숙이 자리 잡기 위한 방편으로 보리수를 떠올렸다. 보리수가지와 함께 배에 오른 상가미타 스님은 막가시라(스리랑카 고대력 10~11월) 초하룻날, 아누라다푸라서 멀지 않은 스리랑카북부 바닷가에 닿았다. 왕과 왕비는 몸소 바닷가로 나갔다. 파도가 밀려드는 해안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가미타 스님과 보리수를 맞이했다. 보리수는 마힌다 스님을 비롯해 스님들의 수행처로 국왕이 보시한 마하메가완나숲에 심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아눌라왕비는 상가미타 스님으로부터 수계하고 비구니가 되었다.

▲ 스리마하보디 주변서 기도하는 불자들.

마하메가완나에 심어진 보리수는 그때부터 위대한 보리수 ‘스리마하보디’로 불렸다. 불법에 귀의한 아누라다푸라의 백성들에게 보리수는 살아있는 부처님과 다를 바 없었다. 스리마하보디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키워가듯 불교는 백성들의 가슴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성장했다. 이후 수많은 스리랑카의 사찰에 스리마하보디의 가지가 옮겨 심어졌다. 2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리마하보디와 그 후손 나무들은 스리랑카 곳곳에서 불자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스리랑카의 사찰이 여법한 도량이 되기 위해서는 3가지를 갖춰야 한다. 불상, 탑 그리고 보리수다. 그 가운데에도 불자들의 신행은 보리수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탑돌이를 하듯 보리수 주변을 돌고, 부처님에게 꽃과 청수를 공양하듯 보리수에 꽃과 청수를 올린다. 그리고 자신들의 발원을 적어 보리수 가지 끝에 걸어둔다. 보리수 아래 모여앉아 경을 읽고 기도 하는 모습 또한 흔히 볼 수 있다. 보리수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부처님 품,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마힌다 스님과 상가미타 스님은 모두 스리랑카에서 입적했다. 마힌다 스님의 사리탑은 미힌탈레 언덕 위해 남아있는 암바스탈라다고바다. 하지만 상가미타 스님의 행적은 묘연하다. 데바남피야팃샤왕 사후, 웃티야왕이 즉위한지 9년째 되는 해 입적한 것으로만 역사서는 전한다. 상가미타 스님의 세수 59세였다.

스리랑카역사서는 마힌다와 상가미타 스님의 출생에 대해 비교적 소상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 디파왐사(Dipavamsa. 島史)에 따르면 야쇼카왕은 젊은 시절 부왕의 명령에 따라 웃자인의 관리로 파견되는 길에 비데사 지역에서 만난 여인 데비와 결혼한다. 아쇼카와 데비와 사이에서는 남매가 태어났다. 바로 마힌다와 상가미타 스님이었다. 비록 정식 국혼은 아니었지만 마힌다 스님은 아쇼카왕의 장자였다. 스리랑카의 역사서는 이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아쇼카는 수도인 파트나푸라로 돌아가 100여명에 달했던 형제들을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곧이어 참혹한 정복전쟁이 뒤따랐고 환멸을 느낀 아쇼카왕은 불교에 귀의해 ‘법왕’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헤어졌던 남매와도 재회했다. 아쇼카왕에게는 많은 자식들이 있었지만 마힌다와 상가미타에 대한 부정은 애틋함 그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 입구에는 보리수가지를 들고 있는 상가미타 스님의 모습이 조각돼 있다.

그런가하면 5세기 법현 스님은 수행자가 된 아쇼카왕의 동생을 거론하고 있지만 그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7세기 현장 스님은 전해들은 바를 전제로 아쇼카왕의 동생 마혜인타라 스님에 관해 기록하고 있어 마힌다 스님을 거론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여전히 아쇼카왕의 동생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그 출생과 행적에 관해서도 스리랑카의 역사서와는 관점을 달리하고 있다. 심지어는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현장 스님의 기록은 전해들은 이야기이니 스리랑카에 남아있는 역사서에 비해 신뢰할 바는 아니다.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지고 상가미타 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와 보리수를 전해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여러 역사서가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인도로부터, 특히 아쇼카왕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수많은 나라 가운데서도 스리랑카야말로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그 가운데서도 스리마하보디는 스리랑카불교사를 지켜보고 있는 살아있는 증인과도 다를 바 없다.

수령이 2400여년이나 되었을 보리수는 무럭무럭 자라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했다. 가지를 넉넉하게 늘려 사방으로 늘어뜨린 채 푸르고 무성한 잎을 빛내고 있었다. 특히 상가미타 스님이 인도로부터 가지고 온 보리수의 원래 가지는 여러개의 황금색 기둥들이 설치돼 떠받치고 있다.

보리수 주변으로는 축대가 둘러쳐져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 축대는 19세기경에 야생코끼리와 동물들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는데, 조금씩 보수하며 단이 높아져 지금은 2층 높이로 나무를 둘러싸고 있다. 덕분에 이 신성한 보리수의 잎사귀 하나 만져 볼 수 없지만 스리랑카 사람들은 변함없이 경배를 올린다. 사원 입구에서부터 꽃바구니를 머리위로 높이 들고 들어와서는 축대 아래에 정성스럽게 꽃을 올리며 기도하는 모습은 그날의 전법이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증언이다.

아누라다푸라=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31호 / 2018년 3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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