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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불교학술세미나-상담심리학에서 본 염불의 의미

기자명 유소정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는 부처님과 염불자의 진정한 소통 장치

▲ 정토불교학술세미나는 3월3일 서울 동국대 영상센터에서 '동아시아 사상의 다양성과 불교'를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미국의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은 자신의 저서 ‘공감의 시대’를 통해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새 패러다임으로 다윈의 적자생존이 아닌 공감하는 인간임을 언급한다. ‘공감’이라는 화두야말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안보 영역 등의 필수 불가결한 것임을 새로운 해석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염불은 어떤 의미인가? 또한 나무아미타불 육자는 어떤 의미인가?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는 기술혁명의 시대에 자료들을 살펴보면 연령층이 낮아질수록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의 발전이 인류를 위한 것인데 인류의 행복과 발전과는 함께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결국 사람이 먼저이다. 우리네 생활이 점점 발전할지라도 결국은 사람으로 돌아가야 한다. 문제는 자살률의 증가와 공감능력의 상실이 주는 메시지에 불교인들의 고민이 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공명과 공감이 중요한 이유이다.

공감은 타인 감정 이해하는 것
상호의존 관계서 중요한 역할

염불 통한 이행도로 소통 가능
공감 뛰어넘어 공명 단계 지향

삶 속 타자 염불 권진하는 것
정토종에서 말하는 공생의 길

공명은 또 다른 공명 일으키고
공감은 공명하는 공감으로 진화
이것이 진정한 소통의 지름길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마음의 병은 망상으로 인해 발생한 오염된 마음을 수행을 통하여 불성을 깨달은 후 마음이 치유된다는 견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종교이다. 합리적인 이성적 사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현대인들이 염불을 자력과 타력으로 접했을 때, ‘스스로의 판단과 시행을 통한 변화’가 아닌 ‘타자로 인해 저절로 된다는 것’을 믿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오늘날 불교가 시대적 흐름인 인간에 관한 이해와 치유를 선 수행으로 강조하는 것은 훌륭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신앙의 측면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온전한 불교라 하기엔 어렵다.

공감은 대개 타인의 감정과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공감은 상호 의존 관계를 맺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관련된 어휘를 배운다고 해서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주위에서 나의 감정을 수용하고 존중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러한 공감의 특징은 염불에 적용해서 풀어보자. 미타와 염불자(나)의 소통수단은 바로 염불이다. 이 염불은 소통과 관계맺음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미타와 그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염불은 연결고리이자, 이때의 공감은 염불 소리를 듣기도 전에 먼저 큰 사랑의 마음으로 회향해 주시는 아미타불(진종적 아미타불)이다. 이는 상대(미타)로부터 유발되는 것이다.

사실 소통의 방식은 다양하다. 성도문에서는 수행, 좌선 등이 있으나,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본고에서는 염불만을 다룬다. 소통수단방식의 다양화는 그만큼 소통이 어렵다는 반증이자 불통의 심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염불을 통한 이행도를 통해 미타와의 열린 소통의 길을 나아 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감을 뛰어넘은 공명의 단계를 지향하는 길이다. ‘타력’이라는 책에는 지진(무너짐)을 경험한 이들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타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나 이외의 뭔가 커다란 힘이 내 삶의 방식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저자는 믿을 것 없는 현실에서 타력의 바람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름은 무엇인가. 이름은 겉모습이다. 진짜 ‘나’가 아니다. 홍길동, 사장 등 사장보다는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좀 더 진짜 나에 가까울 수는 있지만 ‘나’는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기도를 통해서이다. 기도는 자기의 본래 얼굴을 되찾게 하는 길이다. ‘나’는 진짜가 아닌 가짜이기에 ‘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진짜가 아닌 가짜에 집착하게 된다.

정토종에서는 내 이름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나의 존재를 버리는 것은 바로 무아가 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부르는 것은 나를 버리는 ‘무아염불’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무아다. 즉, 내가 있어도 내가 없는 것이 바로 무아다. 우리는 변화 속에 산다. ‘변화’ 속에서 변하지만 적응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비가 오면 ‘나’가 있는 사람은 비를 맞는다. 내가 없는데 비를 맞을 수 없다. 정토불교에서는 어리석음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하면 아미타는 할 일이 없어진다. 미타의 일은 어리석고 못난 자를 위한 것이기에 미타의 이름으로 내 이름을 지울 때, 바로 나는 아미타불의 100%의 가피를 얻게 되는 것이다. 칭명은 순전히 타력이어야 한다. 칭명은 우리 자신을 버리고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한 마디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아미타와 염불자(나)와의 소통의 수단이자 관계맺음이다. 이는 미타의 본원에 의해 유발된 것으로 공감의 원리로 설명 가능하다.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염할 때 명호가 명호를 듣게 된다. 소통의 부재는 유연성이 결여된 상태이다. 다시 말해 소통은 유연해야 가능한 것이다. 아미타불에 귀의하고 그 명호를 염함으로써 심신의 유연함과 정정진, 무생법인을 얻고 불퇴전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 미타의 본원과 중생의 본원이 맞아떨어지는 줄탁동시(啐啄同時)가 일어나는 공명상태가 된다. 이때의 공명은 생명의 원리인 ‘무량수’이자 ‘무량 광’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명호로써 내 이름을 지우는 과정이다. 이는 가짜인 ‘나’를 버리고 본래의 ‘나’의 얼굴을 찾는 길이다. 나의 존재를 버리는 것은 바로 ‘무아’가 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부르는 것은 나를 버리는 ‘무아염불‘이 된다. 이것은 내가 있어도 내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생사가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은 무생을 의미한다. 생사 없는 본래모습으로(불생불멸의 정토로) 돌아가는 것이 왕생이며 그것이 명호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래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해탈이다. 칭명은 범부에게 준 왕생의 확약으로 ‘나무아미타불’ 육자에서 본래의 마음이 드러나게 한다.

육자는 자아를 버리는 곳으로 그곳은 죽음과 임종이 있다. 육자에서의 죽음은 재생의 죽음을 뜻한다. 매 순간이 곧 임종이라는 것은 매 순간이 곧 왕생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왕생의 주체는 ‘나’가 아닌 육자이며 그것을 떠나서는 성불은 있을 수 없다.

삶 속에서 타자에게 염불을 권진하는 것이 상행대비인데, 이것이 바로 정토종에서 말하는 공생의 길이다. 이는 세상을 향해 쪼아대는 병아리의 작은 몸짓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톡톡톡하는 바로 그 순간 어미 닭은 정확히 그 자리를 감지하고 알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밖에서 쪼아준다. 병아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어미와 새끼는 서로 안팎에서 쪼아댄다. 이것을 불가에서 줄탁동시라 한다. 이 말은 송나라 ‘벽암록’에 등장하는 불가의 중요한 공안이다. 병아리가 알 속에서 발버둥 치는 그 순간, 어미 닭의 큰 부리는 동시에 같은 곳을 향해 쫓아준다. 이는 스승이 제자의 무르익음을 알아보고 일격을 가함으로써 그 의심을 타파하고 깨침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깨침은 ‘지금여기’라는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염불자가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염할 때 명호가 명호를 듣게 된다. 그것은 부처와 부처 사이의 일이 된다. 즉, 붓다의 본원과 중생의 본원이 맞아떨어질 때 줄탁동시가 일어나는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이미 열려 있는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바로 극락정토는 ‘지금여기’라는 시공간 안에서 이루 어지는 것이다. 이때 염불을 통한 소통의 주파수가 시작된다. 이는 개념적 공감을 넘어 공명하는 공감으로 나아가게 된다. 공명은 또 다른 공명을 일으키고 공감은 공명하는 공감으로 진화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소통이자 공생의 지름길이다. 따라서 참된 왕생은 꿈꾸는 낙토(樂土)가 아닌 지금 이곳에서 정토의 공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록 내가 정토에 가지 않더라도 현생에서 ‘지혜의 실천인 자비’를 해나가는 것 이다. 이것은 신란이 말하는 왕생이다. 이는 사랑과 진리에 의해서 인간 사이의 교제가(관계맺음이) 이루어짐에 있다고 본다. 현대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상실과 고독의 늪에 빠져있는 이때 에 회복된 미타와의 교제, 미타와 공명된 이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염불은 공의 지혜이자 무애의 가르침이다. 이는 중도의 삶이다. ‘행심반야바리밀다(行深般若波羅蜜多)’는 바로 공의 실천이며 이는 지혜의 실천인 ‘자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공감의 시대 염불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자력과 타력의 구분에 관한 논의가 아닌 ‘염불자와 불보살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란 문제제기 를 하고, 이 부분을 상담심리학에서 본 공감과 공명으로 탐구하였다. 확실히 우리 모두는 공명하는 공감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이해와 의사소통을 위해 그것을 개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공명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해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개발은 할 필요가 있다. 서론에서도 밝혔다시피, 불교는 종교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 사유의 시대라 하더라도 신앙적인 부분을 배제하고는 반쪽 불교가 된다. 이 부분에서 나무아미타불 육자를 염하는 것은 아미타로부터 유발된 공명이자 공감이라는 측면에 주목하고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만들어보자는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불교 밖의 사람들에게 불교의 신앙적 측면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보게 하는 의도였다.

염불이 치료의 한 부분으로 사용될 수 있고,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사상과 기법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 흥미를 가져야한다. 확실히 지난 수십 년 동안, 불교 사상과 수행들은 서양 심리학의 연구와 수행이 전반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명상과 심리를 접목한 책들과 워크숍을 통해 불안과 스트레스를 줄이고 분노를 조절하거나 감성지수를 높이는 등 많은 기법이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서양 심리치료사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상당수의 기법은 마음챙김, 명상, 선 수행의 불교 전통에서 왔다. 그러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한 염불의 실용적이고 내적인 기법과 자비를 수행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행법이 고통을 치유하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효과에 관한 연구들은 너 무나도 미흡한 실정이다. 이 논문에서 나는 종교적 맥락에서 심리학적인 공감능력 개발 방법을 제공하고자 한다.

▲ 유소정
유소정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과정
 
그러므로 상담심리학에서 본 염불의 의미가 인간 정신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진정한 르네상스를 창조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위해서는 불교계가 염불을 통한 치유 명상 콘텐츠를 개발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현재 선심리상담이 주류인 우리나라에서 정토심리상담 개발은 한국불교의 새로운 포교적 대안으로 기대할 만큼 그 가치가 중요하다 하겠다. 이 글이 정토심리상담의 탄생으로 이루어지도록 공헌하길 바라며, 특히 독자들의 마음속에 ‘나무아미타불’ 육자가 충만하기를 바란다.


[1431호 / 2018년 3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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