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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항쟁 당시 불교계 피해 컸던 것은 적극적 사회참여 결과”

[제주4·3항쟁 70주년 기념세미나] 미군정·정부수립기 불교의 사회참여 활동과 수난

▲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는 3월14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학술세미나 '미군정, 정부수립기 불교의 사회참여 활동과 수난'을 진행했다.

제주4·3항쟁은 제주사회 전반에 걸친 제주도민 모두의 항쟁 역사로 제주도 구석구석 모든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실이다.

해방 후 왜색불교서 벗어나고자
불교혁신회 구성· 승려대회 개최
제주지역 현안에 적극 참여도

제주4·3항쟁 당시 큰 수난 겪어
14개 사찰 소속 승려 16명 참사
관음사 등 제주사찰 37곳 피해

해방은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했고 제주사회를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꾸려지고 인민위원회가 각 마을별 자치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냈다. 이들의 활동이 모아져 제주도민 전체의 활동으로 이어진 결과가 결국은 제주도 전체의 비극이 되었지만 제주4·3항쟁이라는 역사적 항쟁의 기록 또한 만들게 되었다.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1일 ‘3·1절 기념대회’를 기점으로 한 경찰의 발포사건에 항의하는 활동에서부터 시작되어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령 해제까지의 기간 동안 제주도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제주4·3항쟁으로 제주도에서는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3만여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는데 이들 희생자의 80%가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고 이승만대통령의 강경진압이라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었다고 규정되어 있다. 또한 미군정의 역할도 규명되어 있기도 하다.

제주불교 역시 제주 사회의 현안에 제주도민과 함께 하여 제주4·3항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하지만 제주4·3항쟁으로 활동 자체가 모두 중단되는 시련을 겪어야했다. 종교적 기반 시설인 사찰 건물 및 불상을 비롯한 집기는 물론이었고 승려들의 피해 또한 막심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제주4·3항쟁 당시의 불교계의 흐름을 살펴보자.

해방으로 불교계에서는 일제하 불교에서 벗어나 한국불교 본연의 모습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45년 8월20일경 조선불교혁신회가 구성되고, 1945년 9월22일과 23일 양일간 전국 승려대회가 개최되었다. 일제의 사찰령에 의한 식민지 불교를 극복하고 새로운 교단을 만들고 친일불교를 혁파하고 수행승이 위주가 되는 민족 전통의 불교를 정립하기 위한 의안을 결정하였다.

전국 승려대회의 결정은 전국 불교에 영향을 끼쳤으며 제주불교도 그 실천의 일환으로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우선 조선불교혁신 제주도 승려대회의 활동 모습부터 살펴보겠다. 제주불교 자체적으로도 새로운 국가 건설과 함께 불교도 개혁의 시점이라고 인식하여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를 개최함을 선언하였다.

해방에 발맞춰 기존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교단도 일대 변혁을 행하고, 건국 정신과 발맞춰 전국적으로 신조선의 불교를 재건하려 한다고 승려대회의 목적을 밝혔다. 제주불교는 새로운 시대가 일제의 규제로 인한 구속에서 벗어나 자치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이므로 불교 교단의 통합을 통해 불교를 재건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 승려대회는 당시 제주도의 82개 사찰 중 80개의 사찰이 참여한 제주불교 전체의 움직임이었다. 승려대회의 준비위원장은 승려 이일선 스님이었고 회의진행으로 관음사의 오이화 스님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승려대회는 ‘교무원을 운영할 것’ ‘강원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대중불교를 실현할 것’ ‘사찰을 정화할 것’ 등의 13개의 의안 중 하나로 건국정신 진작에 관한 건을 논의하였다. 해방으로 제주불교는 우리나라 전체 사회분위기에 맞춰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건국정신을 진작시키자는 의안을 다뤘던 것이다.

이러한 제주불교의 사회참여 인식은 더 나아가 제주사회의 현안에 깊숙이 참여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제주도 승려대회 준비위원장이었던 이일선 스님은 제주4·3항쟁 발발 원인이 되는 ‘3·1기념행사 제주도위원회’의 선전동원부에 소속되어 활동에 참여했다

‘3·1기념행사 제주도위원회’는 1947년 3·1절 기념행사를 전도민의 행사로 치르기 위해 구성한 제주도의 관공서와 사회단체, 교육계 등이 망라된 조직이었다. 3·1절 기념행사는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행사 준비를 주도하였다. 제주도 민전은 1947년 2월23일 결성되었고 제주불교의 이일선 스님은 민전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3·1절 행사 때 시위를 불허한다는 이유 등으로 민전과 이견이 있었고 민전 의장단과 미군정 당국은 몇 차례 협의에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며 3·1절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제주북국민학교에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3만여명이 모였다. 3·1절 기념행사가 끝나고 시위 도중 경찰이 6명을 총으로 사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3·1사건은 제주4·3항쟁의 도화선이 된다.

이일선 스님은 대중연설로 제주도민을 만나기도 하는 등 해방 이후 자주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여 제주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승려 원문상은 2.7사건에 단독선거 반대에 참여 하였으며, 이세진은 4·3항쟁 발발 이후 입산하여 무장대 수뇌부 활동에 적극 나서는 등의 사회참여 활동을 보인다.

또한 제주도승려대회로 결성된 제주불교 교무원은 3·1사건으로 인한 희생자 유가족 조위금 모집에 ‘제주신보’에 조위금을 기탁하는 것으로 참여한다. 이와 같이 제주불교는 제주4·3항쟁기 제주사회의 현안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제주4·3항쟁기 제주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하여 활동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항쟁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제주4·3항쟁으로 근대제주불교 활동을 주도하였던 제주도의 승려들이 대거 희생되어 제주불교 활동 전반에 크나큰 손실이 발생했다. 제주4·3항쟁기 제주불교의 승려 피해는 14개 사찰 소속 승려 16명으로 조사되어 있다. 승려 외 사찰 소속 인명의 피해도 물론 있었다. 승려 16명은 총살 10명, 수장 2명, 고문 후유증 사망 1명, 일본으로 도피 1명, 행방불명 2명으로 조사되어 있다.

가해자는 모두 토벌대이다. 피해 시기는 제주4·3항쟁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의 초토화작전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사찰 경내에서 총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2.7사건 관련, 3·1사건 관련, 보도연맹 관련 등의 이유로 예비검속하였고 산채로 돌을 묶어 바다에 수장 혹은 집단학살의 과정 등에 승려들이 살해당하였다. 수장과 집단학살은 정식재판에서 죄를 묻지 않고 군경이 임의대로 인명을 살상한 불법적인 일이다.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는 친일을 반성하고 건국정신에 맞게 불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대회였다. 희생된 많은 승려들이 제주도 승려대회에 참석하였던 이력을 보인다. 그러므로 제주4·3항쟁으로 인해 제주불교 활동을 이끌던 주요 승려들의 희생은 제주불교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었다. 4․3항쟁이 제주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 만큼 제주불교도 해방 이후 새로운 국가건설과 함께 계획했던 새로운 불교활동의 염원 자체가 좌절되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제주4·3항쟁으로 피해를 입은 제주불교 사찰은 37개소로 조사되어 있다. 사찰 내에 있던 법당과 요사채, 객사 등의 사찰 내 건물 피해 위주다. 건물 이외에 불상 등의 피해는 이제 오랜 세월이 흘러 쉽게 조사할 수 없는 실정이다. 소개령으로 피난할 경우 불상 등을 끌어안거나 등에 업어서 옮겨 다녔던 상황이 증언되고 있다. 불상과 탱화, 사찰 내 집기 등의 훼손은 사찰 건물의 피해 규모에 따라 발생되는 정도로 짐작하여 추산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 제주도에 제주4·3항쟁 이전부터 봉안하였던 불상과 탱화를 보유하고 있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점 또한 제주4·3항쟁기의 피해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사찰 피해 시기는 주로 1948년 11월경에서 1949년 2월에 걸쳐 주로 이루어지는데 토벌대의 무자비한 학살과 방화가 자행되던 초토화 작전 시기에 해당한다.

사찰 건물의 피해는 사찰 경내의 모든 전각을 소각하고 불상 등의 집기까지 소각시키는 전소의 형태가 있고 불 질렀으나 일부만 소각된 경우, 건물을 사용할 수 없게 일부러 파옥시키는 경우, 그리고 소개령에 의해 접근을 금지당하면서 폐허가 된 경우, 강제 매각으로 뺏기는 경우 등으로 조사된다.

전소된 사찰은 18개소이다. 법당 요사채 객사 등 사찰내의 건물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소각하였으나 일부만 탄 곳이 2개소이다. 사용할 수 없게 하려는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파옥한 곳이 10개소로 지붕과 벽을 허물어 건물로서의 기능을 없애는 상태로 훼손하였다. 오랫동안 접근과 사용이 금지되면서 폐허된 곳이 4개소, 강제 매각당한 곳이 1개소로 집계된다. 전소시킨 후 토벌대 주둔소로 활용하거나 육군훈련소 숙영지 혹은 면사무소로 사용되는 사찰도 있다.

제주4·3항쟁기 제주불교의 수난은 제주사회상에 적극 참여한 결과였다. 이는 비단 제주불교만의 수난이 아니라 제주도 전체의 수난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제주4·3항쟁에 제주불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을 살폈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만큼 제주불교의 피해 또한 막심하였다. 제주불교를 이끌던 승려의 피해는 오래도록 그 후유증이 컸으며, 사찰 건물 등의 피해 또한 재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근대 이후 제주불교의 중심지였던 관음사는 관음사전투로 인해 인명의 피해와 사찰 건물의 전소로 인한 피해로 제주불교 활동의 전체적인 어려움을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1964년에 이르러서야 관음사의 재건이 시작되는 것으로 그 험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이일선 스님, 이세진 스님 등의 승려들이 제주4·3항쟁에 직접 참여했다는 이유로 수장당하는 일이 있었다.

▲ 한금순
제주대 사학과 외래교수

 

제주불교는 해방으로 친일을 반성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맞춘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는 활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제주4·3으로 인해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오늘날 제주불교는 제주4·3항쟁기 치열한 제주사회 참여활동을 그 기반으로 한 것임을 기억할 일이다. 그러나 제주불교계의 제주4·3항쟁에 대한 기억 활동은 4·3위령제의 봉행 정도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이는 제주도 내에 4·3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 피해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본 학술대회가 불교계의 제주4·3항쟁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 연구가 절실히 필요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또한 지금이라도 한국불교도 한국현대사의 중요 사건인 제주4·3항쟁과 제주불교의 사회참여 활동에 관심을 기울여 함을 강조하고 싶다.

 

[1432호 / 2018년 3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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