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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왜 일본 정토불교를 말하는가

“인도와 한중일 불교 회통해야 새로운 구제론 제시”

▲ 일본 정토종 개조인 호넨 스님.

최근 한국에서 “일본의 종교가 어떻게 연구되어 왔는가”하는 주제로 열린 워크숍에 참여한 일이 있습니다. 일본불교 전반에 대한 연구현황에 대해서는 원영상 선생님이 발표를 하였고 일본의 정토불교에 대한 연구현황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를 하였습니다.

일본 정토불교는 인도불교
중국·한국불교까지도 섭렵
깊이 파고든 연구들 탁월
관련 서적도 월등히 많아

한국 종파불교 지향 않아도
일본 정토불교 폭넓게 알면
한국불교 발전에 큰 도움

그런데 일본의 유교나 신도, 심지어는 고전문학의 연구현황을 살펴본 여러 선생님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분야의 연구가 우리나라에서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 반면 원영상 선생님과 저는 공히 일본불교에 대한 연구나 일본의 정토불교에 대한 연구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토론에 참여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박홍규 교수님으로부터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의 불교나 정토불교에 대한 관심이 늘고 연구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시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구제(救濟)라는 면에서, 그렇게 일본의 불교나 정토불교에 대한 앎이 필요한 것입니까?”

박홍규 교수님은 일본의 유교 중에서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구제’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측면의 문제인 것이지요. 구제라는 말은 우리 불교의 언어로 말한다면 ‘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구제, 혹은 제도되는데 일본불교를 공부하는 것이, 또한 일본의 정토불교를 공부하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필요한 일인가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필자의 ‘편지’를 읽는 분들 중에서도 왜 일본의 정토불교를 말하는가, 우리의 전통 안에서도 얼마든지 정토불교가 있을 것이고 중국에서도 정토불교의 전통이 대단하지 않은가 이렇게 의혹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충분히 그런 의혹을 하실 만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교전통 안에서도 정토사상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고 또 중국의 불교 전통에서도 훌륭한 정토신앙의 모범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정토불교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 않고 일본의 정토불교에 대한 이야기 역시 하는가? 먼저 드릴 수 있는 답변이 ‘인연’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지금 갖고 있는 정도라도 정토불교에 대한 신심을 가질 수 있게 된 인연은 중국의 정토불교 공부나 우리나라의 정토불교 공부를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일본불교의 전통을 공부하는 와중에서 정토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고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선생의 책 ‘나무아미타불’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정토불교를 이해하게 되고 믿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그렇게 인연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류(下流)에서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맛이 좋았습니다. 계속 마시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류에만 있지 않고 중류로 올라가서 물을 마시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아예 저 멀리 상류까지, 마침내는 원류(源流)로까지 올라가서 물맛을 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중류는 우리나라 정토불교의 전통이며 상류는 중국 그리고 원류는 인도라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체계적으로 공부를 배울 수 있었다면, 원류에서 상류, 중류 그리고 하류로 내려갔더라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원류에서 출발하는 분들의 문제는 대개는 원류에서 상류, 그리고 중류에서 멈추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제가 하류에서 물맛을 맛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류에서부터 시작하면 중류나 상류, 그리고 원류 중에서 그 어느 하나라도 빠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류는 동일하였지만 흘러 흘러오면서 상류와 중류 그리고 하류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 맥락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근기에 맞게 법을 설하신다(隨機說法)고 하셨습니다만, 중생들 역시 자기 근기에 맞추어서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기(隨機解法)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이해가 생깁니다. 그런 이해들을 서로서로 맞추어 보면서, 자기 입장을 정해가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 해석학적 방법이라 말합니다.

자, 이제 박홍규 교수님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종파불교적 특징이 약하고 회통불교(會通佛敎)적 전통이 강합니다. 그런 까닭에 개방적입니다. 우리의 전통불교만을 묵수(墨守)하거나 국집(局執)하지 않고 다양한 불교전통을 받아들여서 참조하면서, 새롭게 우리 것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남방불교, 티벳불교, 대만불교 다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용광로에서 새로운 불교를 창조해 갑니다.

이런 부분은 이미 종파불교가 확립되어 버린 일본불교보다 좋은 점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개방성에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불교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그런 점을 정토불교에 대입(代入)시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원류인 인도의 정토불교, 상류의 중국의 정토불교, 그리고 중류인 우리나라 정토불교는 물론이지만, 일본의 정토불교까지 참조하면서 새롭게 ‘구제를 위한 방법론’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원류, 상류, 그리고 중류에 비한다면 일본의 정토불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유독 일본에서 ‘정토종’이라는 종단이 성립되었다는 것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은 정토신앙 그 자체를 질적으로 깊이 파들어 갔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횡으로 넓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종단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종학(宗學)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정토불교에 대한 저술의 양이 우리보다 월등하게 많습니다. 우리나라 스님들 책을 다 모은 ‘한국불교전서’에서 정토관련 저술을 헤아려보면 약 20여종이 됩니다. 그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정토불교 종단들에서 나온 책들, 즉 일본에서 정토신앙을 했던 스님들의 저술을 다 모으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만큼 온갖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거듭했습니다.

그들이 토론한 내용들 중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정보도 많이 나옵니다. 그런 정보들을 다시 흡수하고, 또 원류, 상류, 그리고 중류의 정토불교와 함께 섞어서, 회통하여, 우리의 ‘구제를 위한 방법론’을 새롭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생각은 그것입니다.

일본의 정토불교를 말한다고 해서 어떤 일본의 정토문 종단으로 개종(改宗)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경우는 그 역시 불가능합니다. 한 종단의 종학만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단의 종학을 다 배우고 공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일본의 어떤 정토문의 종파로 개종하고 싶다면 그것은 그분의 종교적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가 그것을 의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저는 일본의 정토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의 정토불교 미래 역시 밝을 것이라 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굳이 ‘일본’일 뿐이겠습니까. 대만의 정토불교도 공부해야 합니다. 다만,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저에게는 그런 인연이 ‘일본’을 통해서 왔기에, 일본의 정토불교를 이야기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생각할 뿐입니다.

제가 소개하는 부분들 중에서 다시 내다버릴 부분은 여러분들이 선택하십시오. 저는 그저 다양하게 소개할 뿐입니다. 그것이 저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32호 / 2018년 3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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