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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파타차라 ⑤

기자명 김규보

“이보다 더 허망할 수 있을까?”

기억을 더듬는 파타차라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던 빗속에서 피를 토하며 고통스럽게 죽은 남편, 세상에 나온 지 몇 시간도 안 돼 독수리의 발톱에 찍힌 채 허공으로 사라진 둘째, 범람한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어미의 눈을 간절히 쳐다보던 첫째. 자던 중 순식간에 무너진 집에 깔려 비참한 죽음을 맞았을 부모. 모든 일이 하루 만에 일어났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보다 더 기구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허망할 수 있을까. 손 뻗으면 당장이라도 잡힐 것 같은 얼굴들을 이제 더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니. 미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어 땅바닥에 엎어져 몸부림쳤다.

부처님, 온가족 잃은 여인에게
“누군가에게 의지하는건 허망
파타차라여! 두려워하지 말라”

파타차라의 이야기를 들은 대중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고개를 숙여 입을 닫았다. 누더기만 걸친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는지 누군가 가사를 벗어 파타차라에게 건넸다. 힘없이 받아든 파타차라는 누더기 위에 가사를 걸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이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것과 달리, 한 사람만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북새통 중에 얼핏 붓다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본 건 왜입니까? ”
“파타차라여.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는 그대를 보호해 주는 곳이고 인도해 주는 곳이다.”

보호해 주고 인도해 준다니, 나는 보호받을 필요도 인도받을 필요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 모두 나 때문에 절명해 버렸는데 어찌 편안히 살 수 있단 말인가. 의지할 가족 모두 나 때문에 죽어 버렸는데, 누구에게 의지를 한단 말인가. 차라리 지금처럼 세상을 원망하며 미쳐 돌아다니리라.

“파타차라여, 그대의 생각이 맞다. 남편과 자식과 부모는 죽었다. 독사에 물리고 독수리에 쪼이고 물에 빠지고 집에 깔렸다. 하지만 그대가 지금 흘리는 눈물은 어떤가. 억겁을 윤회하면서 그대는 가족을 잃고 눈물을 흘려왔다. 그것들을 모으면 저 사대양의 물보다 많다.”

입으로 내뱉지 않은 생각이었을 뿐인데 어떻게 알았을까. 윤회하는 동안 흘린 눈물과 지금 흘리는 눈물은 무엇이 다른가. 파타차라는 궁금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마음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간절함이 꿈틀거렸다. 얼마만인지 모를 두근거림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토악질이 치밀어 올랐다. 하나하나 떠오르는 가족의 얼굴이 그날 그토록 세찼던 폭풍우를 뚫고 느릿느릿 다가왔다. 원망하는 표정일까 두려워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땅바닥에 엎어졌다. 저들을 두고 살아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붓다라고 하셨습니까? 묻겠으니 답을 주소서. 저는 살 길을 찾지 못합니다. 의지했던 가족이 저 때문에 하루아침에 죽었습니다. 의지할 곳이 더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저에게 마음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셨습니까? 제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파타차라는 눈이 풀린 채로 흐느끼며 마음에 무엇 하나 보태지 않고 살리라 다짐했다. 산다면 지금처럼 미쳐야 했고, 미치지 않는다면 살지 못할 것이다. 또 한 번 가족들에게 죄를 지을 순 없었다.

“파타차라여, 그들은 세상을 떠났고 그대는 세상에 있다. 그러니 의지할 곳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의지한다는 믿음은 허망하다. 그대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았기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그러니 죽음이 다가올 때 누구도 지켜줄 수 없다. 그대는 가족들을 지키지 못한다. 파타차라여, 들리는가. 두려워하지 말라.”

멀리서 날아온 새 소리가 기원정사 너른 마당의 기나긴 침묵을 갈랐다. 파타차라는 새의 궤적을 거슬러 바라보았다. 점점 붉어지는 태양이 서쪽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아침에 떠올랐던 것이었다. 내일 아침엔 다시 떠오를 터였다. 사대양을 뒤덮고도 넘쳐흐르는 억겁 윤회의 눈물이 보였다. 파타차라가 땅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규보 법보신문 전문위원 dawn-to-dust@hanmail.net
 

[1433호 / 2018년 3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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