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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우렐리우스 황제 청동기마상과 황룡사의 장육상

기자명 주수완

동서양의 거대 청동상으로부터 문화교류의 흐름을 읽다

▲ 캄피돌리오 광장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청동기마상 복제품. 청동상 높이 4.2m.

판테온의 정면인 남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그대로 걸어 내려가다 보면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동쪽으로 걸어 알티에리 궁전에 다다라 다시 동남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조금 더 걷다보면 카피톨리노 언덕을 만나게 된다. 이 언덕으로 오르는 ‘코르도나타’라는 형식의 계단과 그 위 언덕의 ‘캄피돌리오’란 광장은 모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이다. 이 광장을 둘러싸고 세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정면의 건물은 현재 로마 시청 건물인 ‘세나토리오’이고 양옆으로 ‘카피톨리노 박물관’과 ‘팔라조 콘세르바토리’로서 모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광장 한 가운데는 거대한 청동기마인물상이 서있는데, 바로 로마의 제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21~180)를 묘사한 것이다. 그는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명상록’을 쓴 스토아 철학자로 친숙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글레디에이터’ 초반부에서 게르만 족들과 로마의 북쪽 도나우 강변에서 전쟁을 치루던 중 신임하던 장군 막시무스에게 황제를 물려주려고 하다가 망나니 아들 콤모두스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의 황제로 기억될 것이다. 이 영화는 사실과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여하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로마역사에서 소위 오현제(五賢帝), 즉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이다.

2세기에 청동으로 만들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동상

4m 넘는 크기에 정교함 극치
역동적인 모습에 찬사 쏟아져

광화문의 세종대왕 동상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기술력 평가

400년 후 신라에서 만들어진
황룡사의 장육상이 이에 비견

몽고 침략으로 불타버렸지만
아스카 청동상 통해 위용짐작

청동상 주조는 그리스의 전통
로마를 통해 동양도 영향 받아

현대적 느낌의 커다란 별 모양으로 장식된 광장의 한 가운데에 당당하게 놓인 이 청동상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박물관 안의 별도의 전시실에 옮겨있다. 필자가 이 청동상을 보러간 이유는 AD 180년경에 만들어진 이 거대한 청동상의 주조기법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도 뛰어난 청동주조기법이 예로부터 발전해 있었는데, 청동기시대에는 다뉴세문경(잔무늬거울)이라 불리는 정교한 사선무늬가 새겨진 거울을 만들 정도였고, 삼국시대에는 금동반가사유상처럼 정교한 금동불상이나 혹은 황룡사의 장육상처럼 거대한 청동불상이 제작된 바 있다. 그래서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로마에서 만들어졌다는 이 높이 424㎝에 달하는 거대한 청동상이 어떤 주조기법으로 제작되었는지 한번 비교해보고 싶었다.

직접 눈으로 이 청동기마상을 보는 순간 그 위엄에 놀라버린 필자는 과연 서양과 동양의 미술을 비교한다는 것이 너무 무모한 일이 아닐까 잠시나마 회의마저 들었다. 동양의 불상은 사실 아무리 크더라도 대체로 기둥처럼 단순한 형태를 하고 양쪽 손 정도가 돌출된 정도랄까, 그런데도 그마저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어 그 흔적만 찾을 뿐이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 청동기마상을 보라. 압도적인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말의 모습이나 손을 번쩍 든 역동적이고 자유분방한 자세는 사람들이 왜 서양문화에 있어서 로마를 그토록 입이 마르도록 칭송하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이것을 기원후 180년경에 만들었다니, 우리에게는 신라의 아달라이사금, 백제의 초고왕, 고구려의 고국천왕이 활동하던 까마득한 고대로만 느껴지는 시대이다. 이 청동기마상은 지금의 광화문 광장에 놓인 세종대왕 동상의 제작기술보다 못할 것이 전혀 없었고, 1968년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보다는 조금 더 나은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 1. 팔라조 콘세르바토리 박물관에 전시된 청동기마상 원작. 기원후 180년경 제작. 2. 기원후 606년 백제계 장인 도리에 의해 제작된 아스카대불. 높이 약 2.7m.

이런 거대한 주조를 하려면 어딘가 구멍이 있어야 한다. 그 구멍이 주물을 만들 때 안쪽 거푸집과 바깥 거푸집을 연결해서 쇳물이 들어갈 공간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며, 나중에 동상 안쪽의 흙을 빼내는 역할도 한다. 이 구멍은 보통은 청동상의 바닥이나 등에 있어서 세워놓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청동기마상은 그런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또한 뒤에도 그런 구멍이 없이 정교하게 마감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황제와 말을 따로 만들어 결합시킨 것을 알게 되었다. 즉, 황제가 앉아있는 말의 등 부분과 황제의 엉덩이 부분이 뻥 뚫려있어서, 어떻게 거푸집을 설치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 이 부분을 연결하여 조립했다니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다. 통째로 주조하지 않고 이처럼 나눠서 주조했다고 해서 기술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만약 이렇게 결합된 부분을 보이지 않게 감쪽같이 할 수만 있다면 매우 적절한 방법이다. 다만 이 방법을 시도하기 어려운 이유는 청동은 녹았다가 식을 때 수축되기 마련인데, 상황에 따라 수축하는 정도가 달라서 아무리 틀의 크기를 정교하게 맞춰 거푸집을 만들었더라도 수축하는 동안 크기가 달라지거나 틀어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수축률을 예측하기 어려워 이렇게 정교하게 끼워 맞추기가 사실상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원래부터 하나였던 듯 감쪽같이 끼워 맞춘 주조기법은 수축률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고난이도의 작업이다. 더구나 그 틈새로 바라본 청동상의 단면은 매우 균질한 두께를 지니고 있어 그 정교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이보다 400년 뒤이긴 하지만, 신라 경주에서는 574년에 높이 5m 이상, 무게 6톤에 이르는 대형 청동불상을 황룡사에 세우게 된다. 아쉽게도 이 불상은 몽고의 침입 때 황룡사가 불타면서 함께 사라져 버렸지만, 아직까지 이 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던 절터의 금당 자리에는 불상의 거대한 받침돌이 남아있다. 이 돌의 앞뒤 길이만 3m가 넘고 그 안에는 지름 160㎝의 동그란 원형의 홈이 파여 있는데, 아마 여기에 꼭 맞게 불상이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거대한 불상은 작은 불상을 그대로 확대한다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거대한 불상을 주조하기 위한 거푸집을 지금은 강력한 유압장치로 붙잡고 작업할 수 있지만, 고대에는 그런 기계가 없기 때문에 땅에 묻어서 주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높이가 1~2m라면 주조 후에 지상으로 끌어내는 것이 가능하지만, 높이 5m가 넘으면 끌어올리기조차 어렵다. 또한 거대한 주조물은 쇳물이 들어가는데 한참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먼저 들어간 쇳물이 식어버려 완전히 한 덩어리로 식지 않고 몇 단의 균열을 만들 수도 있다. 때문에 최대한 균질하게 식어야 하고, 주물 시에 발생하는 막대한 가스를 빼내는 것도 고난이도의 작업이다. 이런 주조기술은 단순히 불상주조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기술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 3. 경주 황룡사지의 높이 5m 넘는 장육상을 받쳤던 받침돌. 길이 약 3m에 이르는 대형 받침돌이다. 4. 아우렐리우스 개선문의 황제. 정복민에 대한 황제의 자비를 나타내는 손모습은 불상의 수인을 닮았다.

비록 이 대작은 사라졌지만, 아쉬우나마 이보다 조금 늦은 606년에 백제계 장인 도리(止利)가 일본 아스카의 호코지(法興寺, 아스카데라)에서 제작한 청동불좌상은 황룡사 장육상의 위용을 짐작해보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좌상의 주조기법도 매우 뛰어난데, 다만 좌상이라는 점에서 보면 황룡사는 입상이었으므로 황룡사상이 주조하는 측면에서나, 법당에 고정시키는 면에서나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여하간 아스카대불은 비록 시대는 청동기마상에 비해 내려오지만 그 위용은 청동기마상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물론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이렇게 거대한 불상들이 로마에 비해 늦게 세워진 것은 단순히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동양은 특정 인물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기념하거나 숭배하는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상처럼 사람을 조각으로 만드는 이러한 전통은 그리스 시대로부터, 아니 더 나아가 그리스 문명의 원천이기도 했던 이집트에서부터 시작해서 내려오는 지중해 문화의 특징이었다. 이것이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을 통해 인도에까지 전해지면서 인도 북부에서 간다라 미술을 꽃피웠고, 그 전통이 다시 동아시아로 전해져 비로소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서양이라고 해서 이런 고대의 청동상이 많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로마 황제들은 이러한 거대한 자신의 청동상을 남기려고 노력을 많이 한 것 같은데, 후에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로마 황제들의 동상은 우상으로 여겨져 대부분 녹여 없앴다. 그럼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이 살아남았던 것은 기독교도들이 이 상을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잘못 알고 남겨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상이 아우렐리우스임을 알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이고 이를 캄피돌리오 광장 중앙에 배치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아이디어였다.

마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개선문에도 이 청동기마상과 유사한 도상의 기마황제상이 새겨져 있다. 오른손을 들어 말 아래의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과 동일한 자세이다. 마치 불상의 수인에 있어 오른손을 들어 ‘두려워말라’는 뜻인 ‘시무외인’을 결한 것과 유사한 모습인데, 실제 로마의 도상에서도 이런 자세는 정복민들에게 두려워말라며 자비를 베푸는 황제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부처의 자비와 황제의 자비는 이렇게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기원 후 166년경 중국 한나라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사서에서는 그를 안돈(安敦)으로 기록했다. 그가 남긴 자신의 거대한 청동상과 이후 동아시아에 불어 닥친 거대청동불상의 시대를 생각하니 아마 그 인연은 이미 그때부터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나보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33호 / 2018년 3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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