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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고대불교-불교의 전래와 수용⑥ 가야-하

5세기 후반 이미 불교 수용…가야라는 명칭 불교에서 기원

▲ 5세기 후반 가야에 불교가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의 연화문. 출처=고령군 홈페이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의하면 “본래 대가야국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대략 16대 520년간 이어졌다”고 하며 또한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을 인용하여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고 하였다”고 하여 ‘가락국기’의 본가야(금관가야)의 건국신화와는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고대 한국의 건국신화의 유형화를 시도했던 연구자들에 의하면 본가야 수로왕의 건국신화는 신라의 박혁거세신화와 마찬가지로 남방신화에 속하며,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단군신화나 주몽신화와 함께 북방신화에 속한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한 전기와 후기 각각 가야연맹체의 맹주였던 두 나라의 신화는 맹주국이 된 이후 자기중심적인 내용으로 새로이 재구성된 설화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나라 이외의 소국들도 원래는 모두 각각 나름의 건국신화를 가졌을 것이지만 오늘날 전해지지 않을 뿐이다. 본가야와 대가야의 건국신화는 상당히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뒷날 불교가 전래된 이후 윤색되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본가야의 그것은 아유타국의 허황후와의 결혼으로 건국이 완결되었다는 내용으로 변조되었던 반면에, 대가야의 그것은 여성 시조로서의 역할이 뚜렷한 가야산신 정견모주의 명칭에 불교적인 윤색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다. 정견이란 불교의 8정도 가운데 첫째 조항으로서 바른 견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
기존 건국신화와 기록 달라

각기 다른 건국신화 가졌지만
불교 전래된 뒤 윤색 공통점

최치원 ‘석순응전’의 기록은
신라에 앞서 불교 수용 확인

경북 고령군 대가야 고분의
연화문 벽화는 불교의 영향

무령왕릉과 비슷한 고분양식
백제를 통한 불교전래 흔적

‘가야’는 코끼리나 소로 번역
‘상두산’ ‘우두산’은 가야 기원

또한 최치원의 ‘석순응전(釋順應傳)’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모주의 10대손이며,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惱王)인데, 신라의 이찬 비지배(比枝輩)의 딸에게 청혼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대손이라 하였다” 고 하여 석존의 과거세 태자 때의 이름인 월광태자를 붙이고 있음을 보아 이때는 이미 대가야에 불교가 신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가야와 신라 사이의 결혼 사실은 ‘삼국사기’ 법흥왕조에서도 전해주고 있어서 그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법흥왕 9년(522) 3월 가야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요청하매, (법흥)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보냈다”고 하여 비지배의 딸이 비조부의 누이로 바뀌어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나 같은 사실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로써 6세기 전반 고대국가체제의 정비를 서두르는 한편 불교의 공인을 앞두고 있었던 신라와 혼인을 추진하던 대가야도 고대국가의 단계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이미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사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가 ‘남제서(南齊書)’ 가라국조의 기록이다. 건원(建元) 원년, 즉 479년 가라왕 하지(荷知 )가 남제에 사신을 보내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으로 책봉 받고 있었던 사실을 보아 대가야는 독립된 국가로서 중국 남조왕조의 하나인 남제의 승인을 받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신라가 남조왕조인 양(梁)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낸 때가 법흥왕 8년(521)이었으며, 그 사신도 백제의 사신을 따라 갔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대가야의 국제적인 교류는 신라보다 훨씬 앞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남제가 경전의 번역과 연구 등의 학문불교가 융성한 지역이었음을 고려하면 5세기 후반 이미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5세기 후반 무렵 대가야에 불교가 수용되었다는 사실은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고아리 소재의 벽화고분의 연화문에서도 확인된다. 이 벽화고분은 널길을 갖춘 굴식 돌방무덤으로 벽화의 흔적은 널방의 벽면에도 약간 남아 있으나 전혀 형체를 알 수 없고, 널방의 천장돌과 널길의 천장돌에 연화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널방 천장돌은 엷게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갈색·녹색·홍색·백색으로 연화문을 그렸고, 7매로 된 널길의 천장돌에도 회칠을 하고 지름 약 26cm, 8판·복판의 연화문이 그려진 11개의 돌로 짰다. 꽃과 꽃 사이의 공간에는 갈색·녹색·홍색의 3색으로 구름, 또는 유수(流水) 같은 곡선문을 그렸다. 이 고분은 굴형 널방의 구조, 벽의 아치형 축조기법, 바닥의 도량설치 등 여러 면에서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한 백제지방의 고분축조양식과 상통하고 있어 가야지방에 미친 백제문화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연화문의 벽화가 있는 점에서 공주·부여에서 논산평야-무주-금산을 거쳐 고령으로 통하는 백제-대가야 통로를 통한 불교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추측컨대 대가야와 남제와의 교류, 특히 불교 수용은 신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백제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대가야에서 연화문 벽화의 무덤은 발견된 것이 현재로서는 1기에 지나지 않고, 순장제의 왕릉급 무덤들이 여전히 조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아 불교적 신앙과 세계관의 수용은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한편 5세기 전반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백제와 신라는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 433년 나제동맹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493년 백제 동성왕의 요청으로 신라 소지왕은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낸 적도 있었다. 이러한 삼국 관계의 변화는 가야 지방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400년 광개토왕의 신라 경주에의 파병은 낙동강 하구의 본가야에도 큰 타격을 주어 그를 맹주로 하는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로 이어졌다. 5세기 중엽에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후기 가야연맹이 형성되었으며, 6세기 초에 대가야는 가야 북부의 대부분을 통합하여 초기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6세기 중반 우륵이 제작한 12현금(十二絃琴)의 곡명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전북의 남원·임실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불교를 통한 소국들을 통합할 수 있는 사상적 이념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551년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망명하게 되는데 그 이유로서 ‘삼국사기’ 진흥왕조와 악지에서는 각기 국가의 ‘쇠란(衰亂)’ 또는 ‘장란(將亂)’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아 대가야 전역을 통합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지배세력이 분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가야도 나제동맹에 가담하여 백제와 교류를 지속하는 한편 법흥왕 9년(522) 신라와도 결혼동맹을 체결한 바 있으며 그 다음해에는 남쪽지방을 순행한 진흥왕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진흥왕 14년(553)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으로 나제동맹이 결렬되면서 대가야도 신라의 진출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적대시하였다. 진흥왕 15년(554) 백제 성왕의 관산성(管山城, 沃川)의 공격에 가야도 참여하였으나 결과는 본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의 아들인 김무력(金武力)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성왕의 전사와 함께 참패하였다. 그리고 이어 진흥왕 23년(562) 신라는 대가야의 배반을 이유로 고령의 도성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때 도성의 성문 이름이 인도의 향나무 이름인 ‘전단(栴檀, candana, 與藥으로 번역)’이었다는 것을 보아 불교가 일상생활면에까지 침투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공교롭게도 가야성 함락을 주도한 인물이 사다함(斯多含)이었는데 사다함(sakṛdāgāmin, 一來로 번역)은 소승불교 성자의 계위인 성문(聲聞) 사과(四果)의 제2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라의 장군 사다함은 독실한 불교신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위치하는 가야연맹체는 한발 앞서 고대국가의 체제를 정비한 백제와 신라 두 나라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였던 본가야는 532년, 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였던 대가야는 562년에 차례로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그러나 본가야와 대가야 모두 5세기 중반 이후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뒷날 자신들의 건국신화를 재구성하면서 불교적으로 윤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끝으로 ‘가야’의 명칭 유래를 간단히 지적하면, 우선 지명과 국명으로서의 가야를 가리키는 차자(借字)의 용례로서 구야(狗邪 拘邪) 가락(伽落 駕洛) 가라(加羅 伽羅 迦羅 呵囉 柯羅 加良) 가야(加耶 伽耶 伽倻) 등 10여종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3세기 이전을 다룬 ‘삼국지’의 구야를 제외하면 시기적으로 음운의 변화과정이 가락⟶가라⟶가야의 순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야는 먼저 김해지역의 본가야 세력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며, 어느 때부터인가는 고령지역의 대가야 세력이 이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어원에 대해서는 가나(駕那)설 평야설 갓나라설 가람설 겨레설 성읍설 등의 학설이 있는데 언어학에서는 겨레설이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불교학에서는 수많은 불교경전들과 인도의 도시 이름에서 가야(伽耶)의 용례를 조사하여 그 기원을 불교에서 찾고 있다. 원래 범어 가야(gayā)는 코끼리(象), 또는 소(牛)의 일종으로 번역되며, 그리고 범어 가야시리사(gayāśīrsa, 伽耶尸利沙)를 줄여서 가야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번역하여 상두(象頭)라고 하였다. 그 결과 인도에서의 실제 산의 이름으로서 가야산(伽倻山)·우두산(牛頭山)·상두산(象頭山) 등은 모두 가야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경남 합천군의 가야산을 일명 우두산이라고 하였으며, 그밖에도 충남 해미현의 가야산, 경기도 여주목과 전북 금구현의 상두산, 경남 거창군의 우두산 등 여러 산들의 이름이 범어 가야에서 기원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가야의 역사에서 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였던 김해의 본가야(금관가야)와 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였던 고령의 대가야 등 2곳에서 불교에서 기원한 ‘가야(伽耶)’의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 시기는 불교가 수용된 5∼6세기 무렵으로 본다. 그리고 연맹체를 구성하였던 20여개의 소국들은 금관국(金官國)·반로국(半路國)·안라국(安羅國)·고차국(古嵯國)·비자목국(比自炑國) 등의 자기 이름으로 불렸을 것으로 본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33호 / 2018년 3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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