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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나무아미타불은 타력입니다

“염불은 하는 것이 아니라 염불되는 것입니다”

▲ 김홍도의 염불서승.

‘자력과 타력에 대한 오해’라는 제목의 편지를 읽으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 글이 ‘법보신문’에 실릴 때 편집국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은 자력과 타력의 합력입니다”라는 말을 클로즈업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완벽한 오해입니다. 그 편지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은 자력일까요? 타력일까요?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서 극락에 간다고 할 때 그것은 타력일까요? 자력일까요? 가장 안전한 타협책으로는 자력과 타력의 합력(合力)에 의해서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는 건
아미타불께 우리를 맡기고
백척간두서 한발 내딛는 것

무아왕생 탈락왕생 한다면
그 왕생은 나무아미타불을
수동적으로 염불할 때 성취

그러니까 자력과 타력의 합력에 의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은 저의 관점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 있습니다. 바로 이어서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렇게 해놓고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 문제는 그 물음에 대해서 저 역시 결론을 바로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은 타력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다시 한 번 더 자력과 타력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은 타력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개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불교는 성불을 하는 것도 스스로 노력해서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어찌 부처님에게만 의존해서, 부처님 보고 극락에 데려가 달라고만 하는가요? 그렇게 되면 “나무아미타불”은 기도가 아닌가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평가 자체가 자력문에서 타력문을 평가하는 관점으로서 정형화된 것이라 해도 좋겠지요. 그러면 타력문에서는 자력문을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 잘 듣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만큼 타력문을 믿는 분들이 적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력의 길을 걸어가는 분들도 한번쯤 스스로를 점검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어떨까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타력문에서는 자력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자력이 남아 있다면 타력이 온전히 깃들지 못한다고 해서 그렇게 합니다만, 도대체 자력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요? 자력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 안에 있는 부처를 찾는 것입니다. 그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수많은 선지식들이 자력의 길에서 부처가 되었습니다. 저 역시 그러한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불법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을 가는데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 ‘길’ 자체가 아니라 그 길을 가는 ‘사람’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 점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타력문의 입장에서 볼 때 자력(自力)은 자아(自我)입니다. 힘은 나입니다. 자력의 길을 갈 때 우리가 자칫하면 에고를 높이 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는 말 역시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위험성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자력문의 선사인 도겐(道元) 스님은 말씀하십니다. “불교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고,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도겐 스님은 탈락(脫落)이라고 하였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 탈락된다. 신심탈락.”, 이렇게 말합니다. 신심탈락은 도겐 스님에게는 견성이자 성불입니다. 신심탈락은 오온개공(五蘊皆空)이고 오온무아(五蘊無我)입니다.

무아이자 공인 것, 그것을 자력문에서도 추구합니다. 그런데 우리 타력문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을 버리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자아를 버리는 것입니다. 염불이 타력이라는 것은 염불이 곧 무력(無力)이자 무아라는 것을 말합니다. 염불은 무아염불입니다. 거기에는 내가 없습니다. 나의 것도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에 내가 없다면 어찌 그것을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염불은 수행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늘 이야기합니다. “염불 많이 하십시오.”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타력문의 염불은, 그것이 진정으로 타력문의 염불이라고 한다면 능동적으로 염불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수동적으로 염불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염불은 하는 것이 아니라 염불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의욕적으로 수행을 쌓아가려고 용맹 정진하는 노력이 아니라 내 속에 들어와 있는 아미타불이 나로 하여금 아미타불을 늘 생각하게 하여 그분의 이름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염불을 한다는 것은 능동의 염불입니다. 능동의 염불은 아직 우리 안에 아미타불이 안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아미타불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살게 된다면(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진여불성이 곧 아미타불이라는 법신불의 맥락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과는 다릅니다.) 우리 속에 계신 아미타불이 아미타불 스스로를 부르게 됩니다. 이러한 염불이 타력의 염불입니다.

염불이 무아염불이고 탈락염불이라면 당연히 왕생 역시 무아왕생이고 탈락왕생일 것입니다. 무아라는 것은 신심이 공히 다 탈락하는 것을 무아라고 합니다. 육체는 탈락되지만 정신이나 영혼은 남아서 극락 간다고 보는 것은 무아왕생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아직 ‘자아’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습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삶에 대한 집착을 낳습니다. 삶마저 집착하지 않는 것을 왕생이라 합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것은, 아미타불에게 우리를 던져버리고 맡기는 것은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벼랑 끝에서 붙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왕생이 무아왕생이고 탈락왕생이라고 한다면 그 왕생은 바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게 될 때 아니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수동적으로 염불하게 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왕생은 나중에 언젠가 우리가 죽게 될 때 임종 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바로 지금 염불이 될 때 바로 지금 여기서 왕생이 일어납니다. 안 죽어도 왕생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이대로 왕생입니다. 이를 평생업성(平生業成)이라고 합니다. 이때 평생은 평상시라는 말입니다. 평생에, 즉 평상시에 왕생의 업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바로 평상시가 도(道)라는 것이 아닐까요? 자력문에서 말하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요?

염불은 이런 식으로 산 정상을 향해서 올라갑니다. 왼쪽에서 올라갑니다. 물론 오른쪽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도 많습니다. 왜 너는 오른쪽이냐 너는 왜 왼쪽이냐 하면서 싸울 일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그 길에서 철저히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철저함은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스스로를 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 철저함에 의해서 정상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럴 뿐이지, 등산의 과정에서 합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왼쪽 갔다가 오른쪽 갔다가 할 수는 없습니다. 자력은 자력에 충실하고, 타력은 타력에 충실할 뿐입니다. 자력이든 타력이든 핵심은 자아를 버리는 것 아닐까요? 타력문에서 자아를 버리는 것은 나를 아미타불에게 맡긴 채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할 뿐입니다. 아미타불에 의해서 염불이 될 뿐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lokavid48@daum.net
 

[1433호 / 2018년 3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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