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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9대 총무원장 경산 스님-하

종정권한에 막혀 ‘책임 총무원장’ 끝내 이루지 못해

▲ 1974년 5대 종정에 추대된 서옹 스님(맨 앞줄 오른쪽) 과 당시 총무원장 경산 스님(맨 앞줄 왼쪽) 등 총무원 집행부와의 기념촬영. ‘사진으로 본 통합종단 40년사’


경산 스님은 1967년 조계종 종정 청담 스님과의 갈등으로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 모든 소임을 내려놓고 그길로 서울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 들어가 6년여간 두문불출했다. 당시 천축사 무문관은 수좌스님들이 사활을 걸고 용맹정진하던 수행처였다. 천축사는 1965년 12월 관응·정영·현구·석영(제선) 스님 등이 ‘6년 결사’를 시작하면서 무문관을 열었다. 서옹 스님이 초대 조실을 맡아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무문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많은 스님들이 세속과 절연한 채 오로지 화두 하나에 매달렸다.

 
1967년 총무원장 물러난 뒤
천축사 무문관서 6년간 수행
1973년 두 번째 총무원장 선출
인사 원칙 유시 등 의욕적 행보

동화사·불국사·동국대 문제 등
잇따라 불거진 문제로 종단 내홍
서옹종정과  갈등으로 중도 사퇴


경산 스님이 무문관에 들어간 것은 종단과의 의도적인 ‘거리두기’였을 수 있다. 이 무렵 종단의 최대 실력자는 여전히 청담 스님이었다. 비록 종정에서 물러났지만 청담 스님은 장로원장에 이어 6·7대 총무원장을 맡았다. 그렇기에 경산 스님이 종단 내에서 설자리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6년 무문관 수행은 경산 스님에게 새로운 전기가 됐다. ‘대한불교’(1973년 2월4일자)는 “(경산 스님의) 6년 면벽 고행은 그로 하여금 ‘뉴 경산’의 이미지를 종단 내외에 심는 계기가 됐다”며 “그래서 ‘새로운 경산’의 탄생이 이뤄졌고, 이와 더불어 한국불교의 새로운 ‘경산 시대’의 문이 열리게 됐다”고 평가했다.

경산 스님은 1972년 12월 제31회 중앙종회에서 종회의원에 보선되면서 종단정치에 복귀했다. 이 시기 종단은 큰 혼란기였다. 종단에서 영향력이 막강했던 청담 스님이 1971년 11월15일 제7대 총무원장에 재임하다 돌연 입적했다. 청담 스님의 입적은 종단 내 큰 변화를 예고했다. 경산 스님이 다시 총무원장 유력후보로 떠올랐다.

중앙종회는 1973년 1월25일 제32회 임시중앙종회에서 경산 스님을 제9대 총무원장으로 선출했다. 경산 스님은 취임과 동시에 ‘종무행정지침’을 발표하고 총무원장으로서 의욕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파벌과 문벌색에서 벗어나 총화를 이루고’ ‘승가를 정화해 수도하고 포교하는 종단’을 만들겠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1950~60년대 교단 정화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제 승단 정화에 역점을 두겠다는 의지표명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네팔 룸비니 복원 사업에 뛰어들어 한국불교 위상제고에 앞장섰으며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에도 적극 나섰다. 1973년 5월 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 전신인 ‘한국불교회’를 결성, 초대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이전 총무원장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광폭 행보였다.

그러나 경산 스님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주지인사권을 두고 불협화음도 터져 나왔다. 이무렵 정부는 사찰정화와 문화재보호를 이유로 사찰에서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하도록 했다. 문화재관람료 징수는 사찰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안정적인 수입원을 가진 사찰과 그렇지 못한 사찰로 나뉘었다. 주지인사에 관심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몇몇 사찰에서 주지자리를 두고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경산 스님은 1973년 6월19일 ‘인사행정’과 관련해 총무원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특별유시를 발표했다. 경산 스님은 유시를 통해 “사찰운영을 잘한 주지에 대해서는 임기 연임보장과 행정지원”을 약속했다. 반면 “종단 위신을 실추시킬 때는 징계하거나 즉각 해임하겠다”고 공표했다. 당시 본말사 주지 인사권이 종정에게 있었음에도 총무원장이 이 같은 유시를 발표한 것은 그만큼 경산 스님의 영향력이 지대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그해 10월 경산 스님의 상좌가 주지로 있었던 동화사에서 사찰부채 문제와 주지인사 과정에서 금품수수설이 제기되면서 경산 총무원장 체제는 크게 흔들렸다. 급기야 주지인사에 불만을 품은 동화사 스님 10여명이 흉기를 들고 서울 총무원 종정실에 들어가 폭력을 행사하면서 큰 논란이 일었다. 비록 인명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종단은 큰 상처를 입었다. 종단 안팎의 비판이 경산 스님에게 쏠렸다. 총무원장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종회의원들도 점차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경산 스님의 총무원장 지속여부는 11월 정기중앙종회에서 판가름 날 것으로 예상됐다.

이런 가운데 종정 고암 스님은 1973년 12월5일 특별담화(유시)를 통해 “종회 기능을 잠정 유보한다”고 밝혔다. ‘1974년 예산도 1973년을 답습한다’고 결정했다. 고암 스님의 담화는 경산 스님 등 집행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종단 내분을 중지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오히려 들끓는 비판여론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종회유보 조치는 종단의 불미스런 일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확산됐다.

‘경향신문’(1974년 1월8일자)에 따르면 직지사 주지 녹원 스님 등은 ‘종권수호회’를 구성하고, 1월3일 대구 관음사에서 해인·범어·통도·신흥·송광·화엄·마곡사 주지와 종회의원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회의를 열어 ‘종회기능회복 때까지 총무원지시 거부’ ‘1월17일 전국승려대회를 개최’ 등을 결의했다. ‘종회기능 유보 조치’에 대한 반발은 예상보다 거셌다. 결국 종정 고암 스님은 1월17일 다시 교시를 내려 “2월1일 중앙종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극심한 내분 위기로까지 내몰렸던 ‘종회기능 유보조치 논란’은 일단 잦아들었다. 그러나 2월1일 열린 제34회 임시중앙종회는 당시 조계종이 안고 있는 모순들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동아일보(1974년 2월8일자)’에 따르면 이날 종회는 욕설과 폭력으로 치달았다. 종회기능 유보조치에 대한 책임공방으로 시작된 집행부와 종권수호회측 갈등은 총무원이 선학원에 제공한 2000만원 및 청도 운문사 벌채허가 문제에 대한 책임공방으로 이어졌다. 분위기가 격앙되면서 의원들 사이에서 험한 소리가 오갔고, 의원명패까지 날아다녔다. 결국 34회 중앙종회는 예정된 안건을 처리하지 못하고 폐회됐다. 34회 중앙종회의 후유증은 컸다. 조계종에 대한 세간의 날선 비판이 이어졌다. 경산 스님은 2월28일 전국교구본사주지회의를 소집해 ‘종단 총화와 단결’ 등을 결의하며 수습에 나섰지만 종권수호회 측의 마음을 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974년 5월 불국사 주지 문제가 불거졌다. 조계종 총무원은 ‘종단의 부족한 예산 충당’을 이유로 불국사 직영전환 방침을 정하고 5월24일 신임주지로 감찰부장 진경 스님을 임명했다. 그러자 불국사 주지 범행 스님은 강하게 반발하고, 인수인계를 거부한 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분쟁이 심화됐다. 때를 같이해 동국학원 이사회가 이사장 선임문제로 갈등을 빚은 데 이어 이사들간의 소송전이 진행됐다. 그러자 정부는 1974년 6월11일 동국대에 관선이사 파견을 결정했다.

불국사 주지와 동국대 관선이사 문제로 종단은 극심한 혼란이 이어졌다. 그럴수록 총무원 집행부를 향한 비판여론이 커졌다. 신도단체 대표들까지 나서 종정과 총무원장스님의 사퇴를 요구했다. 불국사 주지 문제는 종단 재정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이었고, 동국대 관선이사 문제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었음에도 비판의 화살은 총무원장에게 쏟아졌다.

‘대한불교’(1974년 7월7일자)에 따르면 경산 스님은 종단 안팎에서 사퇴압력이 커지자 7월3일 담화를 발표하고 동국대 관선이사와 불국사 주지 문제 등 승단분규 사태와 관련해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스님은 “관련 문제는 마무리 단계에 있다”면서 “4년간 (총무원장에게) 종단 운영을 위임했다면 일할 수 있게 뒷받침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종단 혼란이 불거질 때마다 임기와 관계없이 물러나야 했던 자신을 비롯한 전임 총무원장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표명이었다.

그러나 총무원장 사퇴 요구는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종권수호회를 중심으로 한 재야측은 승려대회를 열어 집행부 사퇴를 이끌어내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종단 안팎의 비판이 확산되자 종정 고암 스님은 1974년 7월16일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표자회의에서 “최근 종단 내 불미스런 사태가 본인의 부덕한 소치임을 통감하고 사퇴한다”고 밝혔다. 또 집행부의 총사퇴도 권고했다. 그러나 경산 스님은 종정스님의 집행부 총사퇴 권고를 거부했다.

이 문제는 7월18일 제35회 임시중앙종회에서 다시 논란이 됐다. ‘조계종 중앙종회 3대 회의록’에 따르면 경산 스님은 총무원장 사퇴 요구가 커지자 “일단 (총무원장에) 들어왔으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소신껏 노력할 뿐”이라며 “법에 없는 승려대회를 붙여도 응할 수 없다”고 맞섰다. 또 “만약 이런 풍토에서 압력에 의해 물러난다면 부처님을 배반하는 게 된다”며 주어진 임기를 채우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집행부 퇴진을 요구했던 녹원 스님 등이 반발했지만 총무원장 불신임까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결국 중앙종회는 고암 스님의 사표를 수리하고, 5대 종정에 서옹 스님을 추대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서옹 종정체계가 출범하면서 조계종은 일시 안정을 찾았다. 원로스님들과 관계당국의 협의로 동국대 관선이사 체제가 중단됐다. 총무원도 청사로 사용하던 동국대 혜화관을 나와 신축된 조계사 불교회관으로 이주했다. 1975년 5월 부처님오신날이 처음으로 국가공휴일로 제정돼 성대한 봉축봉요식도 진행됐다.

그러나 취임 초기부터 ‘행정기구 변화 등 종단 체질개선’을 예고했던 종정 서옹 스님이 강력한 ‘종정중심제’를 추진하면서 총무원장 경산 스님과의 갈등이 재현됐다. 종정과 총무원장의 대립은 제주 관음사 주지인사로부터 촉발됐다. ‘경향신문’(1975년 9월3일자)에 따르면 서옹 스님은 총무원 집행부가 관음사 주지를 임명하면서 자신의 지시와 다른 스님을 임명하자, 이를 불허하며 ‘종정 직인 무효’를 선언했다. 뒤이어 8월26일 ‘행정지침1호’(종령)을 발표하고, ‘종단 재산관리’ ‘본사주지 임면’ ‘총무원·감사원 국장 이상 임면’ ‘임기만료 전 말사주지 임면’ 등에 직접 관여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또 ‘(관음사 주지인사 파동과 관련해) 총무원 국장 이하 간부 전원의 일괄사표’를 요구했다. 서옹 스님의 행정지침은 종헌에 따른 종정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종정은 종단의 법을 상징하는 어른으로 머무르고, 종무 행정은 총무원장이 책임져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던 경산 총무원장으로서는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였다. 경산 스님은 종정 서옹 스님의 총무원 간부 총사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계종은 다시 심각한 내홍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 시기 관음사와 대성암에서 토지불법매각 사건이 불거지고, 당시 재무부장 등이 구속되면서 경산 스님의 입지는 좁아졌다. 여기에 자신마저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경산 스님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 결국 경산 스님은 9월26일 총무원 부장들과 함께 사직서를 제출했다. 경산 스님은 두 번째 총무원장도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이후 경산 스님은 1979년 12월 세 번째 총무원장에 선출돼 당시 조계사와 개운사로 양분된 종단을 통합시키겠다는 원력을 세웠지만 12월25일 뇌출혈로 입적하면서 무산됐다.

경산 스님은 전통불교 회복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의 기틀을 다지는 등 근현대불교사에서 혁혁한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두 번의 공식적인 총무원장 모두 ‘종정·총무원장 중심제’ 논란 속에서 그만둬야 했던 비운의 총무원장이기도 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34호 / 2018년 4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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