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 2018.4.20 금 22:20
> 연재 | 남수연 성지탐사 전문기자의 꺼지지 않는 법등 스리랑카
5. 타밀족 물리친 대왕 둣타가마니“왕은 한 명의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그는 과연 위안을 얻었을까
남수연 기자  |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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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02  15: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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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세기 둣타가마니왕에 의해 조성된 루완웰리사야다고바는 조성 당시 높이가 103m에 달하는, 세계에 가장 큰 탑이었다. 지금 탑의 높이는 55m다.

둣타가마니의 창이 엘랄라의 가슴에 꽂혔다. 검은 코끼리에 올라타고 있던 엘랄라는 땅으로 고꾸라져 둣타가마니를 태운 흰 코끼리의 발아래 나뒹굴었다. 싱할라왕국의 승리였다. 44년 타밀족의 지배를 끝내는 순간이었다. 타밀 왕 엘랄라를 물리치고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탈환한 둣타가마니를 후대인들은 ‘대왕(Great King)’이라 불렀다. 스리랑카 싱할라왕조사에 단 두 명뿐인 대왕, 그 가운데 한명 둣타가마니대왕(BC 161~137)이다.

“정법을 지키기 위한 전쟁”
창에 사리 넣고 참전 선언
싱할라민족 단결 이끌지만
“귀의 않은 적 짐승”이라며
스님들 황당한 궤변 내세워

대탑 루완웰리사야 조성해
타밀 지배 종식 기념했지만
살생죄업 참회 계속되는 듯

왕의 어머니 마하데비는
남북 왕조 통일 역사 이끈
숨은 주역으로 평가 받아야


아누라다푸라에는 그의 염원이 담긴 대탑이 남아있다. 성스러운 보리수 스리마하보디에서 북쪽으로 500m 남짓 떨어져 우뚝 솟아있는 높이 55m의 대탑 루완웰리사야다고바이다. 눈부실 만큼 희고 매끈한 복발형의 탑신, 그 위로는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크리스탈과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산개가 탑의 정상에서 빛나고 있다. 탑의 기단부는 또 어떤가. 수많은 코끼리 조각상이 사방에 조성돼 탑을 외호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 둣타가마니왕이 이 탑을 조성할 당시의 높이는 103m, 직경은 무려 290m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큰 탑이었다고 한다. 타밀족과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탑, 하지만 그 화려함의 속뜻은 승리의 영광만은 아니었다.

“나는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 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둣타가마니는 두려움에 떨었다. 비록 전쟁이었지만, 비록 적군이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이 그의 손에서 피를 흘렸다. 살생의 죄업이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왕 앞에 여덟 명의 스님들이 나섰다.

“왕이시여, 두려워 마소서. 부처님께 귀의하고 오계를 수지해야만 진정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하지 않은 적들은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왕은 이 전쟁에서 단 한명의 사람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 무슨 궤변인가.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둣타가마니에게 스님들의 이 같은 선언은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그 동아줄을 부여잡고 둣타가마니는 루완웰리사야다고바 조성에 박차를 가했다.

   
▲ 싱할라왕조의 대왕으로 칭송되는 둣타가마니.

둣타가마니를 위로한 여덟 명의 스님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그들이 누구였으며 어떤 근거에 의해, 그리고 후일 어떤 활동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의 논리가 스리랑카불교계와 왕실의 ‘특별한’ 관계 형성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데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스리랑카불교계가 이후 보여주는 왕실과의 밀착 관계, 과도한 호국불교 색채는 때때로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그 책임을 이 여덟 명의 스님에게만 지우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불교를 전쟁에 끌어들인 것은 둣타가마니가 먼저였다.

둣타가마니는 싱할라왕조의 방계 왕족이었다. 수도를 빼앗기고 남부로 몸을 피한 왕실이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던 시절이니 왕족이라지만 그 위세나 명성 변변할리 없었다. 그런 그가 수도 탈환을 위해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타밀족과의 전투에 참전하겠다 뜻을 밝히자 아버지 카반팃사가 반대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둣타가마니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게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필승의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전한 둣타가마니는 자신의 창끝에 부처님의 사리를 넣었다.

“나는 왕조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정법을 지키기 위해 이 전쟁에 임할 것이다.”

부처님사리를 앞세우고 이교도 타밀족으로부터 정법수호를 선언한 이 젊은이의 패기가 싱할라족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의 창끝 속 부처님사리는 그 신심, 싱할라족 단결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 창은 싱할라족의 열망대로 엘랄라의 가슴을 꿰뚫었다. 둣타가마니는 그렇게 왕조의, 민족의, 스리랑카의 영웅이 되었다. ‘부처님사리’는 그의 예상대로 절묘한 한 수였다.

   
▲ 둣타가마니의 어머니 위하라마하데비.

스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기회였다. 싱할라족 자긍심과 왕실 부흥, 국가 재건을 불러온 대반전의 중심에 둣타가마니가와 부처님사리가 있었다. 그러니 이제 막 다시 타오르는 불꽃에 승단이 찬물을 부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타밀족 힌두교도의 침략으로 피폐해졌던 불교가 민족과 국가의 구심점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살생의 죄업’에서 허우적거리는 둣타가마니를 건져낼 ‘궤변의 묘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대탑 루완웰리사야다고바에는 둣타가마니의 두려움과 승단의 참회가 서려있을지도 모른다. 둣타가마니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대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둣타가마니의 임종 직전까지도 불사가 마무리되지 않자 왕자 사다팃사는 대나무를 이용해 조성 중인 탑 외벽에 골격을 만들고 흰 천을 감아 마치 탑이 완성된 것처럼 위장했다. 멀리 떨어진 왕궁에서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대탑을 바라보며 둣타가마니는 숨을 거뒀다. 마지막 숨결과 함께 그의 두려움도 끝이 났을까.

루완웰리사야다고바 입구에는 둣타가마니 조각상이 있다. 탑을 향해 합장하고 서 있는 둣타가마니의 모습은 건장한 체구에 보석으로 치장돼 있는 당당한 왕의 모습이다. 하지만 굳게 합장한 그의 손끝에서 들려오는 참회의 진언을 눈치 챈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여기서 하나 덧붙이자. 둣타가마니는 역사서에 ‘도투게무누’라는 이름으로 기록돼 있다. 둣타가마니는 ‘말 안 듣는 아이’라는 뜻이다. 역사서에 기록하기에는 민망한 이름이다. 참전을 반대하던 아버지 카반팃사에게 둣타가마니는 항의의 뜻으로 여자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보냈다. 그 속에는 ‘나를 여자로 만들 생각인가요’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좀처럼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아이, 둣타가마니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 루완웰리사야다고바 기단부에는 사방으로 코끼리상이 조각돼 있다.

둣타가마니 조각상 오른편에는 그의 어머니 위하라마하데비의 조각상이 조성돼 있다. 그녀는 콜롬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켈라니야 지방 출신으로 싱할라왕조의 일원이던 칼라니팃사의 딸이다. 칼라니팃사는 자신의 부인이 출가한 자신의 동생, 즉 시동생과 불륜에 빠진 것을 목격하고는 광분한 나머지 동생을 끓는 기름에 넣어 죽여 버렸다. 하지만 곧이어 출가자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칼라니팃사는 참회의 의미로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딸 위하라마하데비를 배에 실어 제물로 바쳤다. 위하라마하데비를 태운 채 바다를 떠돌던 배는 남스리랑카 키린다해변에 도착했고 우여곡절 끝에 왕족이었던 카반팃사와 결혼한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바로 둣타가마니였다. 스리랑카인들은 칼라니팃사의 왕비가 스님과 정분을 나눈 것 또한 둣타가마니라는 위대한 인물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한 기연의 시작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요새 유행하는 표현으로 영웅 탄생을 위한 ‘큰 그림’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담긴 역사적 의미는 좀 더 신중하다. 위하라마하데비와 결혼한 카반팃사는 남스리랑카를 지배하고 있던 루후나왕조의 지도자였다. 루후나왕조는 북부 싱할라왕조의 후손으로 스리랑카 남부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본가인 싱할라왕조와의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싱할라왕조 출신의 공주가 루후나왕조의 왕과 결혼했다는 것은 두 왕조 사이에서 극적인 협력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타밀족의 침략으로 허약해진 싱할라왕조가 루후나에 먼저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두 왕조의 단합을 상징하는 둣타가마니가 타밀족을 물리쳤고 마침내 왕좌에 올랐다. 둣타가마니의 승리와 등극은 단순한 외침의 극복 뿐 아니라 민족의 통합, 둘로 갈라져있던 나라의 통일을 의미한다.

이 대타협을 이끌어낸 주역 위하라마하데비는 지금까지도 스리랑카 역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으로 손꼽힌다. 둣타가마니의 어머니라는 ‘공식직함’ 이면의 그녀는 탁월한 외교가이자 로비스트였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의 상상이야 말로 역사를 읽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아누라다푸라=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34호 / 2018년 4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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