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귀국과 우국안민
7. 귀국과 우국안민
  • 해주 스님
  • 승인 2018.04.0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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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침공 알리려 귀국…왕의 노복 하사 거부하고 평등공동체 지향

▲ 화엄연기. 의상스님의 걸식과 선묘 만남.

▲ 선묘 호법용의 외호.

의상 스님이 ‘일승법계도’를 저술한 지 약 석 달 후인 총장 원년(668) 10월29일에 스승인 지엄 스님이 67세를 일기로 입적하게 된다. 지상존자 지엄 스님은 운화사(雲華寺)에서도 주석한 관계로 운화존자라고도 불리는데, 만년에 입적한 곳은 청정사(淸淨寺)이다.(‘華嚴經傳記’)

급보 전하려 서둘러 귀국
당 침입 물리쳐 국난극복

해로로 귀국 때 선묘 낭자
용으로 현신해 스님 외호

선묘용 다시 부석이 돼서
영주 부석사 창건을 도와

일본서 선묘용 신으로 간주
화엄도량 고산사서 받들어

중국 용문석굴 ‘신라상감’ 굴
의상 스님 조성 가능성 높아

전란에 신음하는 백성 위해
관음신앙으로 의지처 제공

청정사는 ‘총수록’의 ‘고기’에서 전하고 있는 청선사(淸禪寺)와 동일한 장소인 것으로 간주된다. 지엄 스님이 입적하기 불과 18일 전인 총장 원년(668) 10월11일에 청선사 반야원(般若院)에서 의상 화상에게 ‘보법의 궤칙이 중도의 실상’임을 문답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이를 십중의 총상과 별상으로 설명하였다.

지엄 스님의 입적에 앞서 제자 가운데 혜효(慧曉)라는 스님이 청선사의 반야대가 무너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혜효 스님이 바로 의상 스님으로서 혜효는 의상 스님의 구명(舊名)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스승의 입적을 예감케 하는 꿈을 꿀 수 있는 출가제자는 의상 스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당시 법장 스님은 아직 출가하기 전이었고 그로부터 3년 뒤에 출가하였다.

의상 스님은 지상사에서 3년을 더 머무른 뒤 신라로 귀국하게 된다.(‘의상전교’조에는 670년, ‘전후소장사리’조에는 671년에 귀국) 당나라의 신라 침공 계획을 알리기 위해서 귀국을 앞당긴 것으로 생각된다. 나당연합군으로 신라의 삼국 통일을 도운 당나라가 신라까지 치려는 계획을 알아차린 김인문(문무왕의 동생) 혹은 김흠순(김유신의 동생)으로부터 그 급보를 신라에 전해달라는 부탁이 있었던 것이다.

▲ 용문석굴 제484호 신라상감.

낙양에 있는 용문석굴에는 ‘신라상감(新羅像龕)’이라는 제484호 굴이 있다. 굴의 크기는 높이 1.9m, 너비1.7m, 깊이 1.7m로서 자그마하나, 굴 내에 아마도 1불 2제자 2보살 2역사(力士)의 7존이 벽에 모셔져 있었던 자취가 있다. 언제 누가 파손시키고 떼어갔는지 알 수는 없다.

현재 잘 보이지는 않으나 굴 문 위쪽에 ‘신라상감’이라는 해서체의 명문이 새겨져 있고, 석굴의 형식과 용문석굴의 시대적 분포상황을 통해서 볼 때 660년에서 670년 사이에 조성된 신라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신라상감은 그 시기 당나라에 유학중이던 신라인 중에 누군가가 조성한 것으로 보는데 그 조성자가 의상 스님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의상 스님이 법장 스님과 함께 용문석굴을 참배하고 그곳에 평화의 발원을 담아 굴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법장 스님 역시 몇 개의 석굴을 조성하였다.

의상 스님이 귀국하고 20여년 후에 인편으로 법장 스님에게 소량의 금을 보낸 일이 있는데, 혹시 신라상감 조성에 도움을 받았던 것에 보답하는 감사의 표시가 아닌가 싶다.

스님은 귀국 시에도 해로를 이용하게 된다. 배를 타기 전에 다시 등주 문등현에 있는 단월의 집에 잠깐 들러 고마움의 인사를 표했다. 의상 스님이 신라로 귀국하고자 선창에서 배를 탄다는 소식을 들은 유지인의 딸 선묘낭자가 스님에게 올릴 법복과 법구를 상자에 담아 선창으로 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고 있었다. 그러자 선묘는 법사에게 공양하려는 원으로 옷상자를 바다로 던져 무사히 배에 닿을 것을 빌고는, 큰 용으로 현신하여 배가 거센 풍랑 속에서 무사히 바다를 건너게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송고승전’에 전한다.

선묘낭자가 처음 의상 스님을 만난 것은 스님이 당에 도착하여 등주에서 걸식하였을 때이다. 선묘낭자는 의상 스님을 보자마자 연모의 정을 가졌으나 스님의 마음이 돌같이 굳어 변하지 않음을 보고 도심을 일으켜 단월이 되기로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법복을 만들고 공양 올릴 날을 기다렸다가 스님의 귀국 시 호법용이 되어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묘 호법용은 다시 부석이 되어 부석사가 의상 스님의 화엄본찰이 됨을 도왔다고 한다.(‘의상전교’에서는 왕명에 따라 676년에 부석사가 건립되었다는 창건설을 전한다.)

‘송고승전’의 이 ‘당신라국의상전’ 내용을 골조로 한 ‘화엄연기(華嚴緣起)’의 의상 그림에서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부분은 바로 선묘용이 의상이 탄 배를 외호하는 그림이다. 고산사의 묘에(明惠) 스님은 조큐(承久) 3년 (1220년)에 꿈에서 본 중국여인을 선묘라고 판단하고 선묘를 신라의 신으로 간주하여 선묘신상을 안치하고 화엄도량인 고산사의 수호신으로 받들었다.

또 조큐의 난을 기점으로 해서 전쟁으로 인해 많은 여인들이 비구니가 되자, 묘에는 그들을 위해 선묘사를 짓고(1223년) 선묘신상을 절의 수호신으로 안치했다. 현재 영주 부석사 선묘각에 선묘 그림이 모셔져 있고, 서산 부석사에는 선묘의 상도 함께 조성되어 있다.

▲ 신라상감 명문 c.배재호.

의상 스님은 무사히 신라에 도달하여 조정에 당 고종의 신라 침공을 알려, 국난을 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당나라 침입을 물리쳐 국난을 이겨가는 과정에 신중도량 사천왕사가 건립된다. 사천왕사의 호법신장으로 유명했던 녹유신장상이 그동안 부서져 흩어져 있었던 조각들이 발견되어 이제 제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의상 스님의 우국충정은 전쟁 때문에 연이은 축성으로 힘든 백성과 국가를 위해, 문무왕의 경성 축성을 중지시킨 예(문무왕 21년, 680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또 서울에 성곽을 쌓으려 하여 이미 관리에게 명령하였다. 그때 의상법사가 듣고 글을 보내어 아뢰되, “왕의 정교가 밝으면 비록 풀만 난 언덕 땅[草丘]에 금을 그어서 성(城)이라 하여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가히 씻어 복이 될 것이나,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큰 성[長城]이 있더라도 재해를 소멸치 못할 것입니다”하니 이에 왕이 그 역사를 파하였다. (‘삼국유사’의 ‘문호왕법민’조)

여기서 의상 스님이 만민을 생각하고, 왕의 정교도 백성을 우선으로 펼쳐지길 바라는 스님의 깊은 원을 느낄 수 있다. 또 문무왕이 의상 스님에게 논밭과 노복을 보내려는 일과 관련한 다음 일화 역시 스님의 평등하고 청정한 수행가풍과 아울러 안민의 정을 바로 보이고 있다.

국왕이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전장(田莊)과 노복을 베풀어주었으나, 의상 스님이 왕에게 말씀하기를, “우리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모두 고르고, 귀하고 천함이 한가지로 같습니다. ‘열반경’에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八不淨物]이 있으니 어찌 논밭을 가지며 어찌 노복을 두겠습니까? 빈도는 법계로 집을 삼고 발우로 밭갈이를 하여 익기를 기다립니다. 법신의 혜명은 이것을 빌려 생겨납니다.”라고 하였다. (‘송고승전’)

평등하고 청정한 행에 위배된다고 왕이 하사하는 개인 소유의 논밭과 노복을 받지 않은 점은 의상 스님의 수행가풍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것이라고 하겠다. 스님은 발우로 걸식하며 청정 범행을 닦는 수행정신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화엄법계에서 오로지 법신의 혜명을 이어가는 길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늘 뜻을 깨끗이 하고 더러움을 씻는 법을 행하며, 삼의일발(三衣一鉢)과 물병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주처도 일정한 장소에 매이지 않고 구름처럼 떠다니며 마음에 들 만한 곳이면 지팡이를 꽂고 머물렀는데 배우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고 전한다.

골품제의 계급사회였던 신라에서 노복의 신분으로 겪는 고통을 공감하고 불법의 평등정신을 구현해내는 스님의 삶에서, 신라불교가 비교적 평등공동체의 모습을 띠고 있음을 읽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의상 스님은 관음신앙을 펴서 신라통일 전후 전란으로 피폐해진 대중들에게 의지처를 마련해주었다. 스님이 처음 귀국하여 대비 관음보살(관세음보살, 관자재보살)의 진신이 낙산의 바닷가 굴 안에 머물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진신을 친견하고자 재계하고 기도하였다. 천룡팔부의 도움으로 관음보살 진신을 만나 뵙고 불전을 지으라는 말씀에 따라 금당(현 홍련암)을 지었다. 그리고 친견한 관음보살의 모습대로 상을 빚어 모셨다.(‘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 조)

그리고 스님은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어서 관세음보살이 항상 아미타불을 모시듯이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소백화가 만발한 관세음보살 도량에 왕생할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관음보살은 ‘화엄경’의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의 선지식으로서, 주처인 보타낙가산에는 자그마한 하얀 꽃이 만발하고 산 서편에 샘물이 솟아 큰 강을 이룬다고 되어 있다. 보타낙가는 보달락가(potalaka, 補怛洛迦)로 음사되기도 하고 광명산으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남인도 타밀주에 선재동자가 관세음보살을 만났다고 추정되는 보타낙가산이 있는데, 지금은 아얏빠 신을 모시는 힌두성지로 알려져 일년 중 참배가 허락된 두 달 동안은 순례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남방 바다 가운데 있는 보타산(普陀山) 관음성지의 건립은 ‘화엄경’의 보타낙가산을 이어 의상 스님이 펼친 낙산 관음신앙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34호 / 2018년 4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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