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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서산대사의 국가와 불법

기자명 김정빈

▲ 그림=근호

불교가 위축되어 있던 조선 중종 시절, 평안도 안주에 최세창이라는 처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마흔일곱 살로 남편 최세창과 나이가 같은 한남 김씨는 ‘서산’이라고도 불리는 묘향산 쪽으로부터 학 한 마리가 흰구름 사이로 날아와 자신의 품에 안기는 신이한 꿈을 꾸었다.

승과 합격 조선 대표승려로
3년만에 선교양종판사 올라
2년 뒤엔 직책 벗고 산으로

수행자 명성 높았던 73세에
1952년 ‘임진왜란’ 일어나자
전국 승려들에 궐기 호소해
평양성 탈환 뒤 묘향산으로

승려는 국민이면서 ‘수행자’
국가 경계선 갇히지 말아야
승군 반드시 긍정할 수 없어
그럼에도 흑백 구분도 불가

꿈을 꾼 뒤 그녀는 아기를 가졌고 때가 차서 출산하니 그가 훗날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다. 최세창은 아기가 멋진 장래를 열어갈 것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아기 이름을 여신(汝信)이라 지었다. 여신이 세 살 되던 때의 초파일을 앞두고 이번에는 아버지 최세창이 기이한 꿈을 꾸었다. 한 노인이 나타나 그에게 “아기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기 스님의 이름을 운학(雲鶴)이라 하십시오”라고 말해주었던 것이다.

운학은 나이 아홉에 어머니를, 다음 해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앞길이 막막해진 그를 안주 군수 이사증이 불러들였는데 그것은 운학이 비상하게 영특하다는 것이 그에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소문을 확인한 이사증은 운학을 양자로 삼아 서울로 데려 갔다.

고관대작의 자제 자격으로 운학은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하지만 유교는 그의 길이 아니었다. 15세 때 응시한 과거시험에 낙방한 운학은 지리산 화개동과 청학동을 노닐다가 숭인 스님을 알게 되고 20세가 되던 해에 부용영관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게 된다. 그는 그때의 심정을 시로 읊었다.

꽃 피어야 할 화개동에 오히려 꽃 지고(花開洞裏花猶落)
청학 머물 둥우리에 학은 돌아오지 않네(靑鶴巢邊鶴不還)
홍류교 아래로 흐르는 멋진 물줄기야( 珍重紅流橋下水)
너는 바다로 가렴, 나는 산으로 갈 테니(汝歸滄海我歸山)

화엄경 ‘입법계품’에는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찾아 여러 성을 순례하는 내용이 나온다. 선재동자의 성은 휴정에게는 면벽참선이었다. 정진에 정진이 이어졌다. 어느 날 마음을 덮고 있던 먹구름이 환히 걷히는 순간이 왔다. 군계(群鷄)의 무리에서 벗어난 일학(一鶴)이 되어 드넓은 창공을 자유로이 날게 된 그 때의 심정을 휴정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문득 창밖에 우는 두견새 소리 듣노니(忽聞杜宇啼窓外)
눈에 가득한 봄빛, 모두가 다 고향일세(滿眼春山盡故鄕)
물 길어 돌아오다 문득 머리 돌리니(汲水歸來忽回首)
흰구름 저 속에 셀 수 없는 청산들(靑山無數白雲中)

휴정의 깨침의 여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몇 해 뒤에 그는 결정적인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 전라도 남원의 한 마을을 지나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속의 모든 의혹이 말끔히 걷힌 것이다.

머리털 희어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髮白非心白)
옛 사람이 일찍이 비밀의 말 흘렸네(古人曾漏洩)
오늘 닭울음 허공 치는 소리 듣노니(今聽一聲鷄)
대장부 할 일을 여기서 모두 마치네(丈夫能事畢)

이후 휴정은 조선을 대표하는 승려로 우뚝 선다. 33세 되던 해에 부활된 승과에 합격하여 대선이 되었고, 3년 만에 선교양종판사가 되었다. 하지만 직위는 그의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2년 뒤 그는 모든 직책을 사양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서산대사 휴정은 주로 묘향산에 머물며 제자들을 지도했는데 그 수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나이 73세, 불교인으로서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러 있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금에 의해 팔도도총섭에 임명된 휴정은 전국 승려들에게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보냈다.

그의 격문에 응하여 법흥사에 1500여명의 승군이 집결했다. 그의 제자 사명당 유정도 1000여명의 승군을 이끌고 그에게 합세했고 승군 대장으로서 실전에 참여하여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2년 후 휴정은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군사와 관련된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85세 되던 1604년 정월, 휴정은 묘향산 원적암에서 자신의 초상화 뒤에 임종게를 쓴 다음 조용히 입적했다.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八十年前渠是我), 80년 후에는 내가 그로구나(八十年後我是渠)’

불살생은 불교 신자의 첫 번째 계율이다. 이 계율에 준거하여 북방불교 스님들은 육식을 하지 않고, 남방불교 스님들은 방안에 들어온 모기를 죽이지 않고 내몰기 위해 열심히 부채질을 한다.

20세기 인도 지도자 간디는 불살생을 ‘아힘사(ahimsā)’라 부르고 ‘비폭력’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인도를 강점하고 있던 영국을 물리쳐야만 하는 정치적인 배경 하에서 간디는 투쟁을 하기는 하되 피를 흘리지는 않는 ‘비폭력 저항’을 생각해낸 것이다.

서산대사에게도 간디와 유사한 과제가 주어졌다. 다른 것은 간디가 상대한 것은 영국이었지만 서산대사가 상대한 것은 일본군이었다는 점이었다. 간디가 군국주의 일본 군대를 상대로 비폭력 저항을 했더라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너무나 순진한 사람일 것이다.

불교 승려는 한 국가의 국민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경계선에 갇히지 않는 보편적 진리의 추구자이다. 국민으로서의 부분은 승려를 경쟁 내지 투쟁의 길로 내몰고, 보편자적 진리 추구자로서의 승려는 그 길에 들어서는 것을 망설인다.

서산, 사명, 처영, 영규 등은 불교 승려로서 전투를 치름으로써 전자의 길에 적극적으로 들어선 인물들이다. 이 분들이 국가에 끼친 공적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이 인도 국경선을 넘어 모든 인류에게 호소되는 진리를 선포하신 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임진왜란 당시 승군의 활동을 반드시 긍정할 수만은 없는 면이 있다.

80년 전의 그와 나, 80년 후의 나와 그. 서산대사와 함께 사람에게는 나와 함께 그가 있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황을 한 마디로 딱 잘라 나와 그, 나와 너,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 면이 우리 불제자에게는 국가와 불교, 세속과 진리로서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 둘 중 우리는 때로는 전자를, 때로는 후자를 택하며 간단치 않은 삶의 바다를 건넌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34호 / 2018년 4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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