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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예산 화전리사지

기자명 임석규

불두 없이도 보물로 지정된 백제 불상의 백미 석조사면불상

▲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사찰에서 불상을 참배하거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불상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불상 앞에 서서 우선 눈길을 주는 곳은 어디일까? 아마도 부처님의 얼굴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 옆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아, 이 부처님 너무 인자해 보인다.” 또는 “이 부처님 좀 봐. 상호가 정말 좋아.”라는 혼잣말이나 대화이기 때문이다. 모두 얼굴에 대한 말들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마음에 새겨지는 첫 느낌, 즉 첫 인상이라는 것도 사실은 얼굴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고 생각된다.

1983년 형체 없는 바위 발견
조사결과 3m 넘는 백제불상

불두·불수는 모두 파손 유실
온전한 불상 존재하지 않아

불꽃무늬의 화려한 광배 등
백제의 조형미 충분히 느껴

태안이나 서산 마애불 앞선
가장 이른 시기의 석조불상

백제 석조불상 기념비 작품
불상의 흐름 이해 중요자료

2017년 파손된 불두와 불신
3D로 모니터에서 결합 시도

치밀하게 연구 진행한다면
새로운 국보급 불상도 가능

불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부처님의 모습을 조형화한 불상을 만들어 모신다. 그리고 이때 불상은 부처님의 대체품이 아닌 부처님, 그 자체이기 때문에 점안의식을 엄숙하게 거행하고 불당에 모시게 된다. 즉 불상을 예배하는 것은 곧 부처님을 예배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럼 불상을 볼 때의 눈은 회화나 공예 등 일반 미술품을 보는 눈과 같을까? 누구라도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불상의 얼굴을 볼 때는 미술작품으로서 감상하기 이전에 이미 무의식적으로 불교의 교주인 ‘부처님의 얼굴’로서 배례하는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신앙의 대상인 불상을 감상의 대상처럼 박물관에서 전시하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우리보다 문화재 개념이 먼저 성립된 일본의 경우에도 19세기 후반, 즉 1880년에 도쿄 우에노(上野)공원에서 개최된 ‘관고미술회(觀古美術會)’ 이후의 일이다. 이 모임이 계기가 되어 현재 국립박물관에서 불상을 상설전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불상은 사찰의 전각 안에 모셔져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감상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불상들은 다양한 사연과 경로를 통해 이동된 것이고, 그곳에서 가치 있는 문화재로서 대접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역시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오늘은 불상을 배례하거나 감상할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부처님의 얼굴’이 없는 불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3D 복원도 - 동면 여래입상.

1983년 3월14일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 살던 권영석씨는 인근 야산에서 무언가 형체가 조각된 바위를 발견하고 이튿날 예산군에 신고하였다. 예산군에서는 즉각 공주와 부여박물관에 현장조사를 의뢰하였고, 공주와 부여박물관은 현장 조사를 실시한다. 조사자는 높이 3m가 넘는 바위의 세 면에 불상이 조각된 백제시대 불상이라는 보고를 국립중앙박물관에 하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1983년 3월28일과 29일 양일간 정양모 학예연구실장을 현장에 파견하여 재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자는 이 불상이 세 면이 아니라 네 면에 부처가 새겨져 있는 사면불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양식적으로 백제시대에 조성된 서산 마애삼존불, 태안 마애삼존불 등과 유사하며, 광배는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의 것과 닮아 있어 제작 시기는 백제시대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석불의 재질이 무르고, 고의적인 파괴와 풍화로 인한 손상이 매우 심한 상태이므로 현지에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거나, 또는 국립박물관으로 옮겨 보호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발견신고자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었다.

이렇게 해서 국내 최초의 백제시대 석조사면불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문화재관리국은 사면석불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1983년 7월20일부터 8월20일까지 주변 지역에 대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견 당시 사면석불의 불두와 불수는 모두 파손 유실되어 온전한 불상은 없었다. 다만 발굴 과정에서 다수의 불두편(佛頭片)과 불수편(佛手片)이 출토되어 사면석불의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석불 주변에서는 불상을 안치했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밖에도 관련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시대 사찰이 있던 곳이라 생각되었지만, 절 이름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 문자가 새겨져 있는 기와도 출토되지 않아 지금은 지명을 붙여 “화전리사지”라 부르고 있다. 사면석불은 현지에 보호각을 세워 안치하였으며, 불두와 불수 등 출토유물은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불상은 1984년 11월 30일 보물 제794호로 지정되었다.

사면석불을 일으켜 세워 새로 안치할 때 불상의 크기나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화려한 광배를 갖추고 있는 점, 다른 면의 상들과는 구별되는 자세 등을 감안하여 앉아있는 좌상을 주존불로 판단하였고, 남면에 배치하였다. 이 남면의 불상은 신체를 거의 환조에 가까운 고부조로 조각하였으며, 특히 원형 두광 내부에 머리가 떨어져나간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머리는 별석제 환조로 만들었을 것이다. 광배와 불신의 화려하고 힘찬 조각만으로도 이 불상에 내재되어 있는 백제인의 조형감각과 미의식을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부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점은 늘 아쉬운 점이었다. 대의는 양 어깨를 모두 가리는 통견식이고 내의를 입었으며, 복부에는 내의를 묶은 띠 매듭이 고리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옷을 입는 방식은 중국 낙양의 룽먼석굴(龍門石窟)의 불상에서와 같이 북위시대부터 보이고, 일본 나라 호류지(法隆寺) 금당의 본존불도 같은 방식이지만, 띠 매듭의 모양이 다르다. 중국은 띠 매듭 끝단이 아래로 길게 내려오고, 일본의 것은 부채꼴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3D 복원도 - 북면 여래입상.

동, 북, 서면에는 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내의를 입고 대의는 통견으로 걸친 동일한 착의법이다. 이런 방식은 태안 마애삼존불이나 서산 마애삼존불 등 백제의 6~7세기 불상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 사면석불을 배견할 때마다 가장 아쉬운 점은 불상의 머리와 함께 양 손이 모두 훼손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손이 없으니까 부처님의 존명을 구별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인 수인 역시 확인할 수 없는데, 다행히 발굴할 때 수습된 파편들이 국립공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어서 형태는 추측할 수 있다. 현재 불신에 남아있는 흔적을 통해 양 손의 위치를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수인은 삼국시대 불상이 가장 많이 취하고 있는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이라 생각된다. 다만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편 전형적인 시무외여원인은 아니고, 하나같이 제1·2·3지를 펴고, 제4·5지는 구부려서 소위 고식설법인(古式說法印)을 취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즉,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하고, 왼손으로 고식설법인을 하고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상과는 다르고, 태안 마애삼존불의 오른쪽 여래입상처럼 양 손 모두 고식설법인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수인은 흔하지는 않지만 중국의 경우 룽먼석굴(龍門石窟) 빈양북동(賓陽北洞)의 본존불(650년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손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구멍이 남아있어서 손은 별도로 제작한 뒤 부착한 것으로 보인다.

예산 화전리사지에 남아 있는 사면불상은 비록 불두와 불수는 분리되어 별도로 보관되어 있지만, 백제 석조불상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 작품임과 동시에 삼국시대 불상양식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불상이다. 가끔 예산에 가서 이 불상을 볼 때는 공주박물관에 있는 불두를 복원해서 결합할 수 있다면 완전체의 사면불상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러던 차에 2017년 기회가 왔다. 예산군에서 발주한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정밀실측조사” 사업을 하게 된 업체에서 불상실측과 보고서 제작에 관한 부분을 우리 연구소에 의뢰한 것이다. 우리는 때마침 주어진 기회라 생각하고 불상만을 실측할 것이 아니라 공주박물관에 있는 불두도 3D로 실측하여, 모니터에서 만이라도 불신과 불두를 결합시켜보는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작업은 향후 이 불상의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를 마련한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작업은 우선 이산가족이 되어 흩어져있는 불신과 불두 그리고 불수들에 대한 손상현황조사와 정밀촬영 그리고 3D스캔 및 실측도면 제작 같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불두들이 단순히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심하게 파손된 상태이기 때문에 결합결과가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사면불상과 불두가 발견된 지 35년 만에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면에서 의미가 크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좀 더 연구를 진행한다면 새로운 국보급 백제불상을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로 아쉬움을 달랬다. 이 자리를 빌려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예산군과 국립공주박물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고구려 석조불상이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본격적인 석불조상은 백제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불교조각을 공부하는 연구자들에게 석불은 금동불이나 소조불에 비해 유용한 점이 많다. 우선 마애불의 경우 암벽에 조각되어 있기 때문에 조성 당시 본래의 장소에서 이동했을 가능성은 없다. 환조상 또한 기본적으로 크게 이동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제작지를 특정할 수 있기 때문에 불상이 조성된 그 지역, 그 시대의 조형감각이나 기술을 확인하는 최고의 유력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백제의 석불은 현존 작품으로 볼 때 예산 화전리사면석불(6세기 후반)이 가장 먼저 조성되었고, 계속해서 태안마애불(충남 태안시, 6세기말)과 서산마애불(충남 서산시, 7세기초) 등이 조성된다. 특히 이 세 불상은 중국 산동반도로 가는 선박들의 발착지였던 태안반도와 당시 백제의 수도 사비(부여)를 잇는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형 석불상의 제작 또한 중국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은 이 지역에서 시작된 것 같다.

삼국 중 조형능력이 가장 뛰어났던 백제를 대표하는 예산의 사면석불과 서산의 삼존불, 그리고 태안의 이불병립상 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대형 석조불상이란 점과 함께 모두 단독상이 아닌 복수의 존상이 결합된 집합존상이란 점, 게다가 그 조합이 매우 신선하고 전무후무하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다뤄야겠지만 아무튼 이 상들이 어떤 신앙을 배경으로 조성되었는지,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도상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조상활동은 그 이면에 백제인들의 자유로운 예술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과 그 예술혼이 처음 발현된 현장이 예산군 화전리에 남아있는 이름 모를 절터라고 여기는 것이 그리 잘못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34호 / 2018년 4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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