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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인민, 그리고 사람

기자명 이중남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을 ‘국민(國民)’이라고 칭한다. 건국헌법(1948) 제2조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 이래 일관되게 유지해 온 전통이다.

그간 국민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있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에 본격화된 황국신민화 정책에 따라 제4차 조선교육령(1943)이 기존의 ‘소학교’를 황국신민을 기른다는 뜻의 ‘국민학교’로 개칭한 사실이 지적되어 왔다. 함석헌 선생이 언급했듯이 여기에는 일제의 국가지상주의, 민족숭배사상이 깊이 배어 있어 어린이를 세계시민으로 기른다는 이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늦게나마 ‘초등학교’로 바로잡은 것은 다행이다.

물론 국민이라는 용어 자체는 ‘주례’ ‘좌전’ ‘사기’ 등 대표적인 동양고전에 나오며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개념이다. 왕조시대에 국민은 피치자(被治者), 신민(臣民)을 가리켰다. 근대 들어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 놓인 아시아 지도자들은 민족의식의 각성과 정치적 단결을 호소하는 의미를 국민이라는 용어에 담았다. 손문(孫文)을 중심으로 창당한 중국국민당이나 구한말 애국계몽단체인 국민교육회, 신채호의 기고문 ‘20세기 신국민(新國民)’ 등에서 그런 뜻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 민중, 다시 말해 정치적 주권을 잃은 사람들을 국민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어떤 의미일까. 1910년 합병 당시 데라우치 총독대리의 포고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 민중은 모두 ‘제국신민’이 되어 천황폐하가 어루만지고 키우는 교화를 입어, 오래도록 깊은 자비와 두터운 덕의 혜택을 입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합병 이후 국민이라는 이름을 붙인 단체들은 대개 친일어용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임시헌장(1919)에서 ‘인민(人民)’을 사용했다. 국가주의 색채가 훨씬 적다는 점에서 국민보다 나은 용어라고 생각하지만, 해방 후 첨예한 반목으로 좌우익이 각각 인민과 국민을 전유하게 되는 상황 때문에 인민은 남쪽에서 금기어가 되었고 대한민국의 구성원은 결국 국민으로 명명되었다.

이처럼 사연 많은 용어를 채택했다 해도, 정치적 중립의 여지가 희박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구성원을 헌법에 규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상을 감안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국민’의 뜻에 따라 국가를 통치한다는 표현은 어쨌든 인민의 자기지배, 사회계약론과도 이념적으로 부합하는 면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은, 우리 헌법은 사람과 국민을 혼동해 왔다는 점이다. 예컨대 제10조는 모든 ‘국민’이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국민이 아닌 사람은 존엄과 가치가 없다는 뜻인가? 외국인에게는 종교와 양심의 자유가 없는가? 법학계의 통설과 판례는 헌법이 국민이라고 규정하더라도 성격상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권리가 있다고 해석하지만, 그 같은 헌법의 표현을 근거로 외국인에게는 기본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낸 헌법재판관이 과거에 분명히 있었다.

개헌 국면이 되니 토지공개념이나 지방분권처럼 향후 국민의 살림살이를 크게 구획할 중대한 사항들, 대통령과 국회간 권한 분산 같은 고도로 정치적인 사안들이 이쪽저쪽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 가운데 별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있지만, 국민과 사람의 쓰임새를 구별해 표기하자는 제안이 나온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지구화가 심화되고 인권규범이 보편화된 시대적 조류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사회에서 국민이나 민족처럼 어딘가에 소속된 사람 말고 ‘사람 그 자체’에 관한 공적인 성찰과 규범화는 너무도 오랫동안 지체되어 왔기 때문이다. 국민과 사람은 벌써 구별되었어야 했다.
 
이중남 마하이주민지원단체협의회 운영위원 dogak@daum.net
 

[1435호 / 2018년 4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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