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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림사 연화복지원 대표 해성 스님

소리없는 세계 갇혔던 장애법우 마음에 ‘태산<太山> 자부심’을 심다

▲ 해성 스님은 “연화복지원 법우들은 수화, 점자, 음성녹음CD 등을 활용하며 법음에 귀 기울이고 있는 분들”이라며 “그들을 향한 편견을 우리는 거둬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언급했듯이 “인간은 언어의 집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우리는 그 언어를 통해 사유하며 그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 그러기에 혹자는 ‘말 하는 것 자체가 존재 자체’라고도 한다. 말할 수 없고 듣지 못 하는 사람들은 ‘소리가 아닌 시각으로 이해되고 표현되는 언어’ 수화(手話)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세상과 소통한다.

꼿꼿한 허리· 빛나는 눈동자
가지런히 발우 펴는 비구니
공양 모습에 21살 때 출가

‘까까 중’표현되던 1990년대
수화 개발에 홀로 동분서주
소통활로 개척 후 25년 전법

연등축제서 당당히 걷는 그들
볼 때마다 자랑스러워 ‘뭉클’
장애인 복지관 세우는 게 ‘꿈’

시도 때도 없이 오는 거지에
“문수보살님 오셨다!” 하신
자현 큰스님 뜻 이젠 헤아려

장애 법우들에게 부처님 법을 전하려면 그 틀에 맞는 불교수화가 있어야 하는데 1990년 전후로 나온 일반 수화집에 수록된 불교 수형은 서너개가 다였다. 누군가는 개척해야 했다. 그 때, 해성 스님이 팔을 걷어붙였다. 1993년 50평 남짓한 건물을 임대해 청각장애인과 함께하는 도량으로 가꾸며 이끌어온 수화법회는 벌써 25년을 맞이했다.

‘수화 사전’에서 스님을 ‘까까 중’이라 표현했던 시대에 연구의 연구를 거듭해 ‘자비의 수화교실’(1999년)을 발간했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0년 1127개의 수형을 담은 국립국어원 편찬 ‘불교 표준 수화집’ 출간에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이때부터 불교계도 청각장애인들에게 올곧은 법음을 전할 수 있게 됐다.

해성 스님의 자비 손길은 시력을 잃은 법우들에게도 닿았다. 그들만을 위한 정기법회를 여는가 하면, 재정자립을 통한 사회적응을 도우려 ‘야 쉽다 운전면허’라는 수험서도 발행했다. 놀랍게도 시험운행용 차량까지 준비해 직접 이론과 실기교육을 병행했다.

들을 수 없는 불자들에게는 수화교재를 보급했고, 볼 수 없는 불자들에게는 점자 경전과 음성녹음CD를 편찬·제작 해 손에 쥐어 주었다. 사찰은 물론 관공서조차 휠체어 경사로 하나 제대로 구비하지 않던 시대에 중증지체 법우들과 산사순례를 떠났고, 주지스님을 설득해 그들을 위한 산사음악회도 열었다. 그리고 해성 스님을 떠올리며 기억해야 할 건 ‘소리 없는 세계’에 갇혀 있던 장애 법우들을 10만여명이 즐기는 연등축제의 세계로 이끌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연등을 밝힐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연등축제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법우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정말이요 스님? 불교계도 이제 우리를 불자로 인정해주네요!’ 환희심에 핀 미소와 감격에 복받친 눈물이 순식간에 피고 흘렀습니다.”

연등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연등행렬. 1995년도 연등행렬을 마친 조계종은 서울 하림각에서 간담회를 열어 전문가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였는데 해성 스님은 가슴 한 편에 묻어 두었던 일언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장애 법우들도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그들도 등을 들고 걷게 해 주세요!”

당시 총무원장 월주 스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흔쾌히 허락했다. 행렬 출발점을 여의도에서 동대문운동장으로 바꾼 1996년, 광림사 연화원 법우들은 연등축제 행렬가도를 당당하게 걸었다.

“첫 연등축제에는 중증지체장애 법우 30명이 참여했고, 훗날에는 60여명으로 늘었습니다. 휠체어를 밀어준 분들 중에는 광림사 청각장애 법우들도 있었습니다. 일반 휠체어보다 큰 전동휠체어는 택시에 실을 수 없어 참여수가 줄었지만 지금도 중증장애 법우들은 연등축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랑의 전화’에서 전화상담을 하며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직시한 해성 스님은 그 누구보다 언어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마음이 쓰였다. 해성 스님의 발길은 수화포교 시대를 처음으로 연(1988) 조계사 원심회로 향했다. 그때가 세납 30대 초반의 1991년이다. 그때, 정말이지 열심히 수화를 배웠더랬다.

“원심회 교육시간이 끝난 후에도 조계사 앞 샘터다방에서 1시간30분 정도 ‘나머지 공부’가 이어졌습니다. 청각장애인 김경환, 임희규 도반님이 성심성의를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선생님’입니다.”

기본 수화를 배우고 나니 청각장애 도반들과 소통이 가능해졌다. 가만 보니 그들만의 공간이 필요해 보였다. 1990년 세운 포이동 광림사(현재 석촌동)를 1993년 2월부터 청각장애인 도량인 ‘광림사 연화복지원’으로 전환해 수화법회를 시작했다. 서너명으로 시작한 수화법회는 순식간에 30여명 규모로 확대됐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급기야 라디오 전파를 통해 “광림사 법우들을 도와달라” 호소했다. 소식을 접한 불자들의 후원이 급속도록 이어졌고, 택시기사 불자들로 구성된 법륜회도 조직됐다(1994). 그 때나 지금이나 지체장애 법우들은 집에서부터 연화원으로 이동시켜주어야 한다. 법륜회가 없다면 그들을 위한 법회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즐겁게 도량을 찾던 법우들이 어느 날 해성 스님을 평소보다 다른 눈빛으로 마주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딱 하나, 최근에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에게 부모님께 드리라며 준비한 작은 선물을 건넨 일이 있었다.

“그 선물이 문제였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고통스럽게 사는 건 나를 낳은 부모 때문이다. 내게 시련을 안긴 부모에게 왜 선물을 주라고 하나!’ 그들의 최대 지지기반이 되어 주어야 할 부모를 불신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구나 싶더군요.”

▲ 해성 스님과 광림사 연화복지원 대중이 난타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해성 스님은 그들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했다. 법우와 부모님 사이에 앉아 수화와 말로 두 세계를 이었다. 법우는 수화조차 가르쳐 주지 않는 부모를 미워하고 있었다. 부모는 처음부터 수화로 대화하기 시작하면 영영 말을 하지 못할 까 염려해 자신들조차 수화를 멀리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두 마음을 처음으로 확인한 순간 부모와 법우는 울음을 터뜨리며 부둥켜안았다. 그 다음 법회에서 법우들은 부모님 손을 잡고와 부처님을 친견했다.

1997년 청각장애인도 면허를 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학원은 사고 위험과 소통 문제로 그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연화원 법우들만을 위한 방책이라도 강구해야 했다. 수소문 끝에 지체장애인 대상 운전교습소를 찾아냈다. 송파구청의 문이 마르고 닳도록 드나들었다.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청각장애인도 교습할 수 있어야 한다. 실습 강사, 차량 모두 광림사가 준비하겠으니 운전기능교습소 사용만 허락해 달라.’ 끝내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는 일일찻집을 열었습니다. 동국대 수화동아리 ‘손짓사랑’이 작은 공연을 열어주었고, 광우 스님께서도 친히 오셔서 차를 사 주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차를 팔아 차를 산’ 셈입니다.”

불자는 물론 이웃 종교인들의 발길도 끊이질 않았는데 그들은 똑같은 질문을 했다. ‘개종을 해야 교육받을 수 있습니까?’

“분명하게 말해 두었습니다. ‘비불자라는 이유가 운전면허 교육실습 대상의 제외 사유가 될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대신, 이것만은 당부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누군가 당신들을 필요로 할 때 도움을 주세요!’”

그때, 광림사 연화원을 통해 면허증을 발급받은 사람이 400명은 족히 넘는다. 청각장애 법우들에 대한 남다른 자비심이 입소문을 타자 시각장애 법우들도 연화원을 찾았다.

“법회서 설한 법문, 점자로 편찬해 준 간단한 경전 정도는 줄줄 외웠습니다. 빛이 뿌려낸 색의 세계를 볼 수 없다고 연등축제에 나서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지팡이 짚고 걸읍시다!’”

2012년 연등축제에서 그들은 가슴을 활짝 펴고 대중들의 환호와 박수를 한껏 안았다.

해성 스님의 여정을 들여다보면 장애법우들의 자존감 향상에 무척이나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일례로 이동식 변기를 들고 다니면서까지 지체장애인들의 사찰순례를 이어갔던 건, 그들도 부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고 싶었던 것이리라.

“태어난지 19개월 만에 뇌막염을 앓으며 시각과 청각을 잃었지만 세계적인 인권운동가로 우뚝 선 헬렌 켈러가 말한 바 있습니다. ‘맹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앞을 볼 수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이다. 어떤 비관론자도 별의 비밀을 발견하고, 미지의 섬을 항해하고, 인간 정신의 새로운 낙원(지평)을 연적이 없다.’ 스티븐 호킹 박사도 2012년 영국 하계 패럴림픽에서 ‘우리 모두에게 무엇인가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며 ‘당신 발을 내려다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별을 보라’고 했습니다.”

연화원은 ‘금강경’부터 ‘법화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전을 점자로 제작 해 보급하고 있다. 법우들이 가장 가까이 하고 싶은 경전은 ‘아함경’이라고 한다. 형편상 아직 편찬하지 못했지만 힘닿는 대로 실행에 옮길 계획이다.

“아나율 존자는 육신의 눈을 잃었으나 정진을 거듭해 천안(天眼)을 얻고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수화, 점자, 음성녹음CD 등을 활용하며 법음에 귀 기울이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미 조계종 공식 포교사로 인정받은 분들도 탄생했습니다. 그들을 향한 편견을 우리는 거둬야 합니다.”

한 가지 궁금했다. 사회복지를 전공하지 않은 해성 스님이 복지에 이토록 남다른 원력을 쏟는 연유가 말이다. 해성 스님은 자신의 출가 때를 회상했다.

▲ 불교수화 책자 보급과 함께 점자 경전도 편찬해 장애 법우들에게 법을 전하고 있다.

고교 졸업 후 입사한 회사 내에서는 성 차별이 심했다. 불만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해소해 보고자 친구와 손잡고 어느 한 사찰을 참배했다. 세속으로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던 즈음이다. 비구니 스님들이 좌복 위에 앉은 채 발우를 가지런히 펼쳤다. 파르라니 깍은 머리, 꼿꼿한 허리, 빛나는 눈동자, 그 자리에는 어떤 차별도 없었다. 세납 21살이었던 1978년 “출가하겠다!”며 집을 나섰다.

서울 보현사에서 삭발염의하고 행자생활을 이어가는 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도 때도 없이 밥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다. 시쳇말로 ‘거지’다.

“자현 큰스님께서는 그들이 찾아올 때마다 저희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문수보살님 오셨다! 정성껏 모셔라.’ 큰스님의 뜻을 받든 은사(恩師) 명식 스님은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었고 반드시 깨끗한 상에 올려 내놓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올 때마다 융숭하게 대접하는 겁니다.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보이신 어른 스님들의 뜻을 헤아린 건 연화복지원을 개원한 후 입니다.”

해성 스님도 꼭 해내고 싶은 원력 하나가 있다. 장애 법우들을 위한 문화복지관을 세우는 일이다. 시내를 걷다가도 5층 정도의 넉넉한 건물만 보면 ‘저 곳에 복지관 세우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떠올린다고 한다.

1층은 장애인 생산용품 판매점으로 사용하고, 2·3층은 지체·시청각 장애인 전용공간으로 활용할 생각이다.
4층에는 의료시설을 갖춘 양로원을 들이고, 5층에는 부처님을 모시려 한다. 지하에는 꼭, 노래방과 당구장 시설을 구비해 놓겠다고 한다. 연화원 법우들이 가장 원하는 시설이기도 하다.

“서두를 일은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부터 꼼꼼하게 해 가야지요!”

해성 스님이 간직하고 있는 부처님 말씀을 여쭈어 보았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잡보장경’의 한 구절을 전했다.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춰라!’

광림사 연화원의 품격이 저 명구에서 샘솟았음을 읽어낼 수 있겠다. 해성 스님이 꿈꾸는 문화복지관이 서면 법음은 좀 더 깊은 울림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그 날을 기다려 보자.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해성 스님

· 1978년 서울 보현사에서 명식 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83년 동국대 선학과 졸업.
· 동 불교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과정 졸업.
· 수서경찰서 경승과 삼선승가대 수화강사 역임.
· 조계종 포교대상 원력상, 불이상,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 대한불교진흥원 대원상 수상.
· 현 광림사 주지이며 사회복지법인 연화원 대표이사.


 

[1435호 / 2018년 4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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