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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고대불교 - 삼국승려들의 해외활동-상

중국에서 인도까지 유학·구법 스님들 활약으로 각국 불교 융성

▲ 부처님이 성도한 자리에 세워진 보드가야 마하보디대탑.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스님들은 중국 유학을 넘어 인도까지 구법수행을 떠났다.

고구려는 372년, 백제는 384년, 신라는 527년 각각 불교를 공인한 이후에 삼국 모두 중국·서역승들의 전도와 유학 승려들의 활약으로 불교는 융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인하여 교단의 실상과 불교의 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는 어렵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여 극히 단편적인 사실만이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에 전해지는 자료를 통하여 해외에서 활약한 승려들의 행적을 다수 확인할 수 있는데, 국내 자료의 부족을 일부나마 보충할 수 있다. 해외에서 활약한 승려들의 행적을 통하여 국내 불교의 내용도 다소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련 자료의 절대 부족으로
당시 불교 구체적 이해 난관

‘고승전’을 비롯한 중국 문헌
적지 않은 삼국 스님들 기록

기록 없는 일본 스님들 대조
한국불교 높이 평가 증거들

중국서 고구려 스님들 활약
당시 고구려 불교 유추 해석

백제 스님 기록 2인에 불과
삼국불교 중 기록 제일 적어

가장 늦게 불교 공인한 신라
해외 활동 스님들 가장 많아

중국 넘어 인도로 구법활동
7인의 신라 스님들 행적남아

중국 측 문헌으로는 ‘고승전’류를 비롯하여 다양한 중국 불교인들의 저술 가운데 적지 않은 삼국 승려들의 행적과 사상내용이 전해지고 있으며, 일본 측 자료로는 ‘일본서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헌에 삼국 승려들의 행적을 전해주고 있다. 이러한 문헌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고승전’(519년 梁의 사문 慧皎 찬술), ‘속고승전’(645년 唐의 사문 道宣 찬술), ‘송고승전’(988년 宋의 사문 贊寧 찬술), ‘대당서역구법고승전’(692년 唐의 사문 義淨이 수마트라의 팔렘방 지역에서 찬술, 측천무후에게 인편으로 올림) 등의 ‘고승전’류이다.

이들 문헌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활약한 삼국의 승려들의 행적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특히 ‘속고승전’ 이하의 문헌에는 삼국승려들의 행적이 중국의 승려들과 함께 독립적인 전기로 다수 수록되어 있으며, 원효와 같이 당에 유학한 적이 없는 인물도 포함되었다. 같은 동아시아 대승불교권의 일원이었던 일본의 경우 구카이(空海)나 사이쵸(最澄) 등 당에 유학한 승려들의 전기가 일체 수록되어 있지 않았던 것과 대조된다. 이 점이 일본 불교계의 삼국전통사관(三國佛敎傳通史觀)에 의해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일부분에 불과했던 것으로 평가되는 근거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승전에서의 차이는 한국불교가 일본불교에 비해 동아시아 불교로서의 보편성이 두드러져서 중국불교계에서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삼국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었던 고구려에서는 4세기 노장사상을 빌려 불교의 공사상을 설명하는 이른바 격의불교(格義佛敎) 단계부터 불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남북조시대부터 수를 거쳐 당의 초기까지 중국불교의 삼론종·지론종·천태종·열반종 등의 학파불교, 소승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선종의 동산법문(東山法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고승전’에서는 격의불교의 대가인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으로부터 서신을 받은 고구려 도인(道人,이름은 전해지지 않음), 삼론종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되는 승랑(僧朗, 450∼530경) 등 2인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고구려 도인이 지둔의 서신을 받았을 때의 장소가 고구려 본국이었는지, 동진의 강남지방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나로서는 중국의 강남 지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다음 승랑은 남조 양의 수도인 건강(난징 부근)에서 교화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성실론’과 분리된 신삼론종의 터전을 마련하여 제자 승전(僧詮)에게 전수되고, 손제자인 법랑(法朗) 대에 이르러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증손제자인 길장(吉藏)과 혜균(慧均)의 저술을 통해서 삼론종으로 집대성되었다. 길장과 동문으로 추정되는 혜균은 ‘대승사론현의기(大乘四論玄義記)’의 저자인데, 최근 백제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주목받고 있다.

다음 ‘속고승전’에는 고구려 출신 삼론종의 인물로서 실법사(實法師)와 인법사(印法師) 2인을 들고 있는데, 실법사는 수나라에서 삼론을 강의한 대가로서 법민(法敏)이 23세에 대승경론을 청강했으며, 당나라 초기의 혜지(慧持, 575∼642)도 그에게서 삼론을 배웠다. 실법사가 죽은 뒤에 인법사는 581년 즈음 수나라의 촉(蜀)으로 가서 삼론을 강의했으며, 당나라 초기의 영준(靈睿, 565∼647)도 그의 제자였다. 인법사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왜 멀리 떨어진 사천지방으로 갔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고구려와 수가 전쟁 중이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고구려 출신의 삼론학자인 혜관(慧灌)이 중국에서 삼론을 배우고 일본으로 가서 스이코조(推古朝, 593∼628) 때에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던 사실도 비슷한 이유로 본다. 고구려 국내에서의 삼론종의 연구 상황은 일체 전하는 바가 없으나, 중국 불교계에서 고구려 출신 삼론학자들의 활약은 본국의 불교계 상황과 무관할 수는 없다고 본다. 고구려에서는 천태종에서도 고구려 출신 파야(波若,562-613)가 천태산의 지자대사 지의(智顗,538-597)에게 수학하여 교관을 전수받고, 16년 동안 스승이 개오한 화정봉에 머물렀는데, 그도 귀국하지 못하였으며, 그로 인해 천태종의 본국 전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속고승전’에서는 진·수의 시대에 고구려 출신 지황(智晃)이 설일체유부에 능통하여 독보적인 지위에 올랐으며, ‘섭대승론’을 북지에 전했던 유명한 담천(曇遷)이 건강에 체재하는 동안 그와 교류하였다. 이밖에 고구려 출신 승려 가운데 선종 동산법문의 홍인(弘忍,602∼675)의 11대 제자 가운데 1인으로 추앙되었던 지덕(智德)이 있었다. 그는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정각(淨覺)의 ‘능가사자기’에 인용된 현색(玄賾)의 ‘능가인법지’와 ‘역대법보기’ 등 이른 시기의 선종 자료에서 신수(神秀)·혜능(慧能)·지선(智詵) 등과 함께 홍인의 제자로서 병칭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로써 ‘고승전’류에 단편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기사에 의해서도 고구려 출신 승려들이 중국 불교계에서 교학의 연구와 선관의 실천자로서 활약하면서 중국의 불교 발전에도 기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백제는 ‘주서(周書)’ ‘남사(南史)’‘수서(隋書)’ 등의 역사서에서 “비구와 비구니가 있고, 절과 탑이 많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불교가 융성하였으며, 동진 이래 중국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여 계율종·삼론종·성실종·열반종 등의 교학 연구가 활발하였다. 백제에서도 고구려의 경우와 같이 중국에 많은 구법승들이 왕래하거나 중국에서 활약한 인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승전’류에 전해지는 인물은 ‘속고승전’의 혜현(慧顯)과 ‘송고승전’의 현광(玄光) 등 모두 2인에 불과하다.

혜현은 무왕 때에 충남 덕산의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지송하고, 삼론을 연구하였으며, 뒤에 강남의 달나산(達拏山, 月出山?)으로 옮겨가서 정관(627∼649)초에 입적하였다. 중국에의 유학이나 활약한 사실은 일체 전하지 않는다. 다음 현광은 ‘송고승전’을 비롯하여 그의 행적을 전하는 전기들에서 모두 ‘신라승’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광 말년의 교화 장소가 고향인 웅주(熊州, 지금의 공주)였고, 스승의 말년인 577년이 백제의 위덕왕 24년이 되기 때문에 ‘백제인’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중국 남조인 진에서 남악혜사(南岳慧思,514∼577)로부터 ‘법화경’의 안락행 법문을 전수받고 수행 정진하여 법화삼매를 증득하였다. 그 뒤 스승의 권유로 귀국하여 웅주 옹산(翁山)에서 절을 짓고 교화하였다. 그에게는 중국의 선사 혜민(慧旻)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가 있었으며, 중국 남악혜사의 영당 안의 28인 그림과 국청사 조사당에는 그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혜현과 현광을 통해 백제의 법화신앙의 유행과 중국 천태종에서의 선구적 업적을 짐작케 하지만, 그들의 행적이 다분히 설화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그대로 신빙하기 어렵다.

그런데 신라는 삼국 가운데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으나, 불교 공인 이후 적극적으로 불교 진흥정책을 추진하여 서역과 중국 출신의 승려들을 초치하고, 중국에 유학승을 파견하여 7세기경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속고승전’에는 원광과 자장 등 2인, ‘송고승전’에는 원측·순경·의상·원효·진표·무상·지장·무루·원표 등 9인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어서 중국 불교계에서 신라불교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원광과 자장을 제외한 인물들이 모두 7세기 이후 통일신라시기에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기 중대불교의 항목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한편 7세기 중반 경부터 신라의 학승들은 중국에의 유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적지를 순례하고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멀리 인도에까지 갔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7세기 인도를 순례한 구법승 56인의 전기가 수록되었는데, 신라인 7인, 고구려인 1인의 전기가 수록되었다.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는 당의 정관 연간(627∼649)에 장안을 출발하여 불적을 순례하고 나란타사에서 70여세로 세상을 떠났다. 혜업(慧業)도 같은 시기 보드가야의 보리사(菩提寺)에 머물면서 불적을 순례하였으며, 나란타사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듣고 독송하였다. 그는 진제(眞諦)가 번역한 ‘섭대승론’과 범어본의 경전을 베껴 썼는데, 의정이 이 절에 왔을 때는 60세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현태(玄太)는 영휘 연간(650∼655)에 티베트와 네팔을 경유하여 중부 인도에 들어갔다. 보리수에 예배하고 경전과 논서를 상세히 조사하였다. 그는 귀국을 위해 토욕혼(土谷渾)을 지나다가 다시 대각사로 돌아갔었는데, 뒤에 당으로 돌아온 유일한 인물이었다. 현각(玄恪)과 혜륜(慧輪)은 현조(玄照)와 함께 정관 연간에 인도에 갔다. 그 가운데 현각은 대각사에 이르렀으나, 40여세로 병사하였다. 혜륜은 신라에서 출가한 뒤 해로로 복건지방을 거쳐 장안에 갔으며, 황제의 명으로 현조의 시자가 되어 불적을 순례하고 갠지스강 북쪽 암파라파국의 신자사(信者寺)를 거쳐 동북쪽 토카라의 절인 건타라산다에서 의정이 들릴 때까지 머물렀다. 그는 범어를 잘 하였으며, ‘구사론’을 폭넓게 공부하였다. 각훈의 ‘해동고승전’에서는 현조도 신라인으로 기술하였으나, 그는 산서성 화음현(華陰縣) 사람이었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2인의 신라 승려를 더 수록하였는데, 이들은 장안을 출발하여 남해로 가서 배를 타고 슈리비쟈국의 서쪽 파로사국에 이르러 모두 병사하였다. 이밖에 ‘삼국유사’에는 이들 이외에 구본(求本)을 더 들고 있는데, 근거한 자료를 확인할 수 없다. 통일 뒤의 인도 순례자로는 ‘왕오천축국전’의 저자인 혜초(慧超)와 원표(元表)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당에 돌아와 일생을 마쳤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35호 / 2018년 4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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