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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세상에 나오자마자 자취 감춰버린 광주 증심사 금동불상들

기자명 이숙희

증심사 금동불입상·금동보살입상 감쪽같이 사라져

▲ 증심사 5층석탑, 조선, 높이 247.5cm.

광주광역시 동구 증심사길 177번지 증심사 5층석탑에서 나온 금동불입상과 금동보살입상 2구는 언제 도난되었는지도 모른 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사진 1) 1933년 증심사 5층석탑에서 발견된 후 두 불상은 국보 제211호와 국보 제212호로 각각 지정되었으나 6·25 한국 전쟁 이후 행방을 알 길이 없어 지정문화재에서도 해제되었다.

1933년 증심사 석탑서 발견
국보 211·212호 각각 지정
경찰서 금고에 보관 했으나
한국전쟁 후 행방 묘연해져
지정문화재서 해제되는 불운

금동불입상은 통일신라 모습
금동보살입상 고려 이후 추정

스님들이 땅에 묻고 피난 간
송광사 고봉국사주자원불은
전쟁 후 회수 현재까지 보존

국보급 두 불상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은 1950년 5월이었다고 한다. 당시 광주 조선대에서 한국 고미술에 대한 특별강좌가 있었다.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관장과 최순우 선생이 특별강좌를 마치고 광주 근방의 문화재를 살피고자 광산군 효지면에 있는 증심사로 갔을 때였다. 증심사에 있어야 할 두 국보불상이 없었다. 공비 출몰로 사찰이 불안하다고 해서 경찰서장이 가져갔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었다. 다시 경찰서로 갔을 때 서장은 금고에서 소중히 보관하던 불상을 일행 앞에 내보여주었다. 그러나 6·25 전쟁의 혼란이 가신 뒤 여러 전문가들이 다시 확인하려 했을 때는 이미 두 불상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서장은 바뀌고 불상은 간 곳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서장이 전하기를 금동불상들은 금고 속에 둔 채 6·25 전쟁 중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흐지부지 10여년이 지난 후 재지정에서 분실이란 이름으로 국보지정이 해제되기에 이르렀다.

사찰측에서 문화재가 도난당할 것을 우려하여 간혹 경찰서에 맡겨두는 경우가 있다.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상의 복장유물(국보 제282호) 중 일부가 1996년 5월부터 1997년 7월까지 1년 이상 근처 이산파출소 무기고에 보관된 적이 있었다. 복장유물에는 조선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과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 명빈 김씨가 시주하여 1458년에 아미타삼존불상을 제작하였다는 조성기와 제작과정 등이 적혀 있어 조선 초기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원래 지정문화재의 보관 장소를 옮기는 현상변경을 할 때는 문화재청에 반드시 알리도록 ‘문화재보호법’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사찰에서는 소장 문화재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몰래 가져가거나 혹은 시중에 내다팔다가 들통 나는 일들도 있었다.

▲ 경향신문 1963년 2월5일자.
1963년 2월5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증심사 5층석탑 발견의 금동불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은 높이 15cm 되는 작은 크기로 뚜렷하지 않지만 전체 형태와 얼굴 윤곽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사진 2). 금동불입상은 머리 위의 육계가 큼직하며 둥근 얼굴에 근엄한 표정이 엿보인다.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의 법의는 몸에 완전히 밀착되면서 가슴 위에서 U자형으로 흘러내려 발목 위에까지 늘어져 있다. 두 손은 각각 위, 아래로 향하여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있다. 이 금동불입상은 얼굴이나 손 모양에서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는 부처의 위엄이 풍긴다. 이러한 스타일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불상 모습이다.

반면에 금동보살입상은 여래상과는 달리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있다. 얼굴이 넓적한 편이고 머리 위에는 장식이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보관 밑으로는 앞머리가 가지런히 내려와 있다. 몸 위로는 영락장식이 다리 아래까지 늘어져 있는 흔적이 보인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모아 합장을 하고 있다. 이 금동보살입상은 대체적인 특징으로 볼 때 고려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들은 어디에 있을까? 꼭꼭 숨어 지금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불상들에게 한 가닥의 희망을 걸어본다. 언젠가는 당당하게 등장할 것이라 믿는다.

이와는 달리 6·25 전쟁 중에 간신히 살아남은 금동불감도 있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송광사 경내 성보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고봉국사주자원불(高峰國師廚子願佛)은 한국전쟁 때 약탈당할 것을 염려하여 스님들이 피난가면서 땅 속에 묻어 두고 간 탓에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사진 3). 고봉국사주자원불은 송광사의 16번째 국사인 고봉화상(1350~1428)이 가지고 다녔던 원불이라 전하고 있다. 1974년 10월9일 새벽에 문화재 전문 절도범들이 송광사 성보박물관 철제출입문의 자물쇠를 열고 들어와 금고 안에 보관 중이었던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금동요령(보물 제176호)과 함께 훔쳐갔다. 고봉국사주자원불 역시 도난당하였다가 하루 만에 인천 남구 숭의동에 있는 골동품상에서 되찾았다. 지금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 고봉국사주자원불, 고려, 크기 23X16.1cm. ‘되찾은 문화재 되살린 문화재’(불교중앙박물관, 2012).

고봉국사주자원불은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위, 아래 부분이 약간 찌그러져 있고 표면이 심하게 부식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보존처리가 되어 있다. 불감의 형태는 지붕이 상·하단으로 구성된 2층 구조로 전각형에 가깝다.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본존으로 한 삼불 형식이 새겨진 방형의 금동판이 봉안되어 있어 고려시대 불감 중에서 이례적인 예에 속한다. 양쪽 문을 닫으면 인왕이 표현되어 있고 열면 안쪽 면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과 보관을 쓴 관음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앞면과 뒷면에는 불상과 범자(梵字)를 새겼으며 그 주위를 터키석과 수정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감실에 봉안된 금동판은 2단으로 구성되었다. 위쪽에는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여래상이 배치된 삼불이 있고 아래쪽에는 나한상과 보살좌상이 2구씩 표현되었다. 비로자나불상은 두 손을 모으고 양손의 두 번째 손가락만 구부려 맞대고 있는 지권인을 하고 있다. 좌우의 여래상과 보살좌상은 도상적 특징이 뚜렷하지 않아 존명을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삼불의 경우,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두 다리에 비해 상체가 크게 표현되었고 세부표현도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그런 탓에 얼굴이나 법의, 손모양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과는 다른 특이함과 세련되지 못한 조각기법을 보여준다. 나한상과 보살상도 마찬가지로 간략하면서 치졸한 표현이 나타나 있다. 여래상의 경우, 광배가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신광배로 되어 있으나 나한과 보살상은 두광만 표현되었다. 대좌는 나한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불·보살상 사이로는 6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용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고봉국사주자원불은 오랜 세월을 견디어온 탓으로 일부 손상이 있었으나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불감의 형태나 구조, 삼불의 형식 등에서 특이하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435호 / 2018년 4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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