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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4·11대 총무원장 영암 스님-상

종무행정·사찰 재정관리 달인…종단 혼란 수습한 ‘구원투수’

 

▲ 1969년 1월 영암 스님(사진 윗줄 가운데)을 비롯해 종단 집행부가 홍진기 문교부 장관과 만나 사찰문화재 관리 등을 논의하고 있다. ‘통합종단40년사’

1967년 7월25일 해인사에서 열린 16회 임시중앙종회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종단 부채의 책임을 물어 경산 총무원장의 경질을 요구했던 종정 청담 스님이 자신의 뜻이 반영되지 않자 “종정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이날 중앙종회에서는 종정스님의 사직문제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일부에서는 종정스님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사직원을 보류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다른 측에서는 종정스님과 함께 총무원장의 사표도 받아 함께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결국 중앙종회는 이틀에 걸친 논란 끝에 종정과 총무원장의 동반 사퇴라는 초유의 결정을 내렸다. 이어 3대 종정에 고암 스님을, 4대 총무원장에 영암(기종) 스님을 선출했다.

월정사·해인사서 총무·재무역임
종무행정 밝고 원칙론자로 정평
해인사 주지 때 20개 전각 복원
현재 해인총림 설립 토대 닦아

총무원장 맡으며 종단부채 해결
분담금 제도 등 재정 구조 혁신
중앙종회 등서 두터운 신뢰 얻어

중앙종회가 영암 스님을 총무원장에 선출한 것은 청담, 경산이라는 종단 내 두 실력자의 동반퇴진에 따른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대한불교’(1967년 8월13일자)에 따르면 이 무렵 영암 스님의 행정스타일은 ‘쾌도난마(快刀亂麻)’에 비유됐다.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도 영암 스님 앞에서는 실타래 풀리듯 해결됐다는 데서 유래했다. 영암 스님은 월정사, 해인사 등에서 오랜 기간 총무와 재무 소임을 맡아 종무행정에 밝았고, 스스로 공사(公社)를 엄격히 구분해 모든 일을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결국 영암 스님은 전임 총무원장 경산 스님이 초래한 채무문제를 비롯해 혼란한 종단 상황을 수습할 ‘구원투수’였던 셈이다.

영암 스님은 1907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 양산 통도사에서 청담(朱淸潭)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구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30년 통도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한 뒤 1933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한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그해 3월 스님은 자신의 고향이었던 울진 불영사 주지에 취임했다. 영암 스님의 법어집 ‘동쪽 산이 물위로 간다’(2006)에 따르면 당시 불영사는 심각한 운영난을 겪으며 폐사 직전에 내몰렸다. 스님은 주지 취임과 동시에 대대적인 불사에 착수해 불영사를 복원했고, ‘불교를 일으키겠다’는 원력으로 자운 스님 등과 함께 3년 결사를 진행했다. 숱한 역경 속에서 복원한 사찰이었기에 영암 스님은 유독 불영사와의 인연을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젊은 스님의 불사원력과 수행력은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 무렵 불교계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지암(이종욱) 스님에게도 전해졌다. 영암 스님은 지암 스님의 권유로 1938년 월정사 재무를 맡은 이후 강원 종무원 재무, 총무 등을 거쳤으며 1952년 해인사 총무로 가기까지 주로 월정사에서 지냈다. 일각에서 통도사에서 출가한 영암 스님을 월정사 문중스님으로 오인하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영암 스님이 종무행정가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59년 백양사 주지와 재단법인 원효학원 감사를 거쳐 1960년대 초 해인사 주지를 맡으면서부터다. 이 무렵 해인사는 한국전쟁과 불교정화 등을 거치며 극심한 재정난을 겪었다. 대중스님들은 매번 끼니걱정을 해야 할 정도였다. 사찰의 전각은 낡아 비가 스며들었고, 서까래마저 온전한 게 없을 만큼 낙후된 상태였다. 영암 스님의 해인사 중창불사는 ‘팔만대장경 수호 정대불사’로부터 시작됐다. 정대불사는 경판을 머리에 이고 법성게를 외며 도량을 도는 것으로 고려시대 때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법보신앙’에서 유래했다. 영암 스님은 옛 전통을 되살려 법보종찰 해인사의 위상을 새롭게 부각시켰으며, 정대불사에 동참한 신도들의 보시금으로 해인사 재정난을 타개했다. 영암 스님에 의해 복원된 해인사 ‘팔만대장경 수호 정대불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정난을 극복한 영암 스님은 해인사 곳곳의 전각을 보수, 복원했다. ‘대한불교’(1967년 6월25일자)에 따르면 영암 스님은 해인사 주지를 맡은 3년 동안 극락전 4동을 비롯해 조사전, 퇴설당, 관음전, 명월당, 공수실, 구광루, 해탈문, 천왕문, 국사단, 나한전, 지장전 등 전각 20여개동을 보수하거나 새롭게 복원했다. 이는 1967년 해인사가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최초의 총림으로 승격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영암 스님은 망실된 해인사 토지를 되찾는 데도 앞장섰다. 현재 경남대학교의 전신인 해인대학에 편입됐던 해인사 임야 3300여 정보(1정보=3000평)를 반환받았고, 4년간 진행한 ‘농지소송’에 승소해 전임주지 때 발생한 부채 840만환을 정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행정과 재정 관리의 달인으로 꼽혔던 영암 스님이 아니었다면 이루기 힘든 일이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1967년 8월10일 4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영암 스님은 “결코 빚을 지면서까지 종단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며 ‘내실 있는 종단 운영’을 제1목표로 내세웠다. 이를 위해 △중앙행정기구의 간소화 △총무원 재정정리 △본사책임제에 의한 승풍진작 △종단 화합 등 4대 행정지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영암 총무원장이 풀어야 할 시급한 과제는 전임 총무원장이 남긴 4000여만원의 빚이었다. 이 때문에 영암 스님은 취임 초부터 ‘빚 청산 행정부’를 자임했다. 종단 부채문제만 해결하면 자신은 언제든 총무원장에서 물러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재무관리의 달인으로 평가됐던 영암 스님은 예상보다 빨리 종단 채무를 갚아나갔다. ‘대한불교’(1967년 10월29일자)에 따르면 영암 스님은 10월25일 전국교구본사주지회의를 소집해 “취임 이후 3개월간 종단 빚을 세부적으로 분류해 이자가 많은 급한 채무부터 갚아나가 현재 남은 빚은 760만원 정도”라고 보고했다. 이 빚도 미납된 사찰분담금을 받는다면 이른 시일 내에 완결 지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행정업무의 간소화와 총무원 행정인력의 최소화 등을 통해 재정구조를 개선하고 전임 총무원장이 빚을 내며 추진한 사업들을 대폭 정리한 결과였다.

영암 스님은 한발 더 나아가 종단 수입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전국사찰의 분담금 징수체계를 대폭 손질했다. 통합종단조계종은 총무원 운영과 종단 주요사업 추진을 위해 등록 사찰에 분담금을 부과해왔지만 뚜렷한 산출기준 없이 책정되면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징수에 어려움을 겪었다. 영암 스님은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우선 24개였던 교구본사제도를 개편했다. 1교구본사에 서울 봉은사를 지정하고 25교구본사에 남양주 봉선사를 승격시키면서 25교구본사제로 변경했다. 이를 통해 각 교구본사의 재정능력에 따라 7등급으로 분류했다. 말사의 경우도 서울, 대구, 부산 등 대도시에 위치한 사찰은 특별말사로, 시도군 단위에 있는 사찰은 보통말사로 나눈 뒤 다시 재정능력에 따라 갑·을·병·정으로 구분해 각 사찰별로 배점을 정했다. 각 사찰별로 책정된 배점의 높고 낮음에 따라 분담금을 차등 적용하도록 했다. 사찰의 예결산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찰별 재정능력을 파악한다는 것이 다소 모호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현실성 있는 분담금 징수기준이었다.

취임 3~4개월 만에 부채문제가 정리되고 바닥난 종단 재정구조가 개선되자 종단 내부에서는 영암 스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졌다. 장로원장 청담 스님은 ‘대한불교’(1967년 11월26일자)와의 인터뷰에서 “영암 스님 같은 분이 앞으로 4년만 더 종단 일을 맡는다면 이 나라 불교발전은 필연코 이뤄질 것”이라고 극찬했다.

종단이 빠르게 안정되자 영암 스님은 공언했던 대로 그해 12월17일 제17회 중앙종회에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총무원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중앙종회는 영암 스님의 사직서를 반려하고 남은 임기동안 총무원장을 맡아줄 것을 요구했다.

중앙종회에서 재신임을 받은 영암 스님은 종단 재건을 위한 사업에 착수했다. 통합종단 출범 때부터 내세웠던 도제양성·역경·포교 등 3대 핵심사업에 역점을 뒀으며, 종단 행정체계 개선에도 앞장섰다. 총무원 경상비를 절약해 총무원과 조계사 명의의 적금 통장을 개설했다. 1969년 9월 영암 스님이 총무원장에서 물러날 무렵엔 각각 200만원에 달했다.(대한불교, 1969년 9월14일자)

영암 스님은 군포교에도 적극 나서 종단의 숙원이었던 군승 파송문제를 해결했다. 정부와의 오랜 협의 끝에 1968년 5월24일 국방부가 군종승 선발 규정을 담은 ‘국방부령124호’를 공포하도록 이끌었다. 마침내 군승파송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에 따라 그해 9월13일 국방부 군승장교선발시험에 합격한 권기종, 장만수, 이지행, 김봉식, 권오현씨 등 5명이 첫 군승으로 임관했다.

통합종단 출범 이후 계속된 시행착오로 혼란을 겪던 조계종은 영암 총무원장 체제가 정착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일부에서 사찰주지 인사를 두고 불협화음이 나오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1968년 11월 경주 불국사에서 발생한 주지폭행사건은 조계종 위상을 급격히 실추시켰다. ‘경향신문’(1968년 11월8일자)에 따르면 감찰원 조사과장 등 40여명은 11월7일 사찰의 재정 비리를 감사한다는 명목으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급습, 이에 저항하는 사찰주지 등과 갈등을 빚었다. 급기야 조사과장 등은 사찰주지를 감금하고 옷을 벗기고 망신을 주면서 강제로 주지사직서를 쓰도록 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조계종 스님들의 부도덕성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전국신도회, 청년회, 학생회 등 10여개 신도단체도 11월9일 ‘교법수호전국신도단체협의회’를 구성해 승풍진작을 위한 종단차원의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중앙종회는 그해 11월18일 제19회 정기회를 소집해 수습에 나섰다. ‘2대 중앙종회 회의록’에 따르면 중앙종회는 불국사 사태와 관련해 관련자들을 출석시켜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감찰원, 불국사 주지 등 관련자들을 현직에서 자진 사퇴하도록 결의했다. 또 중앙종회 차원의 조사단을 구성, 불국사 사태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도록 했다. 다만 중앙종회는 이 사태와 관련해 도덕적 책임을 표명한 총무원장 영암 스님에 대한 사직서를 또 반려하기로 결의했다. “불국사 사태와 관련해 총무원이 잘 대응했고, 이 상황에서 행정책임자가 사퇴하면 더 많은 의혹을 살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중앙종회에서 영암 스님의 신뢰가 높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불국사 사태가 수습되면서 조계종은 다시 안정을 찾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8월 장로원장 청담 스님의 느닷없는 탈종선언으로 조계종은 다시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 사건은 종단의 구원투수로 불렸던 총무원장 영암 스님에게도 최대 위기였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36호 / 2018년 4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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