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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최초의 불치사 이수루무니아

‘최초의 사원’ 역사가 ‘세기의 사랑’ 전설에 가려져서야

▲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이수루무니아는 기원전 246년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 스님에게 봉헌된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이다. 또한 그로부터 500여년 후인 312년 인도로부터 석가모니부처님의 치아사리가 전래됐을 때 가장 먼저 봉안된 스리랑카 최초의 불치사이기도 하다.

싱할라왕조의 위대한 대왕 둣타가마니의 아들 살리야는 왕좌를 이어받을 후계자였다. 둣타가마니는 타밀 왕 엘랄라를 물리치고 44년간 이어진 타밀족의 싱할라왕국 지배를 종식시킨 민족의 영웅이었다. 둣타가마니의 후계자인 살리야는 그러나 천한 집시 여인과 사랑에 빠져있었다.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친 여인 아소카말라에게 단번에 마음을 뺏겨버렸기 때문이다. 대왕으로 불리는 둣타가마니였지만 자식의 일만큼은 뜻대로 할 수 없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를 바 없나보다.

마힌다 스님에게 봉헌된
스리랑카 최초 사원이자
312년 칼링가서 도래한
치아사리의 첫 보금자리
국정위기 타개 신호탄 돼

왕관 버린 왕자의 사랑에
‘사랑의 사원’으로 더 유명

아그니·파르잔냐 신상 조각
힌두교와의 교류 흔적 보여

“고귀한 혈통의 왕세자인 네가 천한 여인과 결혼할 수는 없다. 그 여인을 선택한다면 왕좌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둣타가마니는 최후의 수단으로 살리야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살리야는 아버지의 엄포에 굴하지 않았다. 하긴, 둣타가마니 또한 아버지 카반팃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에 참여했으니 살리야의 고집은 아버지를 닮은 셈이었다. 살리야는 왕관을 버리고 아소카말라와 결혼했다. 둘은 아름답게 꾸며진 왕실정원에서 끝도 없는 사랑을 속삭였다. 이수루무니아 바로 옆이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이수루무니아는 ‘사랑의 사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 이수루무니아에 조각돼 있는 힌두교의 신상은 불교와 힌두교의 교류를 말해준다.

인근 지역에서 출토된 한 점의 조각상을 사람들은 살리야왕자와 아소카말라라고 말한다. ‘연인상’이라 불리는 이 부조에는 왕자의 무릎에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함께 출토된 왕실가족 부조상에는 둣타가마니왕과 왕비, 그리고 아들 살리야와 아소카말라가 조각돼 있다. 하지만 천한 신분의 아소카말라는 한쪽 구석에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뭉뚱그려져 있다. 살리야와도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둣타가마니의 고집은 2000여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하다. 왕위는 둘째 아들(혹은 왕의 동생)이었던 사다팃사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이수루무니아를 ‘사랑의 사원’이라고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이 사원의 역사는 그보다 크고 묵직하다. 스리랑카 최초의 불교사원이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 스님에게 보시된 사원이었다.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불법을 접한 데바남피야팃사왕은 도성 밖 숲에 머물던 마힌다 스님을 모시고 법문을 듣기 위해 이수루무니아를 짓고 승단에 보시했다. 또 명문가 자녀 500명을 출가시켜 이곳에서 불법을 배우도록 했다. 최초의 사원이자 승가대학이었던 셈이다. 싱할라어로 북쪽을 뜻하는 ‘이살라’와 사원을 뜻하는 ‘아라마’가 합쳐져 ‘북쪽에 있는 사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특별한 이름 없이도 부족함 없는 유일한 사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수루무니아 주변에는 스님들이 포행하고 수행할 수 있는 넓은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잘 관리된 숲은 정원과 같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명문귀족가 자제들이 출가했으니 그들을 찾아오는 친지, 귀족들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왕실정원이라는 말은 아마도 그렇게 만들어진 표현일 것이다. 그들 중에 살리야왕자와 아소카말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의 사원이라는 표현은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마땅히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이라 불려야 한다. 무엇보다 스리랑카에 전해진 석가모니부처님의 치아사리가 최초로 모셔진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불치는 인도 칼링가국에서 312년 스리랑카에 최초로 전해진다. 전쟁에 휩싸인 칼링가국은 불치를 안전하게 모실 곳으로 스리랑카를 택했다. 불치 이운의 막중한 임무는 공주 헤마말라에게 주어졌다. 헤마말라는 틀어 올린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불치를 숨기고 남편 단타구말라와 함께 몰래 왕국을 빠져나와 스링랑카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배는 스리랑카에 도착하기 전 태풍을 만나 난파되고 헤마말라와 단타구말라는 구사일생으로 스리랑카에 도착한다. 칼링가국 공주가 불치를 이운해왔다는 소식에 당시 싱할라왕국을 다스리던 시리메가완나(304~332)왕이 직접 바닷가로 나갔다. 헤마말라로부터 불치를 전해 받은 왕은 보석으로 장엄한 코끼리 위에 불치를 모시고 도성 아누라다푸라로 돌아왔다. 이것이 페라헤라로 불리는 불치 이운행렬의 시초다. 불치는 이수루무니아에 봉안됐다. 최초의 불치사다. 그리고 매년 3월이 되면 불치이운행렬이 열렸다. 법현 스님의 기록 ‘불국기’는 당시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 인근에서 출토된 ‘둣타가마니왕의 가족’.

“… 불치는 항상 3월 중에 불치사로부터 꺼냈다. 이것을 꺼내기 10일 전 왕은 큰 코끼리를 장식하고 한 사람의 말주변이 능한 자에게 왕의 옷을 입혀 코끼리 위에 태우고 북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합창하게 했다. ‘이제부터 10일 후 불치는 불치사를 나와 무외산사에 이를 것이다. 국내의 도속과 복을 심고자 하는 자는 각각 도로를 평탄하게 하고 거리를 아름답게 꾸미며 여러 가지 꽃, 향, 공양기구를 마련할 지어다.’ 이와 같이 합창을 마치면…”

불치 전래 후 50여년, 싱할라왕국서 열리던 불치 이운행렬은 화려한 축제, 그 이상의 장엄한 불사였다. 국왕이 직접 주관하고 백성들이 함께 참여하는 페라헤라를 통해 불치는 싱할라왕조의 구심점으로 확고한 위상을 쌓고 있었다.

스리랑카에 전해지고 있는 수많은(?) 부처님 사리 가운데 이처럼 그 역사와 출처가 명확한 사리는 없다. 역사서는 불치가 인도 칼링가국으로부터 스리랑카에 전해진 배경과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도 놓쳐서는 안 된다. 역사는 평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치가 어떻게 칼링가국에 전해졌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것이 진짜 불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대열반경’이 증명한다.

‘…치아 하나는 삼십삼천이 예배하고, 하나는 간다라의 도시에서 모시고 있다. 칼링가 왕이 다시 하나를 얻었으며 또 하나는 용왕이 모셨다.…’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르에서 열반하신 후 수습된 사리는 여덟 부족이 나눠 봉안했다. 사리 가운데에는 4개의 불치가 포함돼 있었는데 도리천의 삭카천왕과 용신인 나가왕이 각각 한 과를 이운해 갔고, 한 과는 간다라에 봉안됐다. 그리고 마지막 한 과는 아라한이던 케마존자가 칼링가국의 왕 브라흐마닷타에게 전했다. 이 불치는 칼링가국에 800여년 간 봉안돼 있었다.

4세기 초에 이르러 칼링가국은 대기근과 이교도의 침입으로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더 이상 불치를 안전하게 봉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새로운 봉안처로 스리랑카, 즉 싱할라왕조가 선택되었다. 법현 스님은 “칼링가의 국왕이 헤마말라 공주부부에게 ‘불치를 싱할라국의 마하세나왕에게 전해 여법하게 모실 수 있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기고 죽음을 각오하며 전장으로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하세나(277~304)국왕을 불치의 봉안자로 선택한 것이다.

▲ ‘연인상’ 으로 알려진 부조물.

하지만 다시 한 번 역사를 읽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눈에 띈다. 싱할라왕국 또한 불치를 봉안하기에 적당한, 태평성대만은 아니었다. 당시 싱할라왕국에서는 승단 간 힘겨루기가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정통상좌부를 고수하는 마하위하라[大寺]파와 신생부파인 아브하야기리위하라[無畏山寺]파 간의 대립이 첨예하게 불거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아브하야기리위하라를 지지하던 국왕 마하세나는 제타완나위하라[祇陀林寺]라는 새로운 가람을 지어 또 다른 부파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 때문에 싱할라왕국에는 세 개의 부파가 존재하게 되었고 마하위하라파는 “왕으로부터 공양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일종의 ‘보이콧’이자 ‘산문폐쇄’였다. 마하위하라파는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이 같은 조치는 왕에겐 치명적인 국정위기를 불러왔다.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귀족들이 등을 돌린데 이어 내란의 조짐마저 보였다.

이러한 때 마하세나왕은 칼링가국에 사신을 보낸다. 엄청난 양의 보물을 선물로 전하며 불치이운을 요청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칼링카국은 불치를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칼링가국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불치를 모시고 싶다 ‘정중히’ 요청했던 싱할라왕국의 마하세나를 다시 떠올렸다. 불치를 이운한 헤마말라가 싱할라왕국에 도착하기 전 마하세나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들 시리메가완나는 부왕의 뜻에 따라 최고의 예로 불치를 받들었다. 이수루무니아에 불치가 봉안된 후 불치는 싱할라왕조의 상징이 되었고 민중들에게는 ‘불치를 모신 이가 싱할라왕국의 지배자’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물론 시리메가완나는 아버지와는 달리 마하위하라파와의 관계를 회복, 백성들의 마음을 되찾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불치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불치의 도래 시점, 그리고 왕실의 위기극복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이수루무니아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다. 자연 바위동굴을 이용해 조성된 사원이기에 연못 또한 바위와 맞닿아 있다. 바위에는 코끼리가 조각돼 있고 그 위로 힌두교에서 태양의 신으로 숭상 받는 아그니와 비의 신 파르잔냐를 상징하는 말머리 조각상도 있다. 이 조각은 7세기 남인도 팔라바지역의 영향을 보여준다. 때문에 후대에 힌두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곳이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사용됐다고 여겨진다. 사찰 안에서 힌두교와의 교류 흔적이 확인되는 것이다.

남인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는 스리랑카는 남인도에 뿌리를 두고 있는 타밀족, 그리고 그들이 숭상했던 힌두교와의 교류나 협력 또는 대립과 전쟁의 역사를 초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 같은 흔적은 이수루무니아의 연인상에 대한 해석에도 영향을 미쳤다. 살리야와 아소카말라라고 믿어지는 연인상에 대해 힌두교의 쉬바신과 그의 부인 파르바티를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 조각이 5세기 인도에서 유행했던 굽타양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이 같은 주장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조각의 주인공은 과연 살리야왕자와 아소카말라일까, 아니면 쉬바신과 파르바티일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알 수 없다. 누구인들 무슨 상관이랴. 이곳은 스리랑카 최초의 불치사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역사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36호 / 2018년 4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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