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제갈량의 사세부득
62. 제갈량의 사세부득
  • 김정빈 교수
  • 승인 2018.04.1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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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주군은 영원한 주군, 신하는 임금에 봉사할 뿐”

▲ 그림=근호

‘삼국지’는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봉기한 세력들 간의 쟁투를 바탕으로 쓰여진 대하소설이다. 이 소설의 수많은 주인공 중 독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인물은 자(字)가 공명(孔明)이어서 제갈공명으로 더 알려진 제갈량(諸葛亮, 181~234)이다.

조조에 패하고 제갈량 찾은 유비
두번 헛걸음에도 포기하지 않아
‘삼고초려’ 하고서 마음 얻어내

성심 다해 유비에 헌신한 제갈량
촉나라 세우는 데 큰 공도 세워

‘충’은 순수하면서 진실한 마음
고난과 역경 헤쳐나가는 힘 돼
대승불교 제창하는 불성과 유사


제갈량이 활동하던 시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10명의 내시들은 황제를 속이고 국정을 농단하다가 난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대장군 하진이 죽고 권력은 동탁에게 넘어갔다. 동탁은 황제를 폐하고 새 황제를 세운 뒤 약탈, 살인, 도굴, 방화를 저질렀다. 이에 반동탁 연합군이 일어났으며, 얼마 안지나 그는 의붓아들인 여포에게 살해되었다.

명목상의 황제가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원소, 원술, 조조, 공손찬, 손견, 여포 등이 세력을 겨루었다. 수많은 전투와 암투 끝에 황제가 머무는 낙양이 포함된 북방은 조조가, 장강을 끼고 있어 방어하기에 유리한 남방 지역은 손견과 그를 이어받은 그의 아우 손권이 장악했다.

조조, 손권과 함께 ‘삼국지’의 세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유비는 한 황실의 종친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 대 선조가 그러하다는 것뿐으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던 당시 그는 돗자리를 짜서 파는 사람에 불과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민병대를 일으켜 공을 세운 다음 조금씩 세를 확장해나갔다.

모두가 자사, 태수, 장군, 대신 출신인 당대의 영웅들에게는 큰 규모의 군대와 많은 물자가 있었지만 민병대를 이끌고 있었던 그에게는 그런 자산이 없었다. 그 대신 그에게는 자신에게 의탁해온 사람을 아끼는 두터운 인간미가 있었다. 그는 관우, 장비, 조운 등 휘하 장수들과 고통과 이익을 함께했으며, 이런 그의 태도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헌신을 끌어냈다.

207년, 유비는 조조에게 패한 뒤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수경 선생으로부터 “와룡(臥龍)과 봉추(鳳雛) 가운데 한 사람만 얻어도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와룡이 제갈량의 별호임을 안 그는 융중에 은거하고 있는 제갈량을 찾아갔다.

그가 처음으로 제갈량이 사는 곳을 방문했을 때 제갈량은 출타 중이었다. 두 번째도 헛걸음. 인재에 목말랐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공명을 찾아갔다. 이것이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인데, 그 과정을 거쳐 공명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공명으로부터 향후 자신이 나아갈 길과 관련된 원대한 비전을 제시받았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직은 미약한 황숙의 힘으로는 북의 조조, 남의 손권과 다툴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유표의 형주와 유장의 익주뿐인데, 그들은 역량이 부족합니다. 먼저 그곳을 취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십시오. 그리하여 삼분천하의 한 축을 이룬 다음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를 무찔러야만 합니다.”

공명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에 유비는 감탄했다. 유비는 “선생의 말씀을 듣고 나서 제 마음은 구름이 확 개인 하늘처럼 시원해졌습니다”라고 말하며 제갈량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그 청을 받아들여 제갈량은 은거지를 나와 유비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이후 제갈량은 성심성의를 다해 유비에게 봉사했다. 27세 때 융중을 나와 54세로 죽을 때까지 그에게는 오로지 유비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제갈량은 황숙인 유비가 몸을 낮춰 자신을 세 번이나 찾아 준 고마움을 평생에 걸쳐 잊지 않았다. 그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유비를 위해 바쳤고, 그런 제갈량을 유비는 가족 이상으로 믿고 아껴주었다.

제갈량을 비롯한 책사, 장수들과 함께 유비는 손권과 연합하여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으며, 곧이어 형주와 익주를 취했다. 214년, 유비는 이미 황제가 되어 위(魏)나라를 세운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촉한(蜀漢)의 황제가 되었으며, 손권 또한 오(吳)나라를 세워 자립했다.

이렇게 하여 천하는 제갈량이 융중에서 세운 계책 제1단계대로 삼분되었지만 손권과 연합하여 강력한 일인자인 조조와 대적하려던 제갈량의 2단계 전략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두 세력이 연합하기에는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

삼국이 경쟁하는 동안 조조와 유비가 죽었다. 유비는 임종의 자리에서 제갈량에게 “만일 자신의 아들 유선이 임금 노릇을 할 만하면 임금으로 모시고 그렇지 않을 땐 그대가 임금이 되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갈량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한번 주군은 영원한 주군이라는, 신하는 오로지 임금에게 봉사할 뿐이라는 마인드를 가진 그에게 자신이 황제의 위에 오른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남만(南蠻)을 평정하여 후방을 안정시킨 다음 조조의 아들인 조비와 겨루기 위해 여섯 차례나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였다. 234년 제갈량은 천하통일과 한실 중흥이라는 자신의 주군 유비의 꿈을 이루어주지 못한 채로 원정 중이던 진중에서 병사했다.

먼저 우리는 ‘삼국지’라는 소설에 묘사된 제갈량이 실제 제갈량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긴 하지만 역사에 보이는 실제 제갈량에게 유비에 대한 헌신의 염, 즉 충성심이 매우 깊었음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충(忠)은 본래 마음(心)의 중심(中), 즉 순수한 마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랬던 것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주군에게 일관되게 바치는 순수한 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충이라는 말이 갖는 두 가지 뜻 가운데 후자는 이제 필요 없게 되었다. 현재 우리는 민주사회에 살고 있고, 민주사회에서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직위상의 위아래는 있다. 하지만 인간 자체에는 위아래가 없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렇지만 첫 번째 충심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본심으로서의 충과 가장 비슷한 것을 불교에서 찾는다면 대승불교가 제창하는 ‘불성’일 것이다.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순수무잡한 마음, 그 마음이 보존되고 발현되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다고 대승불교는 말한다.

제갈량은 충심에서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힘을 얻었다. 그러나 사세부득하여 꿈을 다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우리 또한 불성을 실현하지 못한 채 죽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떠랴, 순수한 마음, 충의 마음, 불성을 향해 전진하는 마음은 그것을 가졌다는 것, 그것을 구현하려고 애썼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미 구원이고, 목적인 것을!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36호 / 2018년 4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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