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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천 배방사지(泗川 排房寺址)

기자명 임석규

고려 현종의 애틋한 이야기 품은 고려시대 대표 산지가람

▲ 배방사지 원경.

사천시는 한반도의 남단이자 경상남도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이다. 동쪽으로 고성군, 서쪽으로 하동군, 북쪽으로 진주시와 이웃해있다. 해상으로는 여수시부터 거제시까지 이르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내륙과 해양문화가 서로 결합해 지역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지리적 조건 때문인지 사천의 첫 지명은 사방에 물이 풍부하다는 뜻의 ‘사물’이었다. 이후 신라시대에는 ‘사수(泗水)’로 고려시대에는 ‘사주(泗州)’로 불렸고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 ‘사천’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대로 된 안내판 하나 없어
찾아가는 것조차 쉽지 않아

불교문화재연구소 조사 후
석축대지 발견, 사역 확인

60m 넘는 석축의 발견 이어
4기의 석축들 연이어 확인

석축 주변 유물 발굴됐지만
완전한 형태 발견되지 않아

남아있는 유구들을 통해서
건축기술·규모 등 파악 가능

부모 잃은 현종의 어린 시절
부친과의 애틋한 사랑 전해

사천시의 북쪽은 지리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남으로는 와룡산(해발 798m)과 각산이 도시를 감싸고 있어서 자연재해를 막아주고 있다. 특히 사천시의 진산인 와룡산에는 사천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고려 현종 임금이 어린 시절을 보낸 배방사의 옛 터가 남아있어서 주목된다. 현종이 왜 사천까지 내려와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여지승람’ 등에 잘 나와 있고 사료에는 현종의 어린 시절이 등장하는 구절마다 배방사가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배방사가 있던 옛 터에는 안내판 하나 없고 찾아가는 길 또한 쉽지 않아 현종과 그의 아버지 안종(安宗) 왕욱(王郁)의 구구절절한 부자상봉 스토리가 무색할 지경이다.

▲ 배방사지 석축.

현종의 아버지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왕욱이고, 어머니는 헌정왕후이다. 그런데 왕욱과 헌정왕후는 근친혼이 유행했던 고려 왕실에서 조차도 용납될 수 없는 관계였다. 왜냐하면 헌정왕후가 왕욱의 이복형인 대종(大宗)의 둘째 딸이었기 때문에 왕욱에게는 조카였고, 이미 고려 제5대 왕인 경종의 네 번째 왕비였기 때문이다. 헌정왕후의 언니 헌애왕후 또한 경종의 비였는데 경종이 26세의 젊은 나이에 죽자 자매는 동시에 과부가 되었다. 경종이 죽은 후 헌정왕후는 궁궐에서 나와 왕륜사(王輪寺)의 남쪽 자기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근처에 살던 시숙부 왕욱의 집을 자주 왕래하다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급기야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을 낳게 되었으니 그가 훗날 현종으로 등극하는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이라는 인물이다. 나이 많은 시숙부를 사랑하고 아이까지 낳은 헌정왕후는 대량원군을 낳자마자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리고 같은 날 성종은 왕욱을 귀양 보내는데, 귀양살이를 하게 된 곳이 사수, 즉 지금의 사천이다.

한편, 헌정왕후가 낳은 아들 왕순은 어머니와는 사별하였고, 귀양간 아버지와는 생이별을 하였으니 천애고아와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성종은 순을 궁궐에서 거두어 키우게 되는데, 순의 처지가 불쌍했는지 보모는 “아버지”란 말을 집중적으로 가르친 듯하다. 하루는 성종이 아이를 불러서 보는데 보모에게 안겨 들어간 아이는 성종을 우러러보더니 “아버지”라고 부르고, 무릎 위로 기어 올라가서 옷깃을 당기면서 또 한번 “아버지”라고 불렀다. 성종이 가련히 여겨 눈물을 흘리면서 “이 아이가 대단히 아버지를 그리워하는구나!”하고 말하더니 드디어 아이를 아버지 왕욱이 있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보내었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부자상봉의 길은 열렸지만 둘은 함께 살 수 없었다. 순을 왕욱의 집에 보내준 것이 아니라 배방사에 맡겼기 때문이다. 왕욱은 어린 아들을 만나기 위해 매일 배방사를 찾았을 테지만 행복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들이 다섯 살 되던 해(성종 15년, 996) 왕욱은 죽게 되고, 그 이듬해 순은 개경으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 성종마저 죽게 되어 대량원군 순의 생활은 여전히 순탄치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 헌정왕후와 동시에 과부가 되었던 큰 이모 헌애왕후(獻哀王后) 때문이었다.

헌애왕후는 성종이 재위 16년 만에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전권을 장악하였으며 그의 친정을 허락하지 않고 섭정을 하였다. 이때부터 헌애왕후는 천추태후(天秋太后)로 불리면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또한, 헌애왕후가 김치양과의 사이에 아들을 출산하면서 대량원군에 대한 미움이 더 커졌다. 김치양은 원래 천추태후의 외가 쪽 친척이었다. 그는 성종대부터 천추궁을 출입하게 되었고,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결국 불륜의 관계가 되었다. 성종은 이 소문을 듣고 김치양을 먼 곳으로 귀양 보냈으나, 목종이 즉위하면서 천추태후는 그를 다시 개경으로 불러들였고 불륜의 관계가 지속되었다. 마침내 아들을 하나 낳으니 천추태후는 그로 하여금 목종의 뒤를 잇게 하려고 했다.

▲ 배방사지 석축-잡목 제거 중.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이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승려가 되게 하였는데, 처음에는 숭교사(崇敎寺)라는 절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때 그 절의 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은 큰 별이 절 마당에 떨어져 용으로 변하더니 다시 사람으로 변하였으며, 그 사람이 바로 대량원군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목종 9년(1006)에는 현종을 삼각산 신혈사(神穴寺)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대량원군은 피신생활을 하는 처지였지만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암살시도를 피해가며 나름대로 포부를 키워나갔다. 이러한 정황을 알고 있던 목종은 마침내 태조 왕건의 친손자이기도 한 대량원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니 그가 바로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이다. 현종은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수현을 잊지 않고 사주로 승격시키는가 하면 아버지인 왕욱을 효목대왕(후에 안종으로 추존), 어머니를 효숙태후로 추존하고, 아버지의 능을 개경으로 옮겨 건릉이라고 이름 짓고 후에 무릉으로 개칭했다.

배방사는 여러 문헌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배방사지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2003년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광역지표조사를 실시하였으며, 2013년과 2016년에는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정밀사지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사역은 처음에는 층단을 이룬 경작지였으나, 차츰 묘역으로 바뀐듯하고, 대지정비가 진행되어서 유적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2016년 조사에서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석축대지를 발견하면서 새로운 사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는 사천시 정동면 장산리 111-1번지 일원에 있는 절터를 배방사의 옛 터라 생각하고 있다.

배방사지는 귀룡산(해발 351.9m)이 남서쪽으로 뻗은 지맥의 사이 계곡인 뱅이골과 대산마을 사이에 있는 대산저수지 북서쪽 완경사면에 있다. 대산마을 북서편을 가로지르는 정동면 배방길 356(장산리 67)의 북쪽 끝자락이다. 배방길을 따라 북쪽으로 약 1.5㎞ 정도 오르면 콘크리트 도로가 끝나는 곳 주위로 건물 두 채가 보이는데, ‘정동황차원’이라는 전통 차를 판매하는 다원이었던 곳이다. 지금 다원은 운영하고 있지 않다. 사지는 두 채의 건물이 자리한 두 단의 넓은 석축대지를 중심으로 한 일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유적은 앞선 조사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던 곳이었는데, 현지 조사할 당시 사천시청 김상일 학예사가 미심쩍은 곳이 있다며 알려준 곳이었다. 처음에는 단애부에 온통 수풀로 뒤덮여 있어서 석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곳이었으나 장애물을 제거하자 대단한 규모의 석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8월말 폭염 속에서 60m가 넘는 석축을 낫 한자루로 노출시키는 작업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일이었지만, 오랜 세월 숨기고 있던 자태를 당당히 드러낸 거대 석축을 본 순간 모든 피로는 사라져버린 듯 했다.

석축은 3기가 연이어 확인되었으며, 북서쪽으로 약 40여m 정도 떨어져 도로와 인접한 곳에서 한 기가 더 확인되었다. 유물은 석축을 쌓아 조성한 대지 위, 석축 사이, 석축 아래 도로 배수로 등에서 발견하였다. 주로 토기류, 자기류, 기와류가 확인되었으나 완형이 없어 형태를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드물다.

석축의 잔존상태는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나 구간에 따라 개 보수된 흔적이 확인되며 일부 구간은 석축이 결실되고 붕괴된 상태이다. 중심사역으로 추정되는 석축은 등고선과 평행한 방향으로 좌우로 길게 이어져 있다. 남아있는 석축의 길이는 약 62.5m, 높이 1.5~2.6m 내외이다. 4기의 석축은 구간에 따라 일부 석축이 무너진 상태이지만 현재 구간에서 북동쪽으로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배방사지 석축-잡목 제거 후.

절터는 법등이 끊긴 사찰의 옛 터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건물이 남아 있지는 않아도 여전히 의미 있는 건축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따라서 남아 있는 유구를 통해 해당 시기의 건축기술이나 생산력의 수준 등을 파악할 수 있으며, 새롭게 드러난 배방사지의 석축도 보성 개흥사지 석축과 함께 고려시대 대형 산지가람의 공간 구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서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절터는 눈에 보이는 유형문화재 뿐만 아니라, 관련된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 설화 등이 함께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에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면에서 절터는 현재 신앙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찰보다도 활용가능성이 큰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배방사는 고려시대 현종이 어린 시절 한 때를 보낸 사찰이지만, 그 이면에는 태어나서 왕으로 즉위하는 30세 까지의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시작된 곳이고, 짧지만 아버지와의 행복했던 한 때를 보낸 추억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왕이 된 후 현종이 보여주었던 친불교적인 정책의 배경이 되었으리란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배방사지는 깊은 산 속에 있고, 안내판이나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찾아 가는 길이 쉽지 않다. 사천시에서 ‘부자상봉 로드’라도 만들어 준다면 어린 대량원군을 만나러 가는 길이 좀 편해지지 않을까?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36호 / 2018년 4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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