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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파인만의 여실지견

기자명 김정빈

“저는 이제 더 이상 종교적 기적을 믿을 수 없네요”

▲ 그림=근호

리처드 파인만(R. Feynman)은 미국 뉴욕시 맨해튼에서 출생했다. 그는 196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으며, 물리학자 중 가장 흥미로운 인물로 꼽힌다. 그의 아버지 멜빌은 리투아니아계 유대인이었다. 성품이 자상했던 그는 어린 아들에게 자연에 숨어 있는 물리 현상의 원리를 설명해주곤 했다. 다른 면에서 멜빌은 아들에게 ‘무시하는 태도’를 가르쳤다. 어느 날 그는 ‘뉴욕타임스’에 실려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한 파인만
MIT 재학시절 기숙사에서
방문분실하는 사건 일어나

장난기발동 다른 문도 숨겨
자신이 문 숨겼다고 말해도
친구들 아무도 그말 믿지않아

불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불법승에 대한 믿음보다도
그것 통해 여실지견 갖는 것

“여기 이 사람에게 많은 사람이 아주 공손하게 절을 하고 있지? 그건 이 사람에게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게 있기 때문인데, 그게 뭔지 아니? 그건 바로 이 사람의 모자야.”

멜빌이 말한 그 사람은 머리에 삼중관을 쓴 교황이었다. 모자, 계급장, 제복 같은 것은 그 사람의 진짜 모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멜빌은 아들에게 말해주었다. “논리적으로 판단해야 해. 그게 누구의 입에서 나온 소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리처드는 회당에 나가 유대교 랍비의 설교를 듣곤 했다. 어느 날 리처드는 랍비를 찾아가 물었다. “조금 전에 랍비님은 순교자 루스가 죽어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말씀하셨는데, 누가 어떤 방법으로 그가 죽어가면서 한 생각을 알아냈나요? 그녀가 직접 말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그건 동화처럼 좋은 뜻에서 지어낸 이야기란다.”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리처드는 울먹이며 말했다. “저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조금도 관심이 없어요. 더 이상 종교적 기적을 믿을 수가 없네요.” 이후 리처드는 종교에서 멀어졌고, 그의 부모는 아들에게 유대교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리처드 파인만이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학생이었을 때의 일이다. 그를 포함한 학생들이 머무는 기숙사 한 방의 문이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없어졌는데, 문이 있던 자리 옆에 ‘문 좀 닫아 줘!’라는 글씨가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다. 그 방에 머무는 친구들은 누군가가 방에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문 좀 닫아줘!”라고 말하곤 했었다. 누군가가 그 행동을 놀리기 위해 사건을 벌인 게 분명했다.

문이 없어진 것을 맨 먼저 발견한 파인만은 장난기를 발동했다. 그 방에는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는 그 문을 마저 떼어 지하실에 숨겨두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손등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이튿날, 조금 늦게 아래층에 가보니 사람들이 웅성대며 이 황당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가 평소에 자주 장난을 치곤 하던 파인만에게 소리쳤다. “네가 문을 가져갔지?” 파인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내가 문을 떼서 숨겨 두었어. 증거도 있어. 이것 봐. 문을 옮기다 손등에 상처까지 났잖아?”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파인만의 말을 유념하여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범인이 누구인지와 문을 어떻게 찾을지에 대해 지금까지 해오던 논의를 계속하기만 했다. 파인만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쪽지의 필체를 감정함으로써 첫 번째 문을 가져간 범인들이 밝혀졌다. 문제는 두 번째 문이었다. 범인들은 그 문은 자신들이 가져가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당연히’ 첫 번째 문을 가져간 사람이 두 번째 문도 가져갔을 거로 생각했던 것이다.

일주일 뒤, 기숙사 대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숙사 선후배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회의 중간에 한 친구가 발언권을 얻어 말했다. “회장께서 우리 모두의 명예를 걸고 모든 회원들에게 문을 가져갔는지 여부를 직접 물어볼 것을 제안합니다.”

이 제안은 회장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회장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문을 가져갔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순서가 파인만에게 이르러 회장이 물었다.

“파인만, 자네가 문을 가져갔나?”
“예.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지금 농담을 할 때가 아니야.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 다음 순서, 샘, 자네가 문을 가져갔나?”

회장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지만 혐의를 인정한 사람은 파인만을 제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 밤, 파인만은 종이에 문을 숨겨둔 곳의 그림을 그려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었다. 마침내 문이 제자리로 돌아온 다음, 파인만은 친구들에게 한 번 더 자신이 문을 가져갔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나서 사과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파인만이 그동안 거짓말로 자신들을 속였다며 비난했다. 하지만 파인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백까지 했었다. 그 장난에 숨어 있는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인 사람은 소수 몇몇 사람에 불과했다.

고정관념의 병폐를 불교처럼 강조하는 종교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금강경’은 그에 관한 설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며, 불교의 가장 중요한 수행법인 위빠사나 명상 또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간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종교가 고정관념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종교는 그 병폐를 마지막까지 밀고 나가기에는 껄끄러운 점이 있다.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지만 믿음은 고정관념의 일종이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고정관념을 갖지 말라고 말한 다음, “그러나 신에 대한 믿음은 예외”라고 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불교 또한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삼보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것은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통해 나와 세계에 대한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인에게는 나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세가 믿음보다 중요하다.

파인만의 친구들 중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하는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문이 분실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불교인들 중에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설법을 무수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대상을 정직, 순수한 마음으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꽤나 많다. 그것이 중생세계이고 세속세계이다. 다만 진정한 불교인만이 그 중생세계, 그 세속세계를 넘어서거나, 넘어서기 위해 자신을 부단히 일깨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37호 / 2018년 4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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