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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고대불교 - 삼국승려들의 해외활동-하

일본불교는 출발단계부터 한반도 도래인에 의해 이뤄져

▲ 쇼토쿠 태자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호류지. 벡제 기술자들에 의해 건축됐다. 출처=일본 관광청

기원전 6·5세기 무렵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는 중국을 거쳐 4세기 중반에는 한반도에 전해졌고, 일본에는 6세기 전반에 비로소 백제로부터 전해졌다. 그런데 일본은 백제로부터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시기에 관하여 긴메이(欽明) 13년(壬申年, 552, 聖王 30년)설과, 긴메이 무오년(戊午年, 538, 聖王 16년)설의 두 가지가 전해져 왔는데, 최근의 일본 학계에서는 후자의 설을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본이 불교 받아들인 시기
552년, 538년 두 가지 존재

쇼토쿠 태자 스승 혜자 스님
일본의 불교 발전에 큰 기여

수나라 길장의 제자인 혜관
일본 삼론종의 시조로 추앙

백제는 불교 전해준 이후에
지속적으로 스님들 파견해

경전과 스님, 불상뿐 아니라
각종 기술자들도 함께 파견

백제가 한반도서 멸망한 뒤
일본 망명, 아스카불교 개척

일본의 정사로 알려진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전자의 설(552), ‘원흥사가람연기(元興寺伽藍緣起)’와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에서는 후자의 설(538)을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 긴메이천황 13년 겨울10월조에는 백제의 성(명)왕이 서부희씨(西部姬氏) 달솔(達率) 노리사치게(怒唎斯致契) 등을 보내어 석가불의 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율론 약간권을 헌상하면서 표문을 올렸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그 표문 내용이 당나라 의정(義淨)이 703년에 번역한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의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던 점에서 ‘일본서기’ 편찬자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일본학자 가운데는 승려 도자(道慈)의 작문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는 위 기사에 이어 불교 수용을 둘러싸고 유력 호족인 소가(蘇我)씨와 이를 배척하려는 모노노베(物部)씨가 대립하였던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실제 도래인 계통으로 진보적 성향을 띠었던 소가씨와 보수적 성향의 모노노베씨 사이의 숭불(崇佛) 논쟁이 일어난 것이 552년이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일본서기’의 불교 전래설은 이 숭불논쟁 사건과 혼동한 결과였다.

한편 일제시기 한국고대사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스에마쯔 야스카즈(末松保和)는 일찍이 삼국의 불교전래설을 검토하면서 일본의 불교 전래 시기(552)가 백제의 불교 전래 시기(384)와 너무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불합리한 사실이라고 보아 백제의 불교 전래시기를 140년 내지 78년을 내려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 반면 한국의 김영태는 백제의 왕인(王仁)이 일본에 건너간 해인 아신왕(阿莘王) 14년(405)을 문자와 함께 불경을 전한 때로 볼 수 있다는 새로운 설을 제기하여 15대 침류왕의 아들이었던 아신왕 때로 연대를 크게 올려 보았다.

이상에서 일본의 불교 전래시기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일본의 불교 수용은 출발 단계부터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도래인과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선 주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6세기 전반 야마토(大和) 정권은 한반도의 도래인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재정과 정치조직을 정비해 갔는데, 이 과정에서 세력을 굳힌 유력한 호족이 백제계의 소가씨였다. 소가씨는 많은 도래계 씨족을 아래에 두고 새로운 미야케(屯倉) 경영과 불교 진흥에 힘쓴 개명한 씨족이었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는 쇼토쿠(聖德)태자와 결탁하여 587년 모노노베씨를 멸망시키면서 봉불논쟁은 끝나게 되었고, 불교를 비롯한 대륙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592년 스이코(推古)천황이 즉위하면서 쇼토쿠태자와 소가노 우마코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아스카(飛鳥) 문화는 한반도로부터 유입된 대륙의 여러 문화가 불교문화로 종합된 점이 특색이다.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소가씨에 의해 신앙이 급속히 보급되어 사원이 많이 건립되었고, 조각·회화·공예에서 뛰어난 불교 미술 작품이 나타났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이러한 문화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삼국의 불교승려들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삼국의 승려 가운데 고구려의 승려로서 가장 먼저 일본에서 교화활동을 한 인물은 혜편(惠便)이었다. 혜편이 처음 일본에 왔을 때는 홍법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간에 묻혀 속인(俗人)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소가노 우마코가 백제에서 보내 온 미륵불상 2구의 안치를 위한 정사(精舍)를 지어놓고 분수할 사문을 찾고 있을 때, 혜편을 찾아서 정사에 모시고 스승으로 삼았다. 혜편이 소가노 우마코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지고 교화를 시작한 때는 비다쓰(敏達)천황 13년(584, 平原王 26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혜편은 양나라 사람 사마달(司馬達)의 세 딸인 선신(善信)·선장(禪藏)·선혜(惠善) 등에게 계를 줌으로써 최초의 비구니를 배출하였다. 뒤에 이들 비구니들은 백제로 유학을 왔는데, 스슌(崇峻)천황 원년(587)에 백제에서 계육법(戒六法)과 구계삼중(具戒三重) 등을 배우고 3년(590)에 돌아갔다. 이것이 일본 계율종의 초전이며, 훗날 그들로부터 수계를 받은 비구니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또한 고구려 승려인 혜자(惠慈)는 스이코천황 3년(595, .陽王 6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백제의 승려 혜총(惠聰)과 함께 혜자가 섭정(攝政)이 된 쇼토쿠태자에게 불교를 가르친 것은 물론 정교(政敎) 면에서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음해(596) 10월 법흥사(法興寺)가 완성되자, 칙명에 따라 이 절에 머물렀으며, 스이코천황 23년(615, 영양왕 26년)에 다시 고구려로 돌아왔다. 그리고 스이코천황 10년(602, 영양왕 13년)에는 승륭(僧隆)과 운총(雲聰) 2인이 일본에 왔으며, 스이코천황 18년(610, 영양왕 18년)에는 담징(曇徵)과 법정(法定) 등이 일본에 왔다. 이들 가운데 특히 담징은 불교 이외에도 의학과 오경(五經)에 밝았으며, 물감·종이·먹·맷돌 등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그래서 그는 공예기술 등의 일본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일본 사람들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나라의 호류지(法隆寺) 금당벽화는 근거가 없으며, 사실성이 희박하다.

스이코천황 때에 고구려 승려로서 일본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혜관(慧灌)이었다. 그는 일찍이 수나라에 가서 중국 삼론종의 대성자인 길장(吉藏, 549~623)에게 배우고 귀국하였다가 스이코 33년(625, 營留王 8년) 1월에 일본으로 가서 칙명에 따라 원흥사(元興寺)에 머물렀다. 그는 백제 승려 관륵(觀勒)의 뒤를 이어 일본의 제2대 승정(僧正)이 되었고, 그의 문하에 삼론종의 승려를 많이 배출하여 일본 삼론종의 시조로서 추앙받았다. 그밖에 ‘일본세기(日本世記)’를 지은 도현(道顯)도 고구려 승려였으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한편 고구려의 승려들이 일본에 많은 기여를 하였고, 특히 고구려의 불교 가운데 삼론종이 융성하였기 때문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일본 승려들이 고구려에 유학하여 불교를 배워갔는데, 도등(道登)·행선(行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행선은 고구려에 머무는 동안 관음보살의 영험을 입은 일이 있다고 하며, 718년 귀국하여 흥복사(興福寺)에 머물렀다. 또한 일본 승려 혜사(慧師)는 고구려에 유학하여 불교를 배우고, 다시 중국으로 가서 길장에게 삼론종을 배웠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가서 원흥사에 머물면서 하쿠호(白鳳) 2년(673)에 덴무(天武)천황의 칙명에 따라 승정에 올랐다.

다음 백제는 처음으로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었던 바와 같이 일찍부터 승려들이 일본에 가서 활약하였다. 긴메이(欽明)천황 15년(554, 聖王 32년) 담혜(曇慧) 등 9인의 승려들이 함께 일본에 보내져서 도심(道深) 등 7인의 승려들과 교대하게 하였다. 이로 보아 도심 등 7인의 승려는 언제 일본으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성왕 32년 이전에 간 것이 분명하다. 또한 교대로 승려들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백제는 처음 불교를 전해준 이래 일본 주재의 불교포교승단을 주기적으로 보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비다쓰(敏達)천황 6년(577, 威德王 24년)에는 경론, 그리고 율사(律師)·선사(禪師)·비구니·주금사(呪.師) 등과 함께 불공(佛工)·사장(寺匠) 등 기술자들까지 보내주었으며, 동 13년(584, 위덕왕 31년)에는 일본인들이 미륵불상 2구를 가져갔다. 그리고 스슌(崇峻)천황 원년(588, 위덕왕 35년)에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사공(寺工)·와장(瓦匠)·화공(畵工) 등을 보내어 일본의 불교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때 소가노 우마코는 백제 승려를 초빙하여 수계법(受戒法)을 물었으며, 또한 고구려의 혜관으로부터 수계한 선신니 등을 백제에 보냈다. 또한 혜총(惠總)·영근(令斤)·혜식(惠寔) 등 사문으로 하여금 불사리를 일본에 전했으며, 이어 영조(聆照)·영위(令威)·혜중(惠衆)·혜숙(惠宿)·도엄(道嚴)·영개(令開) 등 승려들을 보냈다. 당시 수많은 백제 승려들은 일본에 가서 유명 무명에 관계없이 불교의 기반을 닦아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승려들 가운데 특히 뛰어난 활약을 보인 승려로서는 풍국(豊國)·혜총(惠聰)·관륵(觀勒)·도장(道藏) 등 4인을 들 수 있다. 풍국은 쇼토쿠태자가 시텐노지(四天王寺)를 세우고 낙성법회를 개최할 때 공양도사로 모셔졌으며, 이어 주지가 되었다. 혜총은 스이코천황 3년(595, 위덕왕 42년)에 일본에 가서 고구려의 혜자와 함께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어 일본 삼보의 큰 기둥이 되었다. 관륵은 스이코천황 10년(602, 武王 3년)에 천문·지리·역서·둔갑방술서 등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전했다. 그는 특히 삼론종의 대가로서 불교 이외의 의술 같은 학문에도 능통했다. 그는 일본 최초의 승정이 되어 불교교단의 기강을 바로 잡았는데, 이때 고구려의 덕적(德積)도 승도(僧都)에 임명되었다. 도장은 하쿠호 연간에 활약한 성실종의 학자로서 일본에서 ‘성실론소(成實論疏)’ 16권을 지었는데, 그는 성실종뿐만 아니라 법상종·구사종·삼론종에도 능한 학자였다. 뒷날 도다이지(東大寺)의 학자들은 ‘성실론’을 연구할 때 반드시 도장의 주석을 참고로 하였다고 할 정도로 그들에게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그밖에도 일본에 갔던 승려로는 일라(日羅)·혜미(慧彌)·도흠(道欽)·의각(義覺)·도령(道寧)·다상(多常)·원각(願覺)·원세(圓勢)·방제(放濟)·법명(法明)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와 같은 백제의 불교와 문화의 전래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어 일본의 초기불교에 미친 백제 승려들의 역할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일본으로 망명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따라서 승려들도 많이 건너가 아스카(飛鳥)불교는 그들에 의해 개척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37호 / 2018년 4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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