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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4·11대 총무원장 영암 스님-하

철저한 자기관리로 종단발전 헌신한 종무행정의 달인

 

▲ 1975년 다시 총무원장에 오른 영암 스님(왼쪽에서 세 번째)이 군법당 준공식에서 장경호 거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과 기념촬영을 했다. ‘통합종단 40년사’

1969년 8월 조계종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장로원장 청담 스님이 돌연 “조계종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이 무렵 청담 스님은 조계종의 상징으로 대변됐다. 1950~60년대 전통불교 회복운동의 기수로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을 주도했으며 초대 종정 효봉 스님에 이어 2대 종정에 올라 종단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었다. 그랬던 청담 스님의 종단 탈퇴선언은 종단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언론은 앞 다퉈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1969년 청담스님 종단탈퇴 선언
선학원 수좌들, 승려대회 예고
중앙종회, 수좌들 압력 거세자
영암 원장 등 집행부 사퇴 결의

1975년 종정중심제 갈등 속에
11대 총무원장으로 재취임
군포교 매진하며 안정 이끌어
봉은사 주지 땐 땅 2만평 회복

논란이 커지자 청담 스님은 8월15일 자신의 종단탈퇴와 관련한 소명서를 발표했다. ‘대한불교’(1969년 8월17일자)에 따르면 청담 스님은 소명서에서 “종단의 원로로서 또는 정화운동의 횃불잡이로서 근 20년간 심혈을 기울여 보았으나 나의 무능력과 부덕의 소치 또는 시운(時運) 탓인지 잘 되어가는 일은 적고 잘못되는 일이 많으며, 종단은 정화재건 되기보다 앞길이 어두워가기만 한다”고 적었다. 청담 스님은 또 “제20회 종회에 ‘종단유신재건안’을 제출한 것은 애종우교(愛宗憂敎)하는 여러 동지의 뜻을 한데 묶은 단심의 발로요 피어린 절규였다”며 “그러나 그 부르짖음에 귀가 열릴 줄 모르는 종회는 그것을 깊이 새겨보지도 않은 채 묵살시켜 버렸으니 본 종단의 생명과 운명은 이미 명멸 직전이라고 생각되었다”고도 했다.

청담 스님의 종단탈퇴 선언은 영암 총무원장을 중심으로 한 집행부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선학원 출신 수좌들은 청담 스님의 탈퇴와 관련해 9월1일 선학원에서 ‘전국비구승대회’를 열겠다고 예고했다. 이들은 청담 스님의 종단탈퇴를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승려대회를 통해 △청담 스님의 탈퇴경위 청취 △비상사태 수습방안 대책마련 △종단 정화 진전 상황 재검토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맞서 총무원은 전국 본말사에 공문을 발송해 “비구승대회는 총무원과 무관한 것이며 참석하지 말 것”을 통보했다. 영암 스님으로서는 스스로 종단 탈퇴를 선언한 청담 스님 일로 승려대회까지 열겠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무렵 극심한 혼란을 겪던 종단은 안정기로 돌아섰다. 종단의 발목을 잡던 채무문제가 해결됐고, 종단의 숙원사업이었던 조계사 불교회관 건립불사를 비롯해 중앙교육원 설치 등 7대 종단중흥불사계획도 발표된 상태였다. 청담 스님이 제안한 ‘종단유신재건안’의 기초가 된 종단 3대사업도 역경·도제양성·포교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청담 스님이 종단 탈퇴를 선언할 만큼 위기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언론은 청담 스님의 종단 탈퇴 선언 배경을 두고 해석이 분분했다.

청담 스님이 밝힌 것처럼 자신이 제안한 ‘종단유신재건안’을 중앙종회가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지만, 일각에서는 청담 스님이 “종단을 맡겨 달라”는 공개제안을 중앙종회가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경향신문, 1969년 8월13일자)

제2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1969년 7월7일 총무원회의실에서 열린 20회 종회에서는 영암 스님의 사표수리여부가 논의됐다. 1967년 8월 막대한 채무 등 종단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총무원장에 취임한 영암 스님은 종단이 안정되자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며 번번이 사의를 표명했다. 20회 종회를 앞두고도 영암 스님은 사의를 밝힌 상태였다. 이문제가 정식 안건으로 상정되자 장로원장 청담 스님은 돌연 “종단을 나에게 맡겨 달라. 여러분들이 감시해 발전이 없으면 제명해도 좋다”고 발언했다. 장로원장의 돌출발언에 종회는 술렁였다. 일부에서는 장로원장의 뜻을 받들어 모시자는 주장이 나왔고, 총무원장의 사표를 반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개진됐다. 긴 논의 끝에 종회는 총무원장의 사표수리여부를 무기명비밀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재석의원 37명 가운데 찬성 12표, 반대 22표, 기권 1표, 무효 1표로 영암 스님의 사표는 반려됐다.

영암 총무원장의 유임이 결정되면서 총무원장을 직접 맡아 종단을 운영해보겠다는 청담 스님의 의지도 꺾이게 됐다. 청담 스님으로서는 ‘종단유신재건안’에 이어 “종단을 맡겨 달라”는 요구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종정까지 역임했던 청담 스님이 종단 문제를 내부에서 해결하지 않고 세속사회를 향해 극단적인 탈퇴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당시 ‘큰스님’으로서 취할 태도였는지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가 필요해 보인다.

청담 스님의 탈퇴선언으로 불거진 종단 혼란도 총무원장 영암 스님이 풀어야 할 과제였다. 영암 스님은 8월26일 총무원 집행부와 승려대회 개최를 주장하는 서운, 대의 스님 등 2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중진회의를 열고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영암 스님은 승려대회를 개최할 경우 종단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승려대회 측은 강행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양측은 8월30일 비상중앙종회를 열어 대책을 마련하기로 합의하는 선에서 물러섰다. ‘대한불교’(1969년 9월7일자)에 따르면 8월30일 열린 비상종회에는 중앙종회의원뿐 아니라 교구본사주지들도 참석했다. 9월1일 승려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수좌 500여명도 방청석을 가득 메웠다. 수좌들은 영암 스님을 비롯한 총무원 집행부의 총사퇴를 요구했다. 수좌들의 실력행사로 중앙종회는 정상적인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휴회와 속개가 반복됐다. 결국 중앙종회는 9월1일 회의를 속개해 영암 총무원장 등 집행부의 총사퇴와 청담 스님의 장로원장 복귀를 결의했다. 이어 새 총무원장에 월산 스님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 영암 스님은 그렇게 내몰리듯 물러났다. 부도 위기에 내몰린 종단을 구했고, 총무원의 행정체계를 개편해 종무행정의 안정을 이끌었던 영암 스님이 청담 스님의 종단 탈퇴논란으로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한 채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것은 종단으로서도 뼈아픈 일이었다.

이후 영암 스님은 1970년 3대 중앙종회의원을 거쳐 1974년 9월 4대 중앙종회의장으로 선출됐다. 이 무렵 종단은 다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고암 스님에 이어 제5대 종정으로 추대된 서옹 스님은 종단운영 권한을 두고 총무원장 경산 스님과 갈등을 빚었다. 서옹 스님은 종정중심제를 내세웠고, 경산 스님은 ‘종무행정은 총무원장이 책임져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양측은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나 제주 관음사 주지인사 문제에 이어 경산 스님이 대성암 토지불법매각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힘의 균형은 서옹 스님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9월26일 경산 스님의 사직서를 수리한 서옹 스님은 10월7일 서암 스님을 제10대 총무원장에 임명했다. 당시 종헌은 “총무원장과 각 부장은 중앙종회에서 선출해 종정이 임명”하도록 규정했지만, 서옹 종정은 비상사태라는 이유로 직권으로 처리했다. 서옹 스님이 내세운 종정중심제의 서막이었다.

서옹 스님은 한발 더 나아가 1975년 12월1일 제42회 중앙종회에서 강력한 종정중심제를 예고하는 종헌개정안을 추진했다. 이날 발의된 종헌개정안은 총무원장을 종정이 지명하고 중앙종회 동의로 뽑도록 했으며, 총무원 각 부장은 총무원장의 제청으로 종정이 임명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총무원장과 각 부장의 임기 4년 규정도 삭제해 종정이 언제든 총무원장과 각 부장을 바꿀 수 있도록 했다. 감찰원은 규정원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규정원장과 부장, 규정위원도 종정이 임명하도록 했다. 행정과 사법, 입법으로 나뉜 종단 구조에서 행정과 사법부의 수장을 모두 종정이 지명하고 임명하도록 한 개편이었다.

4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서옹 스님은 42회 중앙종회에 참석해 종헌개정안을 신속히 처리해 줄 것을 당부했다. 서옹 스님은 “(그동안) 우리 종단은 분열과 분규로 국민 총화에 힘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가져온 것을 참회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종단이 체계 있고 일사불란한 체제로 화합되어 일할 수 있도록 종헌을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종정을 중심으로 종단이 일사불란하게 운영되도록 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종정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예상됐다. 이날 중앙종회에서도 이에 대한 우려가 쏟아졌지만, 서옹 종정의 강한 요구로 개정안의 일부 내용을 수정하는 선에서 통과됐다. 그러나 특정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그에 따른 부작용도 항상 뒤따르기 마련이다. 강력한 종정중심제로의 개편은 얼마되지 않아 조계종이 조계사와 개운사 총무원으로 양분되는 배경이 됐다.

이런 가운데 10대 총무원장 서암 스님이 임기 2달을 채우지 못하고 스스로 사퇴했다. 서옹 스님은 서암 스님을 대신해 바뀐 종헌에 따라 당시 종회의장 영암 스님을 지명했다. 혼란한 종단 상황을 안정시킬 적임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암 스님에게는 썩 내키지 않는 자리였다. 권한도, 임기조차 보장되지 않는 총무원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암 스님은 중앙종회로부터 새 총무원장으로 인준을 받을 때도 “종정스님이 지명하시고 대중이 명령하시니 빠져나갈 길이 없어 부득이 맡겠다”며 “그러나 개정된 종헌에 총무원장의 임기규정이 없으니 하루만 하고 나가도 크게 문제될 바 없어 가벼운 마음으로 수락하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영암 총무원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종단은 안정을 찾았다. 영암 스님은 취임과 동시에 군포교에 역점을 뒀다. 특별분담금을 적립해 군법당 건립과 군법사단 지원, 승군단 조직비용으로 활용했다. 1976년 5월6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조계종은 사상 처음으로 서울 여의도 5.16광장에서 100만 불자가 참여한 가운데 봉축법요식을 열었고, 이날 밤에는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8km에 이르는 10만 연등이 불을 밝히는 긴 제등행렬을 진행하기도 했다. 종단이 안정되자 영암 스님은 다시 총무원장에서 사의를 표명했다. 종정 서옹 스님은 거듭 만류했지만 영암 스님은 ‘종단이 안정되면 언제든 총무원장직에서 내려오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76년 10월 총무원장에서 사퇴한 영암 스님은 이후 봉은사 주지, 동국대 이사장 등을 맡으며 사찰과 학교행정을 일신했다. 봉은사 주지시절에는 7년간의 노력 끝에 망실된 봉은사 옛 땅 2만여평을 되찾아 전통사찰로서 위상을 세웠고, 동국대 이사장 시절에는 경주 분교 설립을 비롯해 역경사업의 활성화를 위해 역경원을 별도의 법인으로 재출범시키기도 했다. 소임을 맡을 때마다 종무행정을 혁신한 결과였다.

영암 스님이 봉은사 주지시절 총무를 맡았던 밀운 스님(전 원로의장)은 “영암 스님은 공금과 사비를 구분해 어떤 일이 있어도 공금에는 손을 대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철저한 분이셨다”며 “종단이 어려움을 겪으면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헌신하면서도 그 일이 마무리되면 언제든 그 자리에서 미련 없이 떠났던 분이다. 수행자의 표상이 될 만 한 분”이라고 회고했다.

그렇게 위기 때마다 총무원장을 맡아 안정을 이끌었던 종단의 ‘구원투수’ 영암 스님은 1987년 6월3일 봉은사에서 세수 81세, 법납 64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38호 / 2018년 5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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