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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라오콘과 고행상

기자명 주수완

고통의 극한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한 동서양 대표 조각품

▲ 라오콘 군상, 높이 208㎝, 로마 바티칸 미술관, 기원전 2세기~기원후 70년경 추정.

바티칸 미술관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걸작은 ‘라오콘(Laokoon) 군상’이다. 라오콘은 트로이 전쟁 당시 트로이의 왕족이자 저명한 신관이었다. 트로이를 함락시키기 위해 그리스 연합군 측의 율리시즈가 제안하여 목마를 만든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때 그 계략을 알아차리고 이 목마를 트로이 성 안으로 들여와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목마를 향해 창을 던진 사람이 바로 라오콘이었다. 그러나 계략이 들통 나지 않게 하려고 그리스 편에 있던 포세이돈 신이 거대한 뱀 두 마리를 보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휘감아 죽게 했다. 트로이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말하자면 충신인 라오콘을 신이 관여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했다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티칸 미술관 ‘라오콘 군상’
트로이 목마에 창 던진 인물

그리스편이던 포세이돈 신
뱀을 보내 아들과 함께 죽여

1506년에 포도밭에서 발견
기원 전후 제작품으로 추정

뱀에 감겨 죽기 직전의 고통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표현

비극의 극한에 처해 있지만
오히려 아름다움이 느껴져

파키스탄 라호르의 고행상
피골상접한 부처님의 모습

고통의 극한에 처해 있지만
움푹 파인 눈은 지혜로 빛나

나아가 트로이 사람들은 라오콘이 신의 저주를 받아 죽은 이유가 바로 아테나 여신에게 바쳐진 제물인 트로이의 목마에 감히 창을 던졌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때문에 더욱 극진히 목마를 성 안으로 모셔 들여왔다고 하니 트로이의 멸망은 신들에 의해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까지 인간의 일에 관여하는 옹졸한 신들이라니 어이가 없다. 여하간 이 라오콘과 두 아들의 죽음을 묘사한 상이 바로 바티칸 미술관의 ‘라오콘’인 것이다.

이 작품은 1506년,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의 포도밭을 일구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고미술 수집에 관심이 많았던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즉시 건축가 상갈로와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그 조각이 어떤 작품인지 확인하고 올 것을 지시했다. 작품을 접한 미켈란젤로는 고대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했고, 교황은 그 평가를 받아들여 이를 구입함으로써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아직 젊었던 미켈란젤로가 ‘라오콘’에 감동을 받아 그의 작업에도 반영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이 작품이 원래는 미켈란젤로가 만들어 묻어둔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

▲ 석가모니 고행상, 시크리 출토, 높이 84㎝,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 간다라 2세기경.

그러나 실제로는 로마시대의 학자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A.D.23~79)가 저술한 ‘박물지’에서 극찬한 로도스 섬에서 만들어진 라오콘 상으로 추정되었다. ‘박물지’에 의하면 하게산드로스, 폴리도로스, 아타나도로스라는 세 명의 조각가가 합작으로 만든 ‘라오콘’이 당시 최고의 조각품으로 칭송을 받았는데, 이를 네로 황제가 구입해 로마로 옮겨왔다고 했다. 바로 이 작품이 제국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재발견된 것이다. 여하간 플리니우스 시대에 이미 이 작품이 존재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는 구체적으로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기록에 남겨두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도 이를 고대 그리스의 작품으로 평가했는데, 기원전 2세기부터 플리니우스 당시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전문적인 영역이므로 차치하고, 작품 자체를 들어다 보면 왠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밀려온다. 언뜻 너무나 아름다운 작품인데, 그 내용은 끔찍하고 징그럽다. 또 무언가 표현은 강렬한데, 등장인물들은 속수무책으로 뱀들에게 당하고 있다. 너무나 우아하지만 알고 보면 격정적인 비극이다. 한편으로는 슬픈가 하면 그것만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담담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작품을 플리니우스나 미켈란젤로, 나아가 레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극찬한 이유는 이 작품에 너무나 많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겨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맹렬하게 이들을 휘감아 입을 벌려 라오콘의 허리춤을 막 물려고 하는 뱀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나의 허리에 통증이 올 것 같은 끔찍함이 밀려온다. 마치 작가는 보는 사람들이 어디에 물리면 가장 아플 것 같은지 정확히 집어내기라도 한 것 같다. 그러기에 이들 뱀들이 몸을 휘감아 도는 것으로부터 악착같이 벗어나려는 세 부자의 몸부림에 나 역시 그러할 것이라는 철저한 공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왠지 그 몸부림은 기대와 달리 허무하게 끝날 것만 같다. 이미 라오콘의 오른쪽(향좌)에 위치한 아들은 뱀에 휘감겨 공중에 힘없이 떠있는 것 같은 자세인데, 옆구리를 뱀에게 물려 이를 떼어내려고 하지만, 몸은 이미 모든 것을 뱀에 의지하고 있고, 얼굴은 실신하기 직전이다. 그의 몸부림이 덧없어 보이는 이유이다. 그의 왼쪽에 위치한 아들은 뱀이 그의 다리를 휘감자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마치 양말을 벗듯이 어떻게든 벗어던지고 싶지만, 뱀은 매우 강력히 그를 휘감고 있다. 그 아들은 공포에 휩싸여 구원을 요청하듯 아버지를 바라보았으나 아버지마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는 그만 완전한 좌절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기 직전의 표정이다. 유일하게 이 아들만 아직 뱀에 물리지 않았지만, 곧 자신에게도 다가올 사태를 알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도 감정이나마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다.

▲ 맥없이 축 처져 공중에 매달린 듯하면서도 뱀을 떼어내기 위한 몸부림은 덧없는 인간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리고 아들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절규하는 라오콘.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신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신들을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식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정신이 나간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열렬히 뱀과 사투를 벌이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한 것 같다. 무엇보다 이 라오콘을 보며 느끼는 모순된 감정이란 어떻게 이 끔찍한 고통이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는가하는 궁금증이다. 거기다 비극적 장면을 억지로 미화시킨 것이 아니라 무척이나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마치 인간은 이러한 고통 속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하는 듯하다. ‘타란텔라’라는 춤이 독거미에게 물렸을 때 춤을 춰야만 해독된다고 해서 시작되었다는 설화처럼, 살기 위한 라오콘 부자의 당연한 권리인 몸부림은 마치 춤처럼 승화되어 있다.

어쩌면 이처럼 아름다운 자태야말로 이 작품을 굳이 비극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틀조차 시시하게 만들어 버리는 원인인지 모르겠다. 여기서는 신들이 뱀을 보내 인간을 벌하고 있지만, 우리는 어쩌면 이미 늘 운명이 보낸 불행과 불운이라는 보이지 않는 뱀에 시달리는 하찮은 인간일지도 모른다. 서로 뿔뿔이 제각각인 자세이지만, 이 불운의 뱀이 그나마 이들 모두를 칭칭 감으며 하나로 이어주고 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그러나 이 아이러니야말로 라오콘이라는 특수한 사건을 각자에게 닥친 불행을 극복하고자 발버둥치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삶의 반영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극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요인이다. 라오콘은 마치 그 끝이 비극이고 허무일지라도 살아있음으로서 아름답다는 것을 절절히 보여준다.

▲ 구원해줄 것으로 믿었던 아버지마저 뱀에게 물리기 직전인 것을 발견한 아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런데 필자는 오래전 파키스탄 라호르의 박물관의 한 간다라 불상에서 이와 유사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작품은 마치 라오콘처럼 처음에는 강렬한 고통을 전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부러 고통을 자초한 고행을 묘사한 상이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께서는 참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고행을 통한 수행을 6년간 하셨다. 그 결과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변하셨는데, 그야말로 죽음 직전의 극한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라오콘은 신이 내린 운명적 고통이고, 고행상은 스스로 선택한 고통이라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는 것 같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석가모니의 출가가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불행과 고통 때문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그 고행도 결국은 스스로 찾아가셨을 뿐, 인간은 원천적으로 고통과 함께 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고행상에는 육체적인 격렬함은 없지만, 대신 정신적인 격렬함이 담겨있다. 자세히 보면 허리를 꼿꼿이 세운 것이 아니라 약간 오른쪽으로 쓰러질 듯한 자세로 앉아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안간힘을 써서 쓰러지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육체적 힘이 아니라 정신적 힘에 의한 것임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피골이 상접한 몸에서 어떻게 더 이상 육체적 힘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그 대신 깡마른 몸에 붙어있는 미세한 근육들이 마지막 남은 석가모니의 정신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석가모니의 얼굴은 기운이 없어 일견 멍해 보이면서도 움푹 파인 눈 안에서는 번득이는 눈동자가 살아있으니, ‘불본행집경’에서도 ‘깊은 우물 속에 비친 별’이라고 묘사한 이 모습은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음을 상징한다.

▲ 라오콘의 오른팔은 나중에야 발견되어 붙인 것인데,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팔이 저렇게 굽어있었을 것으로 예측했었다고 한다.

고행상 역시 인간이라면 지닐 수밖에 없는 삶의 고통을 그 극한까지 밀어붙여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두 작품 모두 인간의 원천적 고통을 오히려 적나라하게 까발려놓고 나니, 희한하게도 아름다움에 도달했다. 고통이 없다면 해탈도 없으니, 라오콘과 석가모니의 고통이 마냥 슬프지 않은 것은 그것이 곧 우리의 모습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 때문이리라.

참고로 원래 라오콘이 발굴되었을 때는 오른팔이 부셔져 없는 상태였다. 다만 약간 남아있는 어깨부분을 보고 대부분 팔을 하늘로 뻗은 모습일 것으로 짐작했지만, 미켈란젤로만은 근육의 미세한 묘사를 보고는 팔을 구부린 모습이었을 것이라 추측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결국은 오른팔도 마저 발견되었는데, 역시 미켈란젤로의 추측대로 구부린 모습의 팔이었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미켈란젤로보다 훨씬 오래전에 그런 섬세한 근육묘사를 할 줄 알았던 조각가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오른팔을 뻗고 있는 라오콘 복원품도 만들어졌는데, 부질없이 손을 뻗어 하늘을 향하는 팔보다는 스스로에게 향하며 조금이라도 뱀을 떼어내려는 필사적인 굽힌 팔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려는 라오콘에게 역시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39호 / 2018년 5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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