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처럼 져버린 딸 생각하며 생전예수재처럼 인생을 살다
벚꽃처럼 져버린 딸 생각하며 생전예수재처럼 인생을 살다
  • 법보신문
  • 승인 2018.05.1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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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신도회 회장상 - 박돈우

▲ 그림=근호

“우리 딸, 아빠랑 발가락까지 닮았네!”
“어? 정말 그러네, 아빠 딸이니까 그렇지. 헤헤헤.”

중학교 졸업을 앞둔 12월 초
백혈병으로 홀로 떠난 딸아이

견디기 힘든 그리움과 슬픔에
이대로 숨이 멈추기만을 기도

마지막 3000배 올리고 싶어
수행공동체 아비라 카페 찾아

해인사 백련암서 3000배 이후
법명과 화두를 받아 수행 시작

불교대학서 본격적 공부하며
포교사·전문포교사 품수받아

군법당·요양원 봉사활동하며
딸 먼저 보낸 아빠의 삶 회향


행복이 때론 비수처럼 꽂히기도 한다. 딸아이 또래와 같은 아이들을 보면 더욱 그랬다. 딸과 도란도란 나눴던 추억이 파도처럼 덮친다. 딸아이와 행복했던 시간들이 바늘처럼 가슴을 찌른다. 잊을 수 없는 그 순간순간들이 파편처럼 떠오르면 슬픔은 정말 어쩔 수 없다.

슬픔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한여름, 시야를 순식간에 가리는 폭우처럼 갑작스러웠다. 의사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거센 빗줄기 같았다.

“의사의 한계를 느끼고 이런 말을 할 때가 가장 힘듭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의사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뭔가 다른 희망적인 말을 끝에 해주리라 굳게 믿고 싶었다. 아니,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느라 의사의 말을 제대로 듣기 어려웠던 것 같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파릇파릇했던 딸아이였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12월 초였다. 딸아이는 급성골수성 백혈병이란 진단을 받았다. 1년6개월 동안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다. 무균실 병동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어린나이에 힘겨운 투병생활을 버텼던 딸아이였다. 그런 딸아이가, 봄이 무르익는 오후에 지는 벚꽃처럼 혼자 긴 여행을 떠났다.

딸은 내게 살아갈 희망과 의미였다. 빛이었으며 내 분신이었다는 사실을 딸의 빈자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후회와 자책이 나를 괴롭혔다. 삶은 그저 성가신, 너무나 고통스러운 의미 없는 무엇이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삶의 의지는 물론 마음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려 흩어졌다. 견디기 힘든 슬픔과 그리움의 시간이 계속됐고, 몸도 지쳐 체력은 갈수록 바닥이 났다. 조금만 빨리 걸어도 몇 발자국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차라리 이대로 숨이 멈춘다면 딸아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어느 날 문득, 좀 더 체력이 떨어지면 부처님께 절도 할 수 없겠구나 싶었다. 틈틈이 혼자 해오던 3000배가 생각났다. 하지만 바닥난 체력으로는 혼자 3000배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처님께 마지막일지도 모를 3000배를 올리고 싶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무작정 누군가와 절을 같이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성철 스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아비라 카페를 알게 됐다. 매월 셋째 토요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예불 전까지 3000배를 하는 수행공동체였다. 포항과 대구 도반의 도움으로 해인사 백련암과 인연을 맺었다. 백련암을 둘러보고 지심귀명례를 따라하며 3000배를 하던 날이었다. 관음전을 가득 채운 분들의 뜨거운 신심과 열정이 내 지친 마음과 몸을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포기하지 않고 3000배를 마친 후 심공이란 법명과 삼서근이란 화두를 받았다. 법명을 주신 스님께 “스님! 마음을 비워야 합니까?” 물었을 때 선문답처럼 “예. 너무 늦게 왔습니다” 하시던 말씀이 그날 새벽, 서늘한 바람처럼 기억난다.

꾸준히 3000배에 참가했지만 끝날 때마다 너무 허전했다. 계속되는 알 수 없는 허전함과 그 허전함의 원인을 풀지 못해 답답했다. 법보신문 기사에 실린 봉암사 스님이 순례단에게 했던 소참법문에 답이 있었다.

“법당에서 소원을 비는 기도는 초급입니다. 부처님께 중생 제도 그만두시라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자신 스스로가 깨달음 성취하고 당신을 대신해서 중생을 제도 하겠노라 서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해인사 백련암 첫 3000배 회향 후 받은 법명과 문답에 이미 그 해답이 있었지만 알지 못했던 것 같다. 3000배와 소참법문은 그렇게 쓰러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어찌된 영문일까. 불교대학과 포교사 입문은 어느 날 우연(?)처럼 찾아왔다. 하루하루 직장생활로 바쁘게 보내던 날로 기억한다. 죽림사 앞을 지나게 됐다. 포항 불교대학 신입생 모집공고를 보자마자 바로 접수하고 그 해 2012년 봄에 입학했다. 무언가에 이끌린 듯 일사천리였다.

대흥사에서 일요법문으로 불교 전반에 대한 교리를 들었으나 되새기지 못하고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던 시기였다. 입학보다 앞서서 2002년에 죽림사 자성 스님께 수계를 받는 인연이 있었으나 공부 인연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정식으로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등록한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교리는 막연했고 강의가 끝나면 다시 책을 펴지 않는 날이 많았다.

불교대학을 졸업하면 끊어질 공부가 걱정이 됐다. 포교사를 발심한 이유도 부처님 가르침을 끊임없이 배우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포교사 시험 대비반에 합류했다. 딸아이를 먼저 보낸 텅 빈 마음에 부처님이 걸어 들어오길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불교대학 2년을 포함해 10년은 더 공부하고, 특히 초기경전 모두를 깊이 있게 읽어 보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포교사를 시작하면서는 전문포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전문포교사 품수를 받은 해에는 많은 고민 끝에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입학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부처님 공부라면 부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신다는 어느 학인스님 말씀이 큰 힘이 됐다.

스님 외에도 내게 힘이 되는 인연들이 있다. 특히 죽림사에서 만난 주련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글귀의 반만이라도 실천하고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진정한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전생을 알고 싶은가 금생에 살고 있는 이 모습이요, 내생을 알고 싶은가 금생에 하고 있는 그 모습이니라.”

여러 인연으로 불연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서 포교사 품수를 받고, 군포교팀에 배정돼 1주일에 두 번씩 전법을 시작했다. 장병들에게 할 설법을 적당한 분량으로 시청각 가능하도록 자료를 만들었고, 눈빛을 반짝이며 듣거나 관심을 보이는 장병이 있으면 절로 힘이 났다. 최선을 다해 열정을 쏟았고, 법회에 사용하는 법회집을 책자로 만들어 모든 의식을 한글로 바꾼 일은 큰 보람이었다.

지금은 염불포교 황련팀에서 활동 중이다. 장엄염불 외에도 매월 넷째 주 일요일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80여명의 어르신들이 머무는 노인요양시설 정애원을 찾는 것이다.

정애원 강당으로 향하면서 낯익은 어르신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드리면 대부분 말 대신 손을 흔들거나 저녁노을 같은 잔잔한 미소를 보내신다. 반갑다며 내미는 두 손을 잡으면 낮은 온기와 함께 사람을 향한 그리움을 함께 느낀다. ‘난, 아빠로서 딸아이에게 온기를 전했던가.’

어르신들과 주변 모든 이들이 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길 기원하는 법회를 연다. 노래자랑, 웃음치료, 윷놀이, 백중 음식공양, 기저귀 후원 등 여러 활동에 모두 동참하고 있다. 황련팀과 정애원이 봉사로 인연을 맺은 지도 15년이 넘었다. 크고 작은 장애와 노쇠해지는 몸과 마음은 머잖아 미래 내 모습일 수 있다. 순간을 살지만 영원히 사는 것처럼 욕심내며 사는 현재를 경책하고 있다. 생전예수재 하듯 어르신들 뵙는 날이기도 하다.

어째서일까. 이것도 인연일까. 염불봉사도 하고 있다. 사진으로 망자의 모습을 처음 대하고 마지막 가시는 마음을 위로하고 보내드리는 일이다. 살아서 이별도 아픈데 가족이나 그 모든 것들과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하는 마음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때론 염불이 자연스럽고 때론 간간히 막히고 땀에 젖기도 한다. 염불봉사를 할 때 단순히 경전을 읽는데 치우치거나 만족한다면 듣기만 괜찮은 염불에 그칠 수 있다. 경전의 뜻을 마음으로 되새겨 듣는 이들이 제불보살님의 감응과 가피를 받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려 노력하고 있다. 염불봉사를 좀 더 여법하게 하고자 팀에서는 전통방식을 따른 아미타번과 인로왕번도 구입했다. 영단 좌우에 설치해 영단을 장엄했고, 불보살님을 모시고 의식을 진행하면서 의례의 참뜻을 되새기고 있다.

자기를 속이지 않고[不欺自心] 자기를 바로 보는 포교사 생활을 하고 싶다. 나는 먼저 보낸 딸아이의 아빠다. 나는 부처님의 제자다. 밝음이 오는 새벽, 향을 사르고 좌복을 편다. 부처님 발가락이라도 닮아가려고 한다. 아빠와 딸아이의 발가락이 닮은 것처럼.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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