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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잃은 상실감도 연쇄부도도 불자다움으로 극복

기자명 법보신문

불교방송 사장상 - 허평욱

▲ 그림=근호

일요일 오전 9시. 육군 제3탄약창 호국창수사 법당 명종 소리를 시작으로 삼귀의와 오분향례, 헌향진언을 집전하던 목탁 소리의 여운이 가실 즈음, 100여 장병들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입김과 함께 폭발음처럼 터져 나오는 지심귀명례 예불문 소리에 법당의 창문이 떨린다. 장병들의 힘찬 독경소리에 집전포교사의 목탁 소리는 여름날 모기 소리만큼이나 외소하다. 보현행원과 사홍서원, 산회가를 부른 후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는 것으로 법회는 마무리된다. 100여 장병들이 하나가 되어 삼배를 올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엄할 뿐 아니라 무릎과 마룻바닥 닿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에 비견될 만큼 우렁차다.

아버님 어머님 병환으로 별세
의욕 상실과 무기력증에 빠져
잘못된 보증 연쇄부도도 맞아
실의에 빠져 6~7년 술로 보내

만일사 관세음보살 친견한 뒤
스님께서 준 천수경·반야심경
옮겨 적으면서 ‘참회의 눈물’

70일 공부해 포교사 고시 합격
연수 겸 봉사로 맺은 군포교
군포교팀 소속돼 포교에 매진
진흙에 물들지않는 연꽃 발원

나와 불교와의 인연은 신심 장한 어머니에서 비롯됐다. 절 마당을 밟기 시작한 것이 내 나이 6살 때다. 그때는 논밭을 지나 산길로 두 시간 정도 걸어 다녔다. 절로 향하는 길, 어머니는 ‘어린 너라도 데리고 다니니 적적하진 않다’고 했다. 어느 해 겨울, 절에 거의 도달했는데 응달진 모퉁이 길이 얼음으로 뒤덮여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버선을 벗으시곤 내게도 양말과 신을 벗도록 했다. 그리고 당신이 들고 잡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잡아가면서 옆으로 기어 절로 향했다. 그만큼 부처님을 향한 어머니의 신심은 어린 나의 눈에도 대단해 보였다.

11살이 되니 어머니는 절에 갈 형편이 못 됐다. 쌀 한말과 양초, 향, 과일 등을 한 보따리 싸서 지개에 올려줬다. “절에 가서 할아버지스님 드리고 오너라.” 어머니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을 손아래 여동생 손을 잡고 걸었다. 어머니는 산길에 들어서면 관세음보살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그러면 짐승들이 도망가고, 무서움도 사라진다고 했다.

어째서일까. 군대에서도 불연이 계속됐다. 부대에는 교회만 있고 법당이 없었다. 교회서 생활하는 스님의 인솔로 거의 한 시간 거리의 부대 밖 절에서 하는 법회에 갔다. 흰쌀밥과 떡, 그리고 멀었던 거리 외엔 기억이 없다. 지금까지 쓰는 법명 ‘상운’이 군복무 시절 새긴 불연이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 부푼 꿈과 살아갈 목표를 세우려고 했는데….제대 후, 삶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아버지는 말기 위암이었다. 시한부 삶을 살았다. 계획 중이던 모든 일을 접었다. 서둘러 결혼했다. 110일 정도, 아버지는 며느리의 밥상을 받고 세연을 끊었다. 왜 그랬을까. 종교란에 불교를 적었다. 무작정 앞만 보고 생을 살았다. 하늘의 명을 안다는 지천명, 그 나이를 한 해 앞둔 49살 그해 가을 어머니도 급성폐렴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움이 엄습했다. 삶의 의욕을 상실했고, 무기력증에 빠졌다. 가내공업 수준의 사업 관리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잘못된 보증으로 연쇄부도를 맞았다. 노후대책으로 준비하던 원룸 건물과 유산으로 받은 부동산까지 몽땅 털어 넣었다.

자괴감과 자책감에 시달렸다. 실의에 빠져 6~7년 술로 보냈다. 몸에 각종 성인병이 기생했다. 58살에 심장 혈관에 이상이 생겨 조형술을 받았다. 59살엔 당뇨성망막병증으로 오른쪽 눈을 수술했지만 석 달마다 재발해 추가 시술을 받아야만 했다. 1년이 지나니 왼쪽 눈은 실명에 이르렀다. 오른쪽 눈마저 변변치 않아 운전을 할 수 없게 됐다. 돋보기에 의지하지 않고는 글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게 됐다.

조금씩 몸뚱이는 망가져갔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망가질까. 정신까지 피폐해졌다. 만일사 관세음보살을 찾아갔다. 물 한 컵 들고 툇마루에 앉으니 방문이 열렸다. 스님이 안으로 들어오라 청했다. 그리고 차를 따랐다. 찬찬히 사연을 듣던 스님이 흘러가버린 강물과 같다고 했다. 돈이란 더울 때 땀을 식혀준 바람일 뿐이라고 했다. 2011년 1월1일, 만일사 부처님과 그 스님에게 세배를 올렸다. “스님,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알려주십시오.”

스님이 준 책 한 권을 펴보니 ‘반야심경’과 ‘천수경’이 수록돼 있었다. 다음날부터 A4 용지에 옮겨 적었다. 걸을 때나 버스 안에서 이동 중일 때나 서 있을 때나 외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생전에 “애비도 이제 반야심경하고 천수경 배워야지” 했던 말씀을 잊을 수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부처님오신날 법회가 끝났다. 어머니와 친분 있던 보살이 어깨를 토닥여줬다. “산소에 가봐야겠어요. 떡과 과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불단에서 내려오는 떡과 과일을 봉분 앞에 차렸다. 막걸리도 두어 잔 따랐다.

무릎 꿇고 앉아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암송했다.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이 바지를 적셨다. 하지만 홀가분했다. 해질녘 산을 내려왔다.

이때부터 ‘반야심경’ 뜻풀이에 매달렸다. 옥편을 펴놓고 한 자 한 자 뜻을 풀었다. 문장으로 연결이 안 됐다. 어느 스님의 해설서 등을 사서 읽어도 갈증만 면하는 정도였고 개운하지 않았다. 눈에 넣어 마음에 새기겠노라 다짐했다. 2011년 12월24일, 그때부터 사경을 시작했다.

달력 뒷장에 사인펜으로 100원 동전 크기로 글자를 썼다. 눈이 변변치 않아 돋보기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썼다. 각원사불교대학에 입학한 뒤부터는 새벽 3~5시 기도가 좋다고 해서 새벽 2시30분에 일어나 사경했다. 발원문과 축원문을 작성하고 5시에 새벽예불을 올렸다.

불교대학에서 교리를 배우고 나니 어느새 절에 가면 재미있었다. 불자로서 자부심도 생겼다. 불자다운 불자가 됐다는 환희심이 가득했다. 늦지 않게 부처님 가르침을 배웠다면 번 돈도 의미 있게 회향하고 건강 역시 잃지 않았을 터이다. 매주 목요일 오전에는 불교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오후엔 독거어르신 급식봉사에 참여했다. 부처님 법을 배우는 일로 즐거운 나날이었다. 한 번은 송림사와 미륵사지 순례를 마치고 논산 신병훈련소 호국연무사를 찾았다. 스님의 강의가 인상적이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군법당에서 부처님 법을 전해주는 봉사자가 되리라 마음을 굳혔다. 불교대학 선배이자 도반에게 포교사고시 소식과 응시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70일 동안 모든 신경을 포교사고시에 쏟아 부었다.

비로소 합격통지를 받았다. 연수 겸 봉사활동으로 3개월 동안 육군 제3탄약창 호국창수사 법회에 매주 참석해 법당 출입문 앞에서 섰다. 합장하고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하고 법당에 입실하는 장병들이 맞이했다. 그때 익힌 인사 방법이 나만의 인사법이 됐다. 면접을 거쳐 포교사 품수를 받은 뒤 포교사복을 입었다. 그 사진이 붙은 출입증을 목에 걸고 매주 일요일 위병소를 지나 호국창수사에 들어선다. 내 인사법을 적극 활용하면서. “탈모하시고 발 모으시고 합장하시고 반배하세요.” 좌복에 앉기 전 삼배 올리는 장병을 볼 땐 보람을 느낀다.

현재 대전충남지역단 동부 군포교 2팀이다. 총무소임을 맡고 있다. 금요일마다 군종병에게 연락해서 일요일 법회 참석 인원을 파악하고 피자, 햄버거, 샌드위치 등 간식을 주문한다. 토요일이면 강사와 법문을 할 스님의 참석여부를 재차 확인한다. 포교사들에게도 문자를 보낸다. 태고종 도광사 도공 스님이 오면 장교식당을 빌려 짜장면이나 떡볶이를 조리한 뒤 장병들에게 제공한다. 이때는 포교사 내외가 모두 동참해 조리를 도와주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일은 불교, 가톨릭, 개신교 등 3개 종교와 상관없이 합동 간식을 먹는 날을 만들기도 했다. 봄과 가을 떡볶이를 3500인분씩 만들기도 했다. 걷는 길이 다를 뿐 종교를 갖는 목적과 목표는 하나라는 것을 장병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행사였다. 크리스마스에 아기예수 탄신을 축하한다는 꽃바구니를 교회와 성당에 포교사 일동 명의로 보내는 등 부대 내 종교화합에도 신경 쓰고 있다. 토요일 오후를 이용해 부대 내 모든 장병들이 법당에 모여 영화를 한편씩 보고 갈 수 있도록 영상물이 있었으면 좋겠다. 꼭 이뤄지리라 믿는다. 불자장병들 간식과 운영비를 후원해주는 천안사암연합회장 일로 스님과 총무 법연 스님, 각원사불교대학 학장이자 주지인 대원 스님, 창수사 지도법사인 비구니 혜남 스님, 성월사 주지 비구니 고우 스님, 도광사 주지 도공 스님에게 감사하다. 보은에 답하는 길은 게으름 없이 정진하는 것뿐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흙탕물에서도 줄기를 위로 올리며, 물 밖으로는 밝은 꽃을 피운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밝고 맑은 마음을 낼 수 있다.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실천에 옮겨야만 가능하다. 비구 아사지를 닮고 싶다. 브라만 가문 출신 사리불의 마음을 정법으로 이끌었고, 결국 사리불은 지혜제일이 됐다. 그런 포교사가 되고 싶다.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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