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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찾아온 부처님의 자비손

기자명 법보신문

법보신문 사장상 - 김갑숙

▲ 그림=근호

불교집안에서 나고 자란 나는 중매로 남편을 만났다. 결혼을 하고 보니 시댁이 기독교 집안이었다. 사촌, 그 누구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없어 온 집안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나와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유일하게 교회에 나가지 않은 사람이 남편이었다.

불자인데 기독교 집안 맏며느리
그럼에도 시아버님 제사 지극히
남편과 시아버님 산소 찾았을때
아이들과 함께 절에 가라고 허락

병명도 없이 깨질듯한 두통에
일어나지도 못하다가 꿈 속에
관세음보살님 친견하고 쾌차

아르바이트하던 고등학생 아들
오토바이 타고 배달 가던 길에
반대편서 오던 차에 치였는데도
도로에 다른 차 없어 작은 부상
가피 없었다면 오늘의 행복없어

남편도 어렸을 땐 교회에 다녔었는데 장성한 뒤엔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기독교 집안인 줄 모르고 결혼을 했다. 불교문화에 익숙한 집안에서 자란 나였지만 집안의 맏며느리이다 보니 불교에 입문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꼭 절에 가야만 부처님을 만나는 게 아니고 처처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가. 생활 속에서 부처님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며 집에서 열심히 경전을 읽고 기도정진 하고자 마음을 냈다.

21일, 100일 기간을 정해 놓고 계율을 지키고자 노력하며 기도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천수경’을 독송하고 108배, 관음정근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밥을 지으면서도 ‘천수경’을 암송하고 무엇을 하든지 “나는 불자다”라는 자부심을 되새겼다.

스님들께서 쓰신 책을 읽으면 법문 듣는 것과 같았다. 그래도 부처님께 가고 싶은 열망이 식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남편 모르게 가까운 절로 새벽기도를 다녔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절에 다니며 신심을 키워갔다. 그 절이 지금 내 원찰이 된 국방부 호국원광사다. 국방부 절이라면 군인가족만 다니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일반 신도들이 더 많다. 그렇게 갈망하고 목마르게 가고 싶었던 절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기독교 집안 맏며느리인 나는 절에 다니고 싶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괜히 가족들 마음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묵묵히 혼자 기도하기를 몇 년…. 부처님 가피였을까. 기독교 집안의 장남임에도 남편이 내게 절에 다니라고 했다. 드디어 불교에 입문하게 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돌보심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집안이었지만 맏며느리인 나는 시아버님의 제사를 모셨다. 시어머니께서는 3년 동안 반대를 하셨다. 기독교 집안에서 제사는 왜 지내냐고 하시며 반대가 심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남편과 상의해서 정성껏 제사를 모셨다. 남편도 제사 지내는 것을 원했다. 3년 후,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네게 맡겨도 되겠다.” 제사를 허락하셨다.

절에 입문하기 전 어느 날, 문득 시아버님 산소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남편, 애들과 시아버님 산소를 찾았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당신, 저 있잖아. 아이들 데리고 절에 다녀도 돼.”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자 남편이 다시 말했다.

“다음 주 일요일부터 아이들 데리고 절에 다녀와.”

그때가 우리 아들과 딸이 초등학교 2학년, 4학년이었다. 벌써 20년이 넘은 일이다. 기독교 집안 맏며느리인데도 남편의 배려와 이해로 불교에 입문해 당당하게 불자가 됐다. 시아버님 산소에 다녀온 후 시아버님께서 남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주셨을까. 그렇게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던 부처님 도량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절에 간 첫날, 일요법회에 참석했다. 스님 법문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환희심이 솟구쳤다. 왜 그렇게 환희롭던지 그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 법당의 분위기, 앉았던 자리의 위치와 감촉 그리고 불단 위 부처님의 표정….

‘잘 왔다. 기다렸다.’

부처님은 온화한 미소로 반겨주시는 것 같았다. 절에 다니는 일을 시어머님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이제 아무 걸림 없이 불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 집안에서 서로의 믿음에 중교에 대해 불만이 없었다. 한 가정의 장남인 남편이 중심이 되어 배려해주고 이해해 줘서 그랬는지 서로 다른 종교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간절하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간절히 원하고 기도를 생활화하다 보니 불보살님이 외면하지 않으셨다. 가피를 많이 받았다. 몇 년 전, 난 시름시름 원인도 모르게 몹시 앓았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서만 있어야 했다. 그리고 위장병까지 겹쳐서 음식만 먹으면 소화를 못시켰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정말 고역이었다.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 다녔지만 신경성이라고만 했지 뚜렷한 병명이 없었다.

“큰 병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만약 큰 병이라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의사선생님의 말씀은 큰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차도 없이 약으로만 의지해 하루하루 살았다. 아무런 차도가 없어 관세음보살님께 매달려 보기로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관세음보살님은 어떤 어려움도 다 들어주시리라는 믿음뿐이었다. 온통 관세음보살님만 생각했고 입으로는 쉼없이 관세음보살님을 불렀다.

그렇게 간절히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다 잠이 들었다. 꿈이었을까, 생시였을까. 하얀 옷을 입은 분이 곁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손을 내밀더니 내 옆구리에서 뱀 두 마리를 떼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뱀들이 내 몸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하얀 옷을 입은 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뱀들을 떼어내 어느 바위로 던졌다. 뱀들은 그 바위에 찰싹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며칠 동안 나를 괴롭혔던 머리 통증과 위 통증이 사라졌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몸이 날아갈 듯 가뿐했다. 지금도 그 꿈이 생생하다. 아픔이 있을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꿈에 관세음보살님의 화신인지 하얀 옷을 입으신 분이 나타나시는 꿈을 꾸면서 어려움이나 아픔이 사라졌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고 했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지만 크고 작은 몽중가피를 너무 많이 받았다.

몇 년 전,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피자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모양이다. 아들은 부모님이 걱정한다며 모르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기도 중에 갑자기 내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자꾸 불안하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면서 마음이 진정 되질 않았다. 나도 모르게 아들이 생각나서 아들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아들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불안한 마음은 더해졌다. 계속 전화를 하니 낯선 목소리가 들여왔다.

“OOO 핸드폰 아닌가요? 누구세요?”
“OOO이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가다 그만….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어요.”

오토바이 사고면 큰 사고가 아닐까. 불길함 때문에 떨리는 마음은 진정이 안 됐다. 불안함은 더해졌다. 남편과 정신없이 병원에 달려갔다. 가는 길 내내 불안했다. ‘아무 일 없을거야. 아무 일 없을거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제발 우리 아들 아무 일 없게 도와주세요.’

떨리고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진정은 됐다. 병원이 가까워지자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병원에 도착해서 아들을 보는 순간, 불보살님의 가피와 가호하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친 곳 없이 멀쩡한 아들을 봤다.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전후사정을 아들에게 들으니 더더욱 불보살님 가피와 가호하심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을 거예요. 참 이상했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가는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차가 중앙선을 넘어왔어요. 그 차가 오토바이를 들이 받았는데 몸이 붕 뜨는 게 느껴져서 ‘아, 이제 죽는구나’ 했어요. 근데 정말 다행이었어요. 퇴근 시간대라 차가 많았는데 왜 제가 떨어진 도로에 차가 한 대도 오지 않았을까요.”

아아, 또 깨달았다. 불보살님이 가피를.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고 시각이 내가 기도하는 시각과 일치했다. 기도정진을 1분 1초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기도가 깊어지면 마장이 온다고 했던가. 내게도 기도가 익어가는 과정에서 고비가 찾아왔다. 아침에 일어나는데 등이 너무 아팠다. 겨우 일어나 아침기도를 했다. 108배 절을 할 때 엎드렸다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었다. 꾹꾹 참고 천천히 108배를 마쳤는데 이번엔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내과에 갔더니 정형외과를 추천했다. 그러나 주사를 맞아도 아팠다. 출퇴근길에 걷는 것은 물론 차에 타서 앉았다 일어서는 일상적인 행동도 힘이 들고 아팠다. 한의원을 찾아가 침을 맞아 봐도 소용없었다. 절에는 가야 했다. 진통제를 맞아가며 다녔다. 봉사도 빠지지 않았다. 아프다는 핑계로 기도를 쉬진 않았다.

며칠이 그렇게 흘렀다. 퇴근하고 집에 가던 중 갑자기 손목에 차고 있던 108염주의 한 알이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세히 봐도 줄이 끊어지진 않았다. 왜 한 알만 떨어졌던 것일까. 염주알을 찬찬히 세어보니 정확히 107개 였다. 몇 번을 세어 봐도 107개 였다. 의심은 금방 접었고 피곤한 몸을 뉘였다. 다음 날 아침, 통증이 씻은 듯 나았다. 염주 한 알과 등의 통증이 바뀌었을까. 부처님이 남을 위해 살라며 가피를 주신 것이라 믿고 싶다.

가피가 없었다면 오늘의 행복한 불자의 모습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듯이 하루하루 쌓아온 기도의 공덕이라고 생각한다.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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