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이탈주민 눈물 닦아 줄 손수건이 된 삶은 부처님 선물
북 이탈주민 눈물 닦아 줄 손수건이 된 삶은 부처님 선물
  • 법보신문
  • 승인 2018.05.1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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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사단 사단장상 - 홍성란

▲ 그림=근호

11년 전의 일이었다.

포교사 첫 임무가 하나원 법회
북 이탈주민과 매 일요일 만남
소설·영화 나올법한 아픈 사연
들어주며 엄마처럼 가슴에 품어

형식 매임 없이 불교문화 전파
안타까운 죽음 발벗고 나서자
주변 스님들의 도움도 이어져
서로 공감하며 직접 가피 체험
불법 인연은 인생 최고 히트작

포교사가 되고 난후 포교사단에서 일방적으로 배치해 주던 봉사 장소가 통일부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북한이탈주민들이 한국에 입국해 정착 교육을 받게 되는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이었다.

처음엔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다. ‘북한’이라는 단어가 있어 들어가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인 것 같았다. ‘무조건 너무 좋아, 좋아. 빨리 가서 부처님 말씀을 전해야지.’ 마음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포교 현장을 가보니 만만치 않았다. 불교 법회에 오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다른 종교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불교 쪽에 봉사하는 사람들도 월 1회였고, 매주 사람이 계속 바뀌다보니 소통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면 다음 주에 알려줘야 하는데 한 달 후에나 만날 수 있으니 그때는 이미 하나원 과정을 수료한 뒤라 의미가 없었다. 하나원은 한 달에 한 번씩 입소와 퇴소를 반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에는 매주 들어오는 봉사자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의문이 들었다. ‘왜 다른 종교는 매주 빠짐없이 같은 봉사자가 오는데, 우리 불교는 못할까? 그럼 내가 해야지.’ 굳게 마음먹고 행동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매주 일요일 북한이탈주민들과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됐다.

내겐 첫 포교현장이었다. 새내기 포교사가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정말 중요한 현장이라는 것만 직감했다. 모두가 가족을 뒤로한 채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절절한 사연을 가진 북한이탈주민들을 보면서 일상 속 평범함이 특별한 시간들로 다가오기도 했다.

6번의 탈북을 시도하고 다시 북으로 압송됐다가 7번째 시도에서 죽음 직전 성공한 사람, 엄마와 함께 남으로 오다 엄마는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되고 혼자만 내려온 3살 아이와 산을 넘어오면서 발톱이 다 빠져버린 7살 아이, 술주정뱅이 중국 남편이 술에 취한 채로 펄펄 끓는 가마솥에 두 손을 담가버려서 뼈가 녹아내려 손가락 하나 없이 온 여성, 남으로 온지 1년 만에 남편이 간암으로 세연을 접고 아들과 덩그러니 남은 아내, 10년 전 헤어진 엄마를 찾고 싶어 홀로 사선을 넘어온 17살 청소년, 두 살배기 아이를 등에 업고 탈출을 강행한 엄마, 탈출 과정에서 같이 오던 일행이 북한 군인에게 발각돼 수십 발의 총알을 맞고 그 자리서 죽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

소설 속에서나 혹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니 현실이었다. 그때부터 고민에 빠지게 됐다. ‘이렇게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난 과연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나….’

문득, 할 수 있는 게 떠올랐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엄마처럼 가슴으로 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처님 말씀을 전하며 탈북 과정의 힘든 마음들을 정화시키고 순화시키고 싶어졌다. “북한이탈주민들은 내 가족이다”라는 마음으로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이탈주민들과 “불교는 가족”이라고 함께 외쳤다.

부처님 가르침이 먼저가 아니었다. 어려운 경전이 아닌 마음이 먼저였다. 엄마 같은 마음으로 보듬어주는 그런 따듯한 자비와 정이 그들에겐 필요했다. 마음을 여니 북한이탈주민들도 다가왔다.

“그리운 가족들이 보고 싶겠어요. 머지않아 꼭 통일이 될 거예요. 꼭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보고 싶다며 눈물 흘릴 땐 한 사람 한 사람 꼭 껴안았다. 긍정적인 마음과 용기를 전하며 눈물을 닦았고, 가족들을 만날 때까지 바르게 살자며 또 안았다. “불교는 가족이라는 말이 참 좋습네다.” 그네들이 손에 손을 잡고 부처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부처님은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알려주셨어요. 북에서는 주종의 관계였을지 모르지만 이제 주인공으로 살아야할 때가 됐죠. 부모님 돌아가시면 제사를 지내 드리는 종교도 우리 불교밖에 없어요.”

북한이탈주민들이 허구가 아닌 참 현실적인 종교라고 했다. 생경한 의식과 가르침이 궁금했는지 많은 질문을 해왔다. “신묘장구대다라니에서 나모라가 뭐야요? 혓바닥도 안돌아갑네다.”

생이별한 가족들이 보고 싶어 우는 이들에게 어려운 경전은 소용이 없었다. 효를 이야기했고, 부처님이 이르신 효사상을 알려줬다. ‘부모은중경’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속된 말로 ‘부모은중경’은 히트를 쳤다.

북한이탈주민들이 너무 좋아하는 경전이었다. ‘부모은중경’을 읽으며 부모님에게 못 다한 효를 다시 한 번 생각하자고 했더니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부모은중경’을 읽고 나면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반야심경’ 대신 보왕삼매론을 읽었을 때도 너무 좋아했다.

“억울함을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려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포교는 이래야 된다”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니 폭이 넓어졌다. 어려운 말씀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나 불교문화를 접하게 했다. 매달 연꽃을 만들기도 하고, 다도도 하고, 북한음식도 만들어 먹어보고, 고향을 생각하며 북한 노래도 부르며 장기자랑도 했다.

북한에서 한복을 한 번도 못 입어본 사람들이 많아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추억을 만들었던 일은 참 기억에 남는다. 모두 한복을 입고 수계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복 100벌 만들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원을 세우고 한복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 벌 두 벌 모으다 10년 만에 우연히 친구를 만났다. 마침 그 친구에게 한복 이야기를 꺼냈는데….

“나 요즘 한복집 해. 근데, 한복을 모으고 있어? 가게에 찾아가지 않은 한복이 80벌 정도 되던데….”

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께 간절히 원을 세우고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더니. 지금 내가 그렇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 졌을 때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북한이탈주민들과 함께 나눌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의 가피라고 느껴졌다. ‘부처님! 다른 사람들이 혹여 하잘 것 없다고 생각 하는 것이 제겐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소원을 들어 주시는 것 같아 너무 감사드립니다.’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했다.

한복을 입는다고 알렸더니 예쁘게 입어보기 위해 북한이탈주민들이 법당으로 몰려왔다. 그때 그 환희심이란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지금도 수계식은 계속 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한복을 입어 볼 수 있는,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법당에서는 100명이 넘는 북한이탈주민들이 함께 예불을 올린다. 11년 전과 비교할 수 없다. 하나원 종교 활동 가운데 불교가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다.

북녘에 두고 온 사랑하는 가족들,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으리라. 비록 탈출을 했지만 잊을 수 없는 게 고향하늘, 부모형제 아닐까. 얼마나 그리울까. 가늠하기도 어렵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금 내가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볼 때가 많다.

한 북한 가족이 남한에서 잘 살아보겠다고 사선을 넘어왔지만 가장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설 다음 날 새벽 3시 아내에겐 남편이 사망했다는 부고가 아침보다 일찍 왔다. 부랴부랴 알려준 장례식장으로 달려갔고, 이 세상에 제일 초라한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반 장례식장이 아닌 병원 건물 옆에 달려있는 초라한 방이었다. 장례식장은 두 사람만 덩그러니 있었다. 남편을 먼저 보낸 아내와 아빠 없는 하늘 아래 놓인 아들이었다. 남자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둘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포교사님! 우리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네까? 포교사님, 포교사님….” 통곡이었다. 우리 셋은 부둥켜안고 그냥 엉엉 울기만 했다.

당장 장례식 후가 문제였다. 시신을 안치할 곳이 없었다. 돈은 당연히 없었다. 인연 있는 사찰의 스님에게 연락을 했고 도움을 청했다.

“스님, 우리 북한이탈주민들은 돈이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49재도 해주시고 납골당이 있으니 안치도 해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스님이 보시기엔 일방적으로 떼를 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곡히 청했다. 스님은 흔쾌히 승낙을 했다. 어떻게 그런 용감한 떼를 썼을까. 하지만 내 평생 최고의 가치 있는 떼쓰기였다. 마냥 울면서 “스님,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인연은 계속됐다. 장례식장에 있는데 알고 지내던 스님에게 전화가 왔다. 부처님오신날 탈북민 아이들 장학금을 주고 싶은데 추천해달라는 말씀이었다. 당연히 돌아가신 분의 아들을 추천해줄 수밖에. 지원을 약속 받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장례식에 작은 위안을 줄 수 있었다.

정말 부처님 가피가 아니면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됐을까. 아예 이런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부처님 가피가 뿜어져 나온다”라고. 부처님 법 만난 인연은 내 인생 최고 히트작이다. 또 북한이탈주민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손수건이 되게 해준 ‘포교사’라는 세 글자는 부처님이 준 최고 선물이다. 부처님, 북한이탈주민들의 눈물을 닦는 큰 손수건이 되겠습니다.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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