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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불교사의 주역] 4. 근현대 불교 이끈 거사들

기자명 이병두

무너진 교학·수행 기반 구축…불교 사회적 역할 확대 주역

 
다른 이웃 종교들도 그렇긴 하지만, 국내외에서 출간된 불교 역사서들은 대부분 ‘승려’ 중심으로 되어 있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아주 드물게 부처님 당시의 아나타핀디카(給孤獨) 장자 ·유녀(遊女) 암바팔리 등 큰 재산을 헌납한 독지가와 빔비사라 왕이나 불교를 세계화한 아쇼카 대왕 등을 언급하지만 전체 줄거리는 늘 승려가 중심이다. 한국불교사 서술도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불교 집안 안팎에서 현재 한국 불교에 대하여 겉으로는 ‘보살 불교’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성 불자 중심의 기복 불교’를 폄훼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이능화가 쓴 ‘조선불교통사’
한국불교사 다시 밝힌 역작

김법린·백성욱은 교단 재건
뒷받침하고 후학 육성 전념

재력 겸비한 장경호·이한상
급고독장자 역할로 불교중흥

이기영·서경수 교학에 새바람
김기추, 생활선 수행풍토 조성

유·무명 거사들 승단 비판하되
새 불교 염원해 인재양성 주력

그러나 불교 역사를 살펴보면 뜻밖으로 큰 역할을 한 훌륭한 거사들이 많았고, 이 점은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 이래 억압당하며 위축되었던 불교가 민족 해방 이후 제대로 숨을 쉬어볼 사이도 없이 분쟁에 휩싸이면서 존재 자체를 의심받게 되었을 때에도 이들이 있어서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승가가 본래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거사가 살아 있어서 한국 불교가 살아남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전생과 현생의 부모 은혜를 갚기 위해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영(造營)한 김대성이 삼국과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거사라면, 춘천 청평사에서 참선 수행하며 일생을 보낸 청평거사(淸平居士) 이자현과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불보살의 가피로 난국을 극복하려고 대장경 판각을 추진하여 마무리했던 무인 집권기의 최씨 가문, 그리고 불교왕국 고려의 꺼져가는 등불을 살려보려 애썼던 목은 이색은 고려불교를 대표하는 거사들이었다.

조선은 건국초기부터 숭유억불 정책을 내세우며 불교를 억압했지만 이것은 공식 통치이념이었을 뿐 왕실과 사대부 집안에서 훌륭한 거사들이 끊어지지 않고 나타났다. 무학 대사와 도반으로 지냈던 태조, 새로 만든 한글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짓고 집현전 학자들에게 불경 번역을 하게 해서 불교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세종, 출가자와 똑같은 수행을 이어간 효령대군과 부처님 전기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고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 작업을 추진한 세조는 조선 왕실을 대표하는 거사들이다.

한편 입산하여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 경전을 읽었던 율곡 이이, 사명당 대사와 각별한 우의를 나누었던 조선 최고의 문학평론가 허균, 그리고 초의(草衣)·백파(白坡) 선사와 우정을 나누고 때로는 논쟁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말년을 봉은사에서 수행자처럼 보내며 판전(板殿) 현판을 쓰기도 한 추사 김정희는 조선 중기 사대부 양반을 대표하는 거사였다.

민족사 최대의 난세였던 일제 강점기에는 상현 이능화 거사가 있어서 다시 불교의 등불을 밝혔다.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써보지 못하고 있던 불교 집안이었는데, 그가 나타나 ‘조선불교통사’를 써서 “칠흑같이 어두운 방에 쌓인 보배를 환히 비추어 볼 수” 있게 하였다. 이능화가 아니었으면 우리의 불교 역사는 자칫 ‘중국과 일본 불교의 아류(亞流)’라는 멸시를 받으며 움츠리게 되었을 것이다.

1945년 민족해방 이후 불교계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유학승 출신으로 나중에 동국대 총장을 지낸 범산(梵山) 김법린·일곤(壹壼) 백성욱·효성(曉城) 조명기 등의 거사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교단 재건을 뒷받침하고 후학들을 육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 중에서 김법린과 백성욱은 기독교인 일색이었던 이승만 정권에서 장관을 지내며 불교가 그나마 피해를 덜 당하도록 애쓰기도 하였지만, 당시 지성계를 주도하던 인사들과 교류하며 ‘불교가 결코 후진적이지 않음’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 두 인물과 성격을 달리하지만 고난의 한국 노동운동 역사를 대표하며 ‘평등세상’의 구현을 위해 일생을 바친 우촌(牛村) 전진한 또한 잊을 수 없는 거사이다.

오늘의 한국 불교는 ‘이 땅의 유마거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가지는 대원(大圓) 장경호 거사와 부처님 당시의 급고독장자에 버금가는 대작 불사를 한 덕산(德山) 이한상 거사가 아니었으면 숨을 이어오기조차 어려웠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대원 장경호 거사는 서울 중심에 국내 최초의 불교교양대학인 대원불교대학을 세워 당시 최고 학자들을 강사진으로 초빙하였으며 재학생들에게는 교재와 교통비·식사까지 제공하면서 불교의 희망을 이어가는 일에 진력하였는데, 이 대원대학이 선구가 되어 그 뒤 전국 곳곳에 불교교양대학이 세워지면서 ‘복(福)만 비는 불교’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공부하는 불교’로 분위기가 바뀌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대원 거사는 “불교 진흥을 위해 써달라”며 자신의 사재를 국가에 헌납했고, 그 뜻에 따라 출범한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은 불교방송 설립 지원·군불교 진흥 후원·불교문화 콘텐츠 발전 지원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불사를 계속해오고 있다. 이런 대원 거사에게 ‘이 땅의 유마거사’라는 칭호가 매우 적절하다는 사실은 누구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덕산 이한상 거사가 현대 한국 불교를 위해 한 역할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크며 그 범위가 넓고 불사의 의미도 깊다. 그가 한때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가였으므로, “돈으로 해결한 것”이라고 비판을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돈을 가졌다고 해서 덕산과 같은 큰 바람[大願]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그런 바람을 가졌다고 해도 덕산처럼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길[道]을 제대로 찾아낼 수 있는 이도 드물 것이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출범에서부터 안착까지 노심초사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일, 불교 종립학교 연합회를 조직해 교과서를 만들고 교법사 연수를 진행한 일, 땅바닥까지 떨어진 불교인의 자부심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서울 시내에 사명당·원효대사 동상을 건립한 일, 군법사 파송을 실현한 일, 어려운 종단 사정으로 발간이 어려워진 ‘대한불교’(현 불교신문)를 살려 기관지의 위상을 세우고 그곳에 황산덕·서경수 등의 불교 지식인을 초빙하여 건전한 비판의 마당을 펼치고 법정 스님의 날카로운 글을 게재하여 종단 지도부를 서늘하게 한 일 등은 덕산 거사가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해방 이후 조계종을 비롯한 승단은 갈등과 분규로 얼룩졌지만, 이에 실망·절망하지 않고 교학 연구에 매진하며 후학을 지도한 학자들이 있어서 이제는 국제학계에도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불연(不然) 이기영·혜안(慧眼) 서경수는 교학과 신행을 함께 하면서 불교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재가 거사의 역할에 충실했던 대표 인물들이다.

불연과 혜안은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대불련 지도교수를 맡아 각 대학에서 특강을 하고 수련회에 동참하여 젊은이들에게 보살의 길과 불교인의 자부심을 일깨워주었으며, 시대를 앞서가는 칼럼을 써서 비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구도회와 한국불교연구원을 설립하여 대학 바깥에서 신행과 연구를 이어갔다. 혜안과 불연이 세속 인연을 끊은 지 각기 30년과 20년이 지나서도 이 두 단체가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니 불연과 혜안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거사일 것이다.

불연과 혜안 거사가 교학을 중심으로 한국불교 현대화에 기여하였다면, 백봉(白峯) 김기추와 종달(宗達) 이희익 거사는 거사선풍(居士禪風)으로 참선의 새 바람을 일으키며 한국불교에 맑은 샘물을 채워준 대표적인 거사들이다. 두 사람의 타계 이후에 ‘백봉을 백두산, 종달을 한라산’에 비유하며 ‘한국 거사불교의 거목’으로 칭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그들이 영향이 뚜렷한데 그 자취는 앞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백봉 거사는 “스님들은 24시간 수행으로 다져진 분들이지만, 우리는 아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재가자 나름대로의 수행방편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순(純) 한글 화두인 ‘새말귀’ 운동을 벌여서 거사풍(居士風)을 세웠고, 종달 거사는 “간화선이 오늘날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확신하며 ‘무문관(無門關)’ 48칙을 통한 ‘입실점검(入室點檢)’ 전통을 확립하여 한국불교에 ‘생활선’ 수행풍토를 조성하였다. 이 두 거사는 각기 재가 선수행 모임인 보림회와 선도회를 조직하여 성태용·박영재 등 뛰어난 제자를 길러냈다. 스스로 선사라 칭하지 않았지만 선사와 다름없었던 이들이 있어서 한국불교의 선풍이 끊어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실제로 불교를 지켜낸 거사들 중에는, 예를 들어 일선 부대의 법당을 지켜낸 준사관 불자들처럼, 세상에 이름을 크게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하게 부처님 일을 한 이들이 많을 터인데 이제까지 살펴본 거사들은 그 이름을 남긴 유명한 인사들에 그친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에서 꼭 지적할 사항은, 이런 무명의 거사들과 앞에서 이름을 든 유명 거사들 모두 승단을 비판하되 결코 타도해야 할 적으로 여기지 않고, ‘불교를 새롭게 하는 샘물’이 될 인재 양성에 주력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훌륭한 거사들이 있어서 불교의 샘물은 메마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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