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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아짠 문의 현대의 아라한

기자명 김정빈

“나는 단지 내 안의 번뇌만 이기려할 뿐이다”

▲ 그림=근호

프라 아짠 문(Pha Achan Moon)은 1870년, 태국 우볼 라자다니 읍에서 아버지 내캄듀앙, 어머니 낭 장의 여덟 자녀 중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사미승이 되었다가 2년 후에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속가로 돌아왔으며, 스물두 살이던 1893년에 다시 출가했다.

두타행 수행 매진한 아짠문
위파사나 명상으로 번뇌근절
병중에도 탁발로 한 끼 식사

깨달은 사람은 수만명이지만
현 시대서 성자 발견 어려워
고매한 삶 속에서 감동 주는
위대한 수행자 출현하길 고대

비구계를 받은 다음 그는 곧바로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열심히 수행을 했음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한 나머지 갈등을 느끼기도 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얼마 후, 자신이 금생에 아라한을 이루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꿈을 꾼 그는 새로이 힘을 얻어 수행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누더기 가사만 입기, 세 벌 가사만 입기, 걸식한 것만 먹기, 숲속 절에서만 지내기, 눕지 않고 지내기 등 열세 가지 엄격한 계율을 지키는 두타행(頭陀行)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지속했다.

어느 날, 명상을 수행하고 있는 그의 마음에 독수리, 까마귀, 개들이 훼손한 시체가 떠올랐다. 그 상(像)은 다음 명상 시에 또 나타났다. 명상을 계속하자 시체 대신 한 장의 유리 원반이 떠올랐고, 이어서 다양한 사물과 장면들이 펼쳐졌다. 어느 순간 높은 산을 오르자 갑자기 벽이 나타났다. 그 벽에 있는 문을 열어보니 안에서 몇몇 스님들이 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점점 확대되어 옆으로 수많은 동굴들이 보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석 달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며 전개되는 수많은 장면을 보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런 방식의 명상이 내적인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것이 올바른 수행법이라면 수행의 결과 마음은 평화로워졌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수행을 하고난 다음 그의 마음은 더욱더 민감해졌다. 그래서 그는 불안과 초조감을 느꼈고, 이를 통해 그는 그런 수행이 바른 길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짠 문은 위빠사나 명상법의 기본으로 되돌아와 수행의 초점을 몸에 맞추었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 몸 전체를 여러 각도에서 세밀하게 관찰했다. 그는 앉아서도 수행했고, 걸으면서도 수행했다. 이 수행법은 그의 마음이 몸 바깥의 경계로 나아가 헛되이 방황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아짠 문은 번뇌를 근절하기 위해 외딴곳을 찾아가 은둔하며 수행했다. 그는 태국 북동부 지역의 울창한 숲과 산에서 대부분의 날을 보냈다. 그가 머무는 곳은 호랑이가 출몰하는 지역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나콘나욕읍에 있는 사리카라는 동굴에서 일 년간 수행한 적이 있다. 그 동굴은 무시무시한 악마가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네 명의 스님이 목숨을 잃은 곳이었지만 그는 두려움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동굴에 들어간 그는 나흘째 되는 날 배탈이 났다. 그는 다르마의 힘으로 그 병에 대처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명상에 전념하여 깊은 삼매에 이르렀을 때 그 앞에 굵은 몽둥이를 든 검은 피부의 사신(邪神)이 나타나 그를 위협했다. 아짠 문은 그에게 말했다.

“나는 아무도 이기려 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내 안의 번뇌만을 이기려 할 뿐이다. 그대는 큰 힘을 가지고 있으니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그대의 힘은 다르마의 힘보다 큰가?”

사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고, 아짠 문이 말을 이었다.

“그대의 분노는 그대 자신을 태워버리는 불과 같을 뿐이다. 그대는 남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한다. 그대가 애쓰지 않아도 나는 때가 되면 죽을 것이다. 그대가 원한다면 나에게 어떤 위해를 가해도 좋다.”

이런 대화를 거쳐 사신은 아짠 문에게 감화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고, 제자에게 네 시간에 걸친 지도를 마친 다음 아짠 문의 병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1949년, 일흔아홉 살인 아짠 문의 몸에 질병의 징후가 나타났다. 그는 이번 병은 어떤 약으로도 나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병중에도 그는 탁발을 나갔고, 한 끼만 먹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그는 공양물을 가져온 재가 신자를 마당에 머무르게 한 뒤 자신이 나가 직접 공양물을 자신의 바루에 덜어내어 먹었다.

아짠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사람들이 많이 사는 읍내로 옮겨달라고 지시했다. 자신이 죽을 경우 많은 사람들이 숲속 은둔처를 찾아올 것이고, 그러면 큰 시장이 벌어져서 많은 동물들이 죽게 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은둔처에서 읍내까지는 24km 떨어져 있었지만 그를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옮겨지는 아짠 문의 뒤를 따라 그 먼 길을 걸어갔다.

1950년 10월10일 오전 2시, 아짠은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고 사자 자세로 누워 반열반에 들었다.

경전은 수많은 각자들의 소식을 전한다. 부처님 당시의 사정을 전하는 경전을 보면 단지 한 마디 설법을 들은 것만으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사람도 있고, 아주 간단해 보이는 수행법으로써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도 많다. 경전이 전하는 대로라면 부처님 당시에 깨달음을 이룬 사람의 수는 수만 명도 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경전이 전하는 것일 뿐 현시대의 우리는 아라한은커녕 수다원에 이른 사람도 발견하기 어렵다. 수다원은 깨달음을 완성하지는 못했더라도 적어도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첫 번째 단계의 깨달음을 성취한 성자이다. 부처님은 이 경지에 이르면 천왕이 되는 것보다 열여섯 배 훌륭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떤 수행자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분은 부처님밖에는 없다. 그 점은 사리풋타 같은 부처님의 대제자도 누가 깨달음을 성취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경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남방불교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수행자일지라도 자신이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그런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태국 불제자들은 아짠 문을 현대의 아라한으로 칭송하고 있다. 엄격히 자신을 제어하는 두타행을 부처님의 대제자인 마하카사파 존자처럼 실천해왔으며, 지극한 자비심으로 인간은 물론 동물과 신들까지도 포용했던 그의 고매한 삶이 태국 불제자들을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이었다. 아짠 문 같은 수행자를 보고 싶다. 한국 땅에서 그런 위대한 수행자가 출현하기를 기대해본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40호 / 2018년 5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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