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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당 벽화-상

기자명 주수완

소박한 건물 벽을 장식 대신 그림으로 가득 채운 독특한 성당

▲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하부성당 벽화.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대기를 그린 벽화로 빼곡하다.

▲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팔상도로 가득 채워진 범어사 팔상전의 내부.

로마를 떠나며 “꼭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늘 아쉬움을 남긴 채 그럼에도 떠나야 여행인 것. 하루를 더 답사로 보내고 아시시(Assisi)로 이동하기 위해 저녁에 테르미니 기차역으로 향했다. 로마의 버스와 전철노선 상당 부분이 이 역을 종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역 근처에 숙소를 잡으면 다니기 수월하다. 우리나라 카페나 이태리 음식점 이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테르미니’는 영어의 터미널이란 뜻인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실감나는 기차역 이름이다.

청빈한 삶으로 성인 추서된
가톨릭 복음 전한 보살 화신

모든 것 내려놓고 수도사로
청빈하고 순진무구했던 인물

종교가 다른 이집트 술탄도
티 없이 맑은 순수함에 감동

르네상스 초기 거장 지오토
프란치스코 삶, 벽화로 남겨

‘삼국유사’ 백제의 궁궐처럼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아

마침 역 옆의 한 인도 식당이 가격도 저렴하길래 들어가 인도식 볶음밥인 ‘브리아니’를 주문했다. 로마에서 기껏 인도답사에서나 먹던 브리아니를 먹다니 제정신이냐고 놀릴 친구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그러나 로마에 그렇게 반했으면서도 나의 마음 한구석은 인도를 그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인도에서의 브리아니보다는 단출했지만 로마에서는 그 가격에 추천할만하다.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San Francesco d’Assisi, 1181~1226)의 고향. 그는 청빈한 삶으로 유명한 수도사이며 가톨릭 성인으로 시성된 인물이다. 교회가 권력이 되고 부가 되어갔던 무렵,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오로지 복음을 전파하는데 전념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만든 수도회의 인가를 받으려고 교황 인노센치오 3세를 찾아가 만났는데 그 수도회의 규약이 너무 엄격하여 교황은 처음에는 인가해주지 않으려고 할 정도였다. 실상 수도사는 사제가 아니다. 불교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사제가 스님이라면, 수도사는 재가보살이다. 그런데 어떻게 재가보살이 스님보다 더 엄격한 규율로 살아가겠다는 것인가? 자칫 그것은 승단에 대한 비판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반대했던 교황도 꿈 속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로마 교구성당이자 모든 성당의 어머니 성당으로 불리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성당을 어깨로 떠받치는 모습을 보고 그의 수도회를 인가해주었다고 한다. 더불어 교회는 그에게 정식으로 사제서품을 내리려고 했지만, 프란치스코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이와 같은 수도회의 모습을 통해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도 연상이 된다.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이고, 보살은 원래 출가한 스님들과는 달리 재가자들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그냥 재가자가 아니라 마치 승려처럼 세속을 버리고 생활하면서도 정식으로 출가는 하지 않은 중간적 존재의 재가자다. 출가를 하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째로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출가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수도 있고, 둘째로 교단이 너무 타락해서 그에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으며, 셋째, 꼭 타락까지는 아니더라도 교의나 실천의 방향에 대해 교단과는 다른 나름대로의 해석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하부성당에 그려진 치마부에의 벽화 성모자와 성 프란치스코.

교단의 입장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만은 없다. 특히나 대중들이 이런 재가도 아니고 출가도 아닌 수도사들을 마치 사제를 대하듯 존경하며 교회에 바쳐야할 시주를 수도원에 바친다면 결코 반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금지할 마땅할 이유도 없었다. 하나님께 다가가라고 늘 가르치던 사제들은 그럼에도 독실한 신도들의 일부가 이렇게까지 하나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금지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끌어안고 교회의 지도 아래에 두고자 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인가도 그런 차원이었으리라. 이렇게 보면 프란치스코는 그야말로 보살이다.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 틈에 살며 그들과 함께 노동하며 복음을 전하는 관음보살이었던 셈이다.

물론 이러한 점도 대단히 칭송받아야함은 마땅하지만, 유독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너무나 순진무구하고 청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한번 만난 사람은 누구나 그를 좋아했고, 그를 신뢰했으며, 이집트의 술탄마저도 종교는 달랐지만 그의 하나님을 보고는 그의 순수함에 감동했다. 그가 심지어 동물들과도 대화를 나눴다는 전설은 그의 이런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 성 프란치스코가 교황의 교구성당인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성당이 기울어가는 것을 어깨로 받치는 꿈을 꾸는 교황 인노센치오 3세를 그린 지오토의 벽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이 종교인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란치스코의 삶에 감동을 받고 언젠가는 그의 고향 아시시에 꼭 방문해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필자는 이번 여행에서 드디어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저녁 기차에 올라 아시시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설레었다. 아시시는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안동 하회마을 같은 곳이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 아쉽게도 1997년에 아시시를 포함한 움브리아 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나 대성당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을 때 아직 이곳을 가보지 못한 나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후 벽돌 파편 하나 버리지 않고 주워 모아 성공적으로 복원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며 안도하기도 했다. 밤 9시 조금 너머 아시시에 도착했다. 역시 중세 마을이라 그런지 너무나 조용하다. 원래는 역무원에게 다음날 차편 등도 확인하려고 했는데 정말이지 아무도 없다. 오로지 바깥에 택시 기사만이 기다리고 있다. 아시시는 역에서 떨어진 산 중턱에 있어 버스를 타야만 했는데 택시기사가 오더니 막차가 떠나 택시로 밖에 갈 수 없다고 한다. 분명 여행안내서 등에 의하면 막차가 남아있을 시간이었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텅 빈 기차역일 줄은 미처 몰랐기에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여행안내서를 믿고 기다려보기로 했는데, 예정된 시간에 다행히 막차 버스가 왔다. 기차역 주변의 마을을 한 바퀴 도느라 시간이 더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버스가 있으니 다행이다. 마을을 다 돌고 점차 아시시로 향하는 산중턱을 오르는 순간, 드디어 꿈에 그리던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저 멀리 정상에서 조명을 받으며 눈에 들어왔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언덕배기 아래 정류장에서 버스에서 내려 나는 짐을 끌고 성당 입구에 위치한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간에도 너무나 환히 반겨주는 직원의 안내에 감사하며 짐을 내려놓자마자 성당의 야경을 보려고 달려 나오니 불과 몇 걸음 만에 성당에 도착했다. 비록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벤치에 앉아 그리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아도, 중세 기독교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성인이 잠든 이 역사적 성당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히려 다소 소박해보이기까지 한 이 성당이야말로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딱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궁궐을 묘사한 “검이불루, 화이불치”,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 성당에도 어울리지 않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일어나 전부 문 닫은 가게들뿐이었지만 고풍스런 마을을 둘러보니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바쁘게 다녔던 답사여행에서 모처럼 가져본 구름 위의 산책이었다.

다음날 아침, 드디어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나중에 성당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안 사실이지만, 이 한적한 중세마을에 엄청난 인파가 줄을 지어 서있는 것을 보았는데, 조금 늦었으면 여기서도 그 긴 줄을 서야할 뻔했다.

▲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야경.

필자가 이 성당을 찾은 이유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념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실제 필자의 직업상 방문 이유는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바로 르네상스 초기의 거장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였다. 지오토는 이 성당에 성 프란치스코의 일대기를 담은 벽화를 그렸는데, 이미 그 당시부터 사실적인 회화기법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미 미켈란젤로와 같은 지오토 이후의 대가들의 그림에 길들여진 필자에게 지오토의 사실성 정도쯤은 언뜻 어린애 장난처럼 너무 순진한 기법으로만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워낙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가로서 칭송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한번쯤 보고 싶은 마음 정도였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드디어 성당 내부. 막상 들어서보니 거기에는 바티칸 베드로 성당과는 또 다른 천국이 펼쳐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무척이나 화려하지만 보면 모두 벽화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이 이 성당을 장엄하는 최고의 도구는 단지 그림이었다. 웅장한 조각이나 화려한 건축부재가 아니라 그저 그림이었다. 그러나 어찌나 빽빽이 그림을 그려 넣었는지, 마치 건물을 장식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 넣기 위해 건물을 세운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회화 예술이 이토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성당은 아마 유례가 없을 듯했다.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일대기인 팔상도로 가득 채워진 법당 건물이 연상되어 친숙한 느낌도 들었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41호 / 2018년 5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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