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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승가대 전 총장 종범 스님

100세 시대 가장 필요한 건 허망함 찾아내는 ‘인생 공부’

▲ 종범 스님은 “고요해진 마음이 더 깊어져 극에 이르면, 거기서 빛이 나오는 것”이라며 “밝고 밝아서 보지 못하는 데가 없게 된다”고 말했다.

오늘은 ‘100세 시대의 불교공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00세를 살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여러 가지가 의미 있을 수 있는데요, 옛날에는 일생을 말할 때, 단순하게 초년, 중년, 말년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초년은 0세에서부터 29세까지, 중년이면 30세부터 59세까지, 말년은 60세 이후를 지칭합니다. 옛날에는 60세가 넘으면 살아계신 분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인생 끝자락이라고 해서 말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는 말년이라는 말보다 후년이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허망함과 무상함 알아차린
인생공부 없이 해탈은 없어

마음공부는 생각에서 시작
내면 거두어 마음 보는 것

고요함 깊어져 극에 이르면
일체 속박 구속도 받지 않아

나이 100세를 산다고 하면, 0세부터 29세가 늘어난 것이 아니고 30세부터 59세까지가 늘어난 것도 아니며, 60세 이후 후년의 나이가 늘어난 것입니다. 60세 이후의 나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60세 이후 몇 년을 살다가 생을 마치느냐는 아주 중요한 논제입니다. 교육공무원의 정년이 가장 늦는데 65세입니다. 정년 즈음이 되면 의욕이 강하지 못합니다. 왕성하게 연구를 열을 내서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정년 이후인 65세부터 100세까지 살면 그때는 무엇을 하면 될까요? 이 시기 고집은 또 얼마나 셉니까. 저승에서 염라대왕이 오라고 해도 “못 간다고 전해라. 내가 알아서 간다고 전해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염라대왕이 실직자가 될 상황입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60대 이후 어떤 삶을 사는가, 이것이 새로운 과제입니다. 잘못하면 새로운 재앙이 되고 잘하면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완전히 새롭게 출발을 하셨습니다. 열반에 드신 후 몸이 전부 사리가 되어서 시방세계 곳곳마다 사리탑이 세워진 것은 죽음으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사리탑이 세워지고 공경과 예경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지요. 부처님 몸에서 사리가 나와 온 세계를 덮었다, 여기서 굉장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부처님의 몸에서는 사리가 나와서 한 몸이 온 세계를 다 덮었는데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이 과연 없어지기만 하는 것인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부분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회 활동을 많이 못 하는 것에 대해서 좌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노익장이라고 해서 젊은 사람들처럼 뜁니다. 또 활동을 왕성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활동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을 통해서, 경제적인 재력을 통해서 노년의 의미를 느끼려고 하는 등 이런 것으로 노년의 의미를 삼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그냥 불안합니다. ‘삼고(三苦)’라고 해서 빈곤, 질병, 고독 세 가지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빈곤과 질병과 고독을 경제력과 건강과 사회활동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정신적으로 ‘인생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인생 공부’ 없이 돈을 갖고, 건강을 갖고, 활동을 가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사실상 정신적인 깊은 체험이 없이 젊었을 때를 다시 재현해서 살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젊은 사람 흉내 내다가 큰 탈이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0세 시대에는 특히 노년 시기가 늘어났기 때문에 ‘인생 공부’가 아주 필수적입니다.

그렇다면 ‘인생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동아시아에는 노자의 ‘도덕경’이 굉장히 널리 퍼져 있는데, 도덕경은 인간이 돌아가야 할 곳이 햇빛이나 달빛이나 별빛이나 자연의 광명이며, 인간의 몸의 광명이 자연의 광명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을 화기광(和其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먼지나 물이나 흙이나 다 티끌인데, 세상에 있는 티끌과 하나가 되는 것을 동기진(同其塵)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줄이면 화광동진(和光同塵)입니다. 햇빛과 내가 하나 되고 티끌과 내가 하나 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노인의 지혜이고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도 수염이 있으시다는 것을 느끼셨는지요? 지혜의 상징이 산신령인데, 새파란 청년 산신령 보신 적 있으십니까? 산신령은 청년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 공부’를 어떻게 가르칠까요? 이 몸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각경’ 보안장에 보면, 이 몸의 머리카락이라든지, 손톱이라든지, 치아라든지, 피부, 근육이라든지, 뼈라든지 이런 것은 모두 땅으로 돌아갑니다. 몸에 있는 온갖 수분과 혈액 등 인간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은 거의 다 물로 돌아갑니다. 또 체온은 불로 돌아가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을 살피고 느끼는 것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인생 공부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몸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 몸이 진실한 것이 없다, 무실(無實)하다는 것입니다. 이 몸은 무실하여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몸이 이렇게 무실한데 그 몸을 위해서 재력만 유지한다는 것은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이것은 무상(無常)하다는 뜻입니다. 매일 건강만을 위해서 활동하고, 경제적인 준비만 하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삶은 어떻습니까. 인생이 100세라고 해도 10대는 번개같이 지나가고 20대도 번개같이 지나가고 30대도, 40대도, 50대도 번개같이 지나갑니다. 60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허망하고 무상함을 절실하게 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해탈(解脫)하시기 전 인생 공부를 먼저 하신 것입니다. 허망하고 무상하다는 인생 공부가 없으면 해탈은 절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몸에 계속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해탈하신 후, 해탈한 결과를 광명(光明)이라고 했습니다. 이 몸에는 광명이 있습니다. 몸이 허망하고 무상한 것을 느끼지 않았다면 광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화엄경’ 여래출현품에는 “일체중생에게 여래의 지혜광명이 있다.”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일체중생에게 있는 여래의 지혜광명은 어떤 것일까요? 바로 인생은 늙는다, 죽는다고 아는 놈입니다.

죽는다고만 알고 죽는 줄 아는 놈을 모르는 것을 망상 집착이라고 하고 악지악각(惡知惡覺)이라고 합니다.
늙는 것을 알고 죽는 줄 아는, 아는 놈을 모릅니다. 그 아는 놈을 아는 것을 선지선각(善知善覺)이라고 합니다. 검은 것도 알고 흰 것도 알고 죽는 것도 알고 까만 것도 아는 놈이 있습니다. 늙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늙음을 아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 심리학에서도 세계는 인식이 있은 이후의 현상이라고 합니다. 인식보다 먼저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놈을 던져 버리고 이것만을 따라갑니다. 늙음이 있다고 하면 그 늙음을 젊게 한다든지 못 늙게 한다든지 늙는 것만 집착할 뿐 늙는 것을 아는 놈을 잊어버립니다. 만약 주위가 깜깜하다면, 깜깜함만 무서워하지 깜깜함을 느끼는 놈을 잊어버립니다. 저양반이 이상하다고 하면, 저양반이 이상한 줄 알기만 하지 이상한 줄 아는 놈을 잊어버립니다.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에서는, 밖으로 온갖 것, 검은 것, 흰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큰 것, 작은 것 등을 화가가 그린 그림 현상에 비유했습니다. 어떤 그림이든지 그 그림은 붓끝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붓끝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생각입니다. 화가의 생각이 붓끝을 움직이고 붓끝에서 그림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린 사람의 마음은 그림을 그리나 안 그리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림을 그려도 화가의 마음이고 그림을 안 그려도 화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림 평을 할 때 화엄경을 기준으로 하면, “그것은 화가의 생각이다.” 이렇게 하면 딱 끝입니다.

여기서부터 불교의 마음공부, 불교의 인생 공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허망하고 무상한 것이다, 그런데 허망하고 무상함을 아는 마음이 있다, 허망하고 무상함을 아는 마음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해탈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보는 놈, 생각하는 놈, 판단하는 놈, 움직이는 놈이 있습니다. 찾아보면 없습니다. 그런데 항상 이 짓을 합니다. 주소도 없고 형체도 없고 향방도 없고 없는데도 없고 있는데도 없고 무한한 활동을 다 하는 우리의 본래면목입니다. 몸인 줄 아는 놈, 하늘인 줄 아는 놈, 땅인 줄 아는 놈 그놈만 나의 본래면목입니다. 이놈은 영광영명(靈光靈明), 신령스러운 광명이고 신령스러운 밝음입니다. 이놈을 찾는 것이 마음공부입니다. 이놈을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생각을 조용하게 하는 것이 마음공부인데, 생각을 내서 판단하고 해석하고 서술하는 것을 마음공부라고 착각합니다. 공부한다면서 책부터 들고 오십니다. 일반 학문으로 공부를 많이 했어도 연구한 자신은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몰라도 사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무서워하면 무서움을 느낀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조견(照見)이라고 합니다. 또 밖으로 펼치는 생각의 빛을 돌이킨다고 해서 회광(回光)이라고 하고 또 돌이켜서 비춘다고 해서 반조(返照)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체 두려워하는 생각, 좋아하는 생각, 싫어하는 생각이 하나도 없이 조용해지고 깨끗해집니다. 청정해집니다. 적적해집니다. 소리도 없고 빛깔도 없습니다. 그렇게 들어가면 바로 들어가는데, 그것을 안 해봤기 때문에 생사윤회를 반복하며 밖으로만 보고 안을 보지 못합니다. 내면을 보는 것을 섭심내조(攝心內照), 마음을 거두어서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보면 생각이 아무것도 없이 고요해집니다.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그 고요해짐이 아주 깊어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능엄경’ 제6권에서는 정극(淨極)이라고 했습니다. 고요해진 마음이 더 깊어지고 깊어져서 극에 이르면, 광통달(光通達)이라, 거기에서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밝고 밝아서 보지 못하는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청정함이 깊어져서 극에 이르러 세간을 보면 마치 꿈속의 일과 같습니다. 일체 자제하게 되고, 일체 속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공부를 100세까지 할 수 있는 시대에 온 것입니다. 한참 사회활동을 하는 중년의 시기에는 이 공부가 다소 어렵습니다. 몸은 앉아 있지만 생각은 밖으로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1초도 돌이킬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노인들도 살기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가장 좋은 것은 불교공부를 할 시간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100세 시대의 불교 공부, 마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4월10일 부산불교신도회 법계정사에서 봉행된 ‘부산불교거사림(회장 공병수) 2018년 상반기 종범 스님 초청 정기법회’에서 스님의 설법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1441호 / 2018년 5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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