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삼장(三藏) 문헌 조성지 알루위하라
8. 삼장(三藏) 문헌 조성지 알루위하라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8.05.22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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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근 참화 속 전법에 목숨 건 승가가 빚어낸 찬란한 삼장의 고향

▲ 기원전 1세기 전쟁과 기근에 빠져있던 싱할라왕국의 승가는 구전하던 삼장을 문자로 남기겠다는 획기적 발상을 이곳 알루위하라에서 실행에 옮긴다. 아쇼카왕의 3차 결집으로 형성된 초기불교 경율론 삼장을 문자로 기록한 패엽경은 이 같은 환란 속에서 탄생한 불교사의 위대한 장면이다.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원전 104년, 왕좌에 오른 싱할라의 국왕 왓타가마니 아브하야는 타밀족에게 빼앗긴 수도, 왕좌를 되찾기 위해 피 말리는 게릴라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새 국왕이 등극한지 불과 1년 만에 싱할라왕국은 14년간의 치열한 전쟁에 빠져있었다.

타밀족과의 14년 전쟁에
유례 없는 기근까지 겹쳐
굶어죽는 이 즐비하던 때
암송으로 구전하던 삼장
7년 결집으로 패엽에 기록

기원전 1세기 승가분열 후
초기불교 전승 구심점으로


백성들의 삶은 비참했다. 수년째 계속되는 전쟁에 돌보는 이 없는 저수지와 수로는 하루가 다르게 황폐해져갔다. 건기에 물이 부족한 싱할라왕국서 치수(治水)는 왕의 가장 중요한 국정이었다. 물을 대지 못하면 농사는 불가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늘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가뭄이었다. 닥치는 대로 먹을 것을 구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저수지는 바닥을 드러냈고 하늘은 비를 뿌려줄 생각이 없었다.

백성들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체를 먹었다는 흉흉한 소식도 이어졌다. 그토록 존경하던 출가자, 스님의 법구를 먹었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스님들의 거처인 승원에도, 독경소리와 법문 이어지던 대탑에도 인적이 끊겼다. 끼니를 잇기 어려운 것은 스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루 한 끼 구하기 어려운 것보다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기원전 3세기 마힌다 스님에 의해 불교가 전래된 이래 싱할라왕국의 승가는 오직 구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인도로부터 이어진 불교의 전통이었다. 인도뿐 아니라 불교가 전해진 그 어느 나라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기록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부처님 가르침을 암송하는 것은 승가의 자격이자 가장 큰 수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위협 받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출가자도, 승가도 존속되리라 보장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법등을 전할 것인가. 더 이상 구전에 의지할 수 없었다.

국왕이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담불라석굴로부터 남쪽으로 40km 가량 떨어진 마탈레의 사원 알루위하라에 500여명의 스님들이 모였다. 스님들은 이곳에서 7년에 걸쳐 네 차례의 결집을 단행했다. 경·율·론 삼장(Tipitaka)이 취합되고 기록됐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열반하신 3개월 후 이루어진 1차 결집과 다시 100여년 후 바이샬리에서 이뤄진 2차 결집, 그리고 아쇼카대왕에 의한 3차 결집(기원전 3세기)으로 형성된 삼장이 싱할라왕국, 이 작은 섬나라에서 비로소 문자로 기록됐다. 불교사의 일대 전환이었다. 삼장은 야자수의 일종인 패다라수 잎사귀에 쓰여졌다. 잎사귀를 찌고 말려서 종이처럼 만들었다. 이렇게 기록된 불교사 최초의 삼장은 패엽경이라 불렸다. 알루위하라에는 패엽경 조성을 위한 동굴이 14곳이나 있었다. 현재는 두 곳만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다.

알루위하라는 기원전 3세기 데바남피야티사왕 때 건립됐다. 원래 이름은 ‘알루레나’ 혹은 ‘알로카네나’다. ‘찬란히 빛나는 동굴’이라는 뜻이다. 초기의 사원은 자연 동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낮에도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는 늘 등불이 필요했다. 빛나는 동굴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이 동굴사원서 한 스님이 설법을 했는데, 설법에 감탄한 천신 ‘샤크라’가 감사의 뜻으로 동굴에 꺼지지 않는 빛을 보시했다. 이후 사원은 알루레나로 불렸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삼장의 탄생, 찬란한 법등은 꺼지지 않고 후대로 이어졌다. ‘찬란히 빛나는 동굴’이라는 사원의 이름도 사그라들지 않는 등불처럼 역사에 기록되었다.

▲ 알루위하라에는 패엽경 조성 과정을 보여주는 작은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 전시관 내에는 패엽경도 전시돼 있다. 기원전 1세기 조성된 패엽경의 상당수는 영국군에 의해 소각됐지만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스님들의 노력으로 패엽경 삼장의 복원 불사가 이뤄졌다.

패엽경은 참혹했던 역사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패엽경의 탄생은 예상치 못했던 불교사의 전개를 불러왔다. 14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마감하고 왕좌에 복귀한 왓타가마니 아브하야왕은 이후 바라감바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렸다. 전쟁 이후 그는 싱할라왕국에 일대 변혁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국왕은 전쟁 시기 그를 도와준 마하팃사 스님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마하팃사 스님은 존경받는 장로였지만 수도가 아닌 지방에서 활동하던 ‘비주류’였다. 그런 그가 국왕으로부터 ‘왕사’의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승가는 국왕과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았지만 승가와 재가의 교류는 계율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 국왕이라 할지라도 스님을 무시로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더욱이 국정운영에 관해 스님과 논의하는 것은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라감바후는 수도 아누라다푸라에 대탑 아브하야기리다고바와 사원을 조성해 마하팃사 스님에게 보시했다. 승가가 아닌 스님 개인에게 사원과 탑을 보시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패엽경을 조성하면서까지 경율론 삼장의 원형,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려했던 스님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마하팃사 스님이 국왕을 비롯해 대신들과 교류하는 것은 계율에 위배된다 지적했다. 왕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전통을 중시여기는 스님들은 마하위하라를 중심으로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순식간에 승가는 전통을 중시하는 마하위하라파, 그리고 불교의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옹호하는 아브하야기리파로 분열됐다. 스리랑카불교사 최초의 승가분열이었다.

두 부파 사이에 율이나 논에 대한 견해 차는 없었다. 다만 마하위하라파는 삼장을 중심으로 초기불교의 원형을 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강조했다. 아브하야기리파는 인도 불교계와의 교류를 확대시키며 당시 활발히 전개되고 있던 다양한 부파를 수용해 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12세기 위대한 대왕으로 불리는 파라크라마바후에 의해 승가의 통합이 이뤄질 때까지 계속됐다. 삼장의 결집, 패엽경의 탄생은 다양한 부파의 전래와 교류 속에서도 스리랑카가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계승할 수 있는 뿌리가 되었다.

특히 5세기 불교사의 위대한 학승 붓다고사 스님이 인도로부터 싱할라왕국에 도착해 삼장에 대한 주석서를 팔리어로 번역하면서 더욱 견고한 문헌의 완성을 이룰 수 있었다. 붓다고사 스님에 의해 팔리어로 기록된 패엽경은 알루위하라에 온전히 보관돼 있었다. 이 경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 패엽경 제작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1815년 싱할라왕국의 마지막 국왕 위끄라마라자싱하를 퇴위시키면서 스리랑카를 식민지배하기 시작한 영국은 수시로 불거지는 싱할라족의 독립운동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1848년 마탈레지역에 독립운동 세력이 숨어있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다. 알루위하라 역시 소탕작전의 대상지였다. 영국군은 알루위하라 곳곳에 조성돼 있는 동굴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수천 개의 패엽경 뭉치가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영국군인들 눈에 패엽경은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사귀일 뿐이었다. 상당수의 패엽경이 영국군에 의해 소각됐다. 다행히 불길을 피해 살아남은 패엽경들은 이후 영국으로 반출됐다. 이후 영국에 팔리성전협회(PTS)가 설립되면서 패엽경 삼장은 ‘팔리어경전’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더불어 알루위하라도 패엽경 조성 성지로 이름을 드높였다.

알루위하라는 오늘날도 스리랑카 불교성지를 찾는 이들에게 반드시 순례해야할 성지 중의 성지다. 패엽경 조성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석굴도 있다. 10여명이 들어갈 만한 석굴 안에 흙으로 빚은 인형을 이용해 패엽경을 만들던 모습을 연출해 놓았다. 이 석굴에서 붓다고사 스님이 팔리어 주석서를 집필했다고 해 ‘붓다고사의 석굴’이라는 별칭도 붙어있다. 와불이 모셔져 있는 석굴과 지옥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석굴도 있다. 사원 안에 있는 작은 전시관에서는 패엽경 조성 과정을 살펴보고 체험도 할 수 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 노말 메일러는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이다”고 했다. 전쟁에 휘말린 국가, 법등이 단절될 위기 속에서 스리랑카의 승가는 굴복하지 않고 행동했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내딛는 용기이자 어떤 고난 속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필코 전하겠다는 금강석같은 전법의 의지였다. 그들의 용기와 눈물, 빛나는 신심 위에서 법음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알루위하라, 찬란히 빛나는 불교사에 경배올린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41호 / 2018년 5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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