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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층 중심 폭발적 성장’ 세계불교의 오늘

기자명 법보신문

21세기 인류의 희망 “불교를 주목하라”

■프롤로그
유럽과 북미에서 불교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미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해 프랑스불교연맹과 내무부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의 불교신자가 60만 명을 넘어섰고 프랑스 전역에 걸쳐 수만 명이 고정적으로 선원과 사원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극히 현상적인 사실만을 반영할 것일 뿐이다. 프랑스 한 여론 조사기관에 의하면 94년에 이미 가장 좋아하는 종교를 불교라고 응답한 프랑스 인구가 200만 명을 넘어서 개신교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4명 중 한 명이 업(業)과 환생을 믿는 것으로 조사됐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도 불교학을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를 포함해 불교를 종교로 믿고 있는 사람이 60만 명을 넘어선 지 오래됐으며, 불교학 연구의 역사가 깊은 독일의 경우 50여 개의 불교단체가 활동하고 있고 신도수도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현지 언론은 밝히고 있다. 이렇게 불교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것이 몇몇 국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서유럽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대륙에서의 불교열풍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에서는 지난 5년간 베스트셀러 10위 권에서 불교서적이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으며,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방문할 때면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고 있다. 그리고 미국 내에만 절과 선수련센터가 1,600개를 넘어서고 있으며, 오랜 전통을 가진 가톨릭 수도원과 신학대학원에서도 불교참선 프로그램을 신설해 매일 수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불교가 태동한 아시아보다 더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생활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구에서 불교에 매력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사상은 서구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뛰어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와 과학의 합리성만으로 재단해 온 세계관 인간관을 서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자연 속의 인간, 인간 속의 자연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철학과 과학을 분리해서 바라보고 있는 기독교 문명과는 달리 모든 인식론적 가능성을 수용, 철학과 과학과 전혀 대립할 필요가 없이 오히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불교의 세계관과 유사성을 띠는 것도 합리적인 서구인들에게는 큰 매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해 5월 프랑스의 불교열풍을 소개한 주간지 렉스프레스는 이러한 현상을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자비,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을 강조하는 불교 교리, 중국 당국에 대한 달라이라마의 비폭력적 태도도 그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으며, 이국적인 불교 의식도 또 다른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더불어 티베트와 일본을 선두로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대만 등 국가들이 세계 각지로 자신의 특성화된 불교를 알리는 한편 내부적으로 불교 교리체계와 문화를 공고히 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불교다. 외국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고 있지만 이는 티베트, 일본, 베트남 등 불교를 배우는 것일 뿐 한국불교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다. 이러한 현실은 외국 저명학자들이 쓰는 불교개론서에도 명확히 드러난다. 대부분의 불교서들이 동양의 불교사를 언급하고 있지만 거기서 한국불교사가 제외되는 것이 일반화된 추세다. 오히려 최근에는 해외의 이러한 불교열풍이나 일부 벽안의 외국 승려들에 의해 불교가 수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한국불교가 세계화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체성 모색에도 큰 혼란을 빚고 있다는 반증이다. “한국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불교”라고 강조한 미국인 현각 스님의 말이 아니더라도 한국불교를 특성화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해외에서의 불교 열풍은 단순한 얘기거리 혹은 다른 나라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유럽·북아메리카
이 땅에 부처님 오심을 기리는 연등절을 맞으며, 생각이 넓은 불자들은 지구촌 저편의 불교정황은 어떠한지 궁금히 여길줄 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불교신도수와 사원수의 꾸준한 증가 및 현지인들의 불교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그쪽 문화의 기본적 토양을 이루고 있지만 그들의 영향력 감소추세와 대조를 이루는 현상으로서 한국에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음을 감안해 본다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방대하여 전국적으로 정확한 체계적 자료를 만들기 어려운데, 아직은 수준급의 데이터를 확보한 곳이 없으므로 다양하고 산만한 자료들을 종합 유추하여 요량할 수 있을 뿐이다. 테라바다와 마하야나 및 바즈라야나 등 각종 불교 전통을 따르는 개인이나 집단들이 혼재하나 상호교류와 연계활동이 미약하여 불교계 내부에서 조사한 구체적 통계가 없는 실정인데, 유럽도 전체적으로 보면 비슷한 형편이다. 아무튼 미국의 불교인 숫자는 500만명 내외일 것 같고, 유럽도 그 정도 되지 않나 생각된다. 그렇게 크지 않은 세력에도 불구하고 주류사회에서 중요한 종교로 인식되며 존중받고 있다. 실제로는 많은 지성인들이 특정 사찰이나 불교센터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불교에 관심을 갖고 책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나름대로 불교지식의 섭수와 명상수행 방법의 이용을 통해 그들의 생활 속에 불교적 요소를 도입하고 있음이 알려져 있다.

그러한 현상의 원인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그리스도교는 그 설득력의 한계를 보여왔고 물질문명에 치우쳐 정신적 공황과 인간내면세계에 대한 지성인들의 자기 성찰이 동양 특히 불교로부터 대안을 얻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호기심 내지 기대심리가 작용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 불교계는 불교의 본고장인 아시아로부터 이민과 함께 전래된 전통불교인들과 불교를 필요에 따라 수입한 미국 현지의 불교인들 및 불교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며 자기방식으로 적응시켜 온 미국화된 불교인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스리랑카나 태국 등의 상좌부 전통과 중국과 일본 등 대승 전통 출신의 이민 불교도들은 어느 정도 안정과 타성에 젖어 있는 상태로 보이며, 월남과 캄보디아 및 티베트로부터 망명한 불교도들은 현지적응을 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감지된다.

한국불교의 유럽진출은 매우 취약하고 미국에도 다른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늦게 진출하여 교포위주의 포교에 안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민불교는 세대가 교체되며 현지에서 태어나 서구식 교육을 받은 신세대들에게 문화적 공감을 이루어 내지 못해 이미 세대간의 괴리를 보이고 있고, 수입불교는 피상적 전통답습을 시도하나 수요자가 제한되어 있으며, 원주민들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소화된 불교는 전통과는 비록 다른 양상을 띄고 있으나 현지의 토양에 적합한 내면화의 길을 걷고 있다. 결국 유럽엔 유럽식, 미국엔 미국식 불교가 발전하여 현지의 불교계를 주도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상좌부 계통의 동남아시아불교와 밀교적 티베트불교는 서구에서도 그들의 전통을 잘 보존 유지시키는 편이며, 대승적 동아시아 불교는 꽤 융통성이 있게 적응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남방불교인들은 의식과 계행(戒行)에 비중을 두고 외형적 전통의 유지에 힘쓰고, 티베트불교인들 역시 그들의 문화적 유산을 지켜나가려고 애쓰고 있다. 동아시아 대승불교도 이민들은 그들의 전통을 가능한 지켜나가려 하지만 현지적응에 신축성이 있고 형식보다 내용에 관심을 더 두어 대중성 확보에 탄력적이어서 세속화 경향이 강한 듯이 보인다. 특히 일본계의 서구화는 빠르게 진행되어 왔다.

서구 불교계의 학문적 경향은 연구자료의 전산화와 집중화를 통해 연구토대를 획기적으로 확대 강화되고 있으며, 특히 여러 대학과 연구소 등의 업적과 수준은 세계불교학계를 주도해 나가고 있다. 연구방법도 학제간 협조로 불교 외의 관련학문 성과를 활용하여 보다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이해와 서술로 논지의 설득력을 증대시켜 나가고 있다. 환경운동가 등 사회활동가들은 불교의 친환경성과 비폭력성에 관심을 보이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불이(不二)정신으로 생태계 보호에 앞장서며 채식이나 자연식을 지향하고 있다. 진보적 경제인들은 불교의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소비하며 베풀고 나누는 검소와 자족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내핍과 절약문화를 현대의 물량적 소비문화의 대안으로 추구한다.

근래 서구에서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는 반면, 불교에 다가오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현상은 불교인들을 고무시키고 자긍심을 갖게 할 줄 안다. 비록 적은 수의 불교도들이지만 종교다원주의적 분위기에서 다른 종교들과 동등하게 활동할 수 있으므로 불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고, 서구인들이 물질적 풍요 속에 정신적 빈곤을 느끼면서도 자기들의 전통적 종교문화에 만족할 수 없어 불교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본다.

만일 불교인들이 막연하고 안일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활해 나간다면 저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 불교인들이 능동적으로 서구인들에게 희망적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불교인들이 비불교인들이 겪는 실존적 문제와 타종교인을 포함하는 사회의 보편적 이슈에 적절하게 응답하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하며, 지혜와 자비를 일상 속에 구현하는 성실한 삶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참선과 구체적 보살행으로서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불교인들이 자기 사명을 다한다면 서구 불교계의 전망은 밝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진월스님/세계종교연합한국지부 대표·버클리대 박사

■티베트와 달라이라마
현재 서양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불교는 티베트 불교일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달라이라마가 있다. 달라이라마가 노벨평화상을 탄 이래로, 티베트와 티베트 불교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증폭되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을 만한 사람을 꼽으라면 달라이라마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그분의 사고는 매우 합리적이다. 최첨단의 과학에도 관심이 많다. 종교인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한다. 인간 속에 숨어있는 선한 마음과 자비와 용서를 개발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목적이지만, 종교가 없이도 선량하게 사는 사람들을 그는 존중한다.

그런 태도가 서양인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 그분 자신은 불교가 가장 정교하고 완벽한 종교라고 믿고 있고, 불교 수행자로서 살아왔기 때문에 불교를 수행하고 가르치지만, 모든 사람에게 불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람들마다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기질에 맞는 종교를 고를 수 있도록 종교가 다양한 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합리적인 정신은 티베트 승려들 대부분에게서 발견된다. 그들은 중생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수행한다. 수행의 동기가 중생을 도우려는 마음이다.

서양에는 현재 티베트 불교센터가 없는 곳이 거의 없다. 그들은 평범한 공간을 빌려서 불교센터라는 이름을 붙이고, 정기적으로 모여서 법문을 듣고 명상하는 장소로 쓴다. 티베트 불교사회에서 자격을 인정받은 수행자들이 그 센터들을 방문해서 법문을 하고 수행을 가르친다. 티베트 음력으로 매해 정월 보름날이면 달라이라마는 약 보름 동안 설법을 한다. 해마다 경전 하나씩을 선택해서 주석을 붙이며 설명하고, 특별한 명상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입문식을 거행한다. 매해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휴가를 내고 법문에 참석하는 서양인들의 수가 천 명을 넘는다.

중국화교들에게도 티베트 불교는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 대만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도 수많은 티베트 불교 센터들이 있다. 그들도 단체로 이 법문을 들으러 온다.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 티베트 망명인들과 중국 치하의 티베트인들도 이 법회에 참가하기 위해 온다. 중국에서 출국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두 달 동안 몰래 산을 걸어 넘어서 인도로 들어와 이 법문을 듣고는 다시 티베트 본토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편안함이 아니라 남들을 적극적으로 도울 것을 강조한다. 나의 행복과 고통은 남들의 행복과 고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중생들의 행복을 구하는 것이 더 먼저이기 때문이다. 효과를 중요시하는 서양인들이 티베트 불교에 매혹을 느끼는 이유는 수행한 만큼 스스로 효과를 확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자비심이다. 전생의 한번쯤은 내 부모였을 고마운 중생들이 윤회의 고통 속에서 헤매는 것을 차마 못 보겠으니,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 부처님의 경지를 얻겠다는 마음이 보리심이다. 자비심에서 보리심이 생기고, 보리심은 부처를 만든다. 특히 자비심은 지구의 자원을 인간만의 독점물로 생각하고 착취하고 파괴하는 일에 죄의식을 느끼게 한다.

생명 유지를 위한 적당량의 음식만을 자연에서 취하는 절제력을 기르고, 다른 생물들이 인간과 공존할 수 있도록 자연 환경을 보살피며, 선진국이 후진국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을 부당하게 여기고 바로 잡도록 대항하고, 무기거래를 범죄로 선포하고 인간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불교 사상을 가진 사람들뿐이다. 중생이 윤회에 남아있는 한, 끝까지 남아서 그들을 해탈로 인도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서원을 세운 이를 보살이라고 부른다. 보살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승불교이다. 티베트 불교에는 보살정신이 핵심이다. 티베트 고승들은 중생이 법문 듣기를 원한다면, 언제든 기꺼이 달려가 법문을 해준다. 중생을 돕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티베트 수행자들의 공통점은 겸손하고 따뜻하고 소박하고 검소하다. 티베트 불교 수행에서 항상 강조하는 것은 모든 중생을 내 부모처럼 생각하라는 것과, 내 행복을 남에게 주고 남의 고통을 내가 떠맡으려고 생각하라는 것과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영원한 실체가 없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생의 욕심에만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숙고하며, 모든 중생들을 고통스런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서 붓다의 경지에 오르고 싶다는 보리심을 일으킬 것을 강조한다.

달라이라마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말로 법문을 한다. 윤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교리인 ‘공성(空性)’과 ‘연기법’이라는 어려운 주제도 쉽고 명확한 말로써 대중에게 설명하시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지나친 개인주의로 인해 인간 관계가 단절된 서양 사회에서 인간의 애정과 올바른 유대관계를 회복하는 데 티베트 불교의 수행이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체험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환경파괴와 인간 복제기술로 인한 인간성 파괴의 위협이 눈앞에 닥친 21세기의 인류를 보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희망일 지도 모른다. 최첨단 과학기술의 개발을 놀이로 삼고 있는 철없는 천재들과 그들을 이용해서 떼돈을 벌려는 천박한 장사꾼들과 그들의 뇌물을 먹고사는 정치가들이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어차피 그것이 대세이니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손놓고 있어야 하겠는가? 이제 우리는 어떤 미래를 선택할 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주민황/동국대 강사·인도 델리대 박사

■인도·동남아시아
오늘 날 스리랑카, 미얀마, 캄보디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는 남방불교는 전체적으로 스리랑카 상좌부(Theravada) 계열의 불교를 근간으로 삼는다. 이미 알고 있듯이 상좌부란 불멸 후 100여 년이 지난 후 변해 버린 시대상황과 교리의 불일치에 대한 해결을 위해 경전의 제2결집이 행해지고 이 근본분열에서 시대의 변화에 순응하려는 대중부에 맞서 전통의 고수를 주장했던 장로들 중심의 일종의 보수적 색채가 강한 불교부파를 일컫는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남방불교는 자신들이 초기불교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편 스리랑카 상좌부는 인도 최초의 통일왕조를 이룩했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이 적극적인 불교 포교정책을 펴는 가운데 왕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를 스리랑카에 파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원래 스리랑카는 인도의 2대 서사시 가운데 하나인 라마야나에서는 라마의 부인 시타를 납치한 악마 라바나가 다스리는 악마의 땅으로 묘사되지만 불교에서는 능가경의 탄생과 연관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불교와 연관이 깊은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는 자체적으로 빨리어 경전을 편찬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13세기초 밀교의 중심지였던 날란다사와 비끄라마쉴라사가 이슬람세력에 의해 파괴됨으로써 벵갈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불교가 자취를 감춘 시기에는 오히려 불교사상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실제로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는 미얀마, 태국 등과 같이 동일한 남방불교권에 그들의 교리를 전했을 뿐만 아니라 1891년 다르마빨라에 의해 설립된 보드가야 마하보디협회(Bodhgaya Mahabodhi Society; 대각회)의 운동과 암베드까르의 신불교 운동을 통해 힌두교 속으로 흡수돼버린 인도 불교를 다시 살려내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상좌부 계열의 남방불교는 경장(니까야)과 율장(비나야)이 중심이 된 빨리어 경전의 내용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고 간주되는 사성제, 삼법인, 연기, 무아설 등의 초기 이론과 더불어 윤리적 수행공동체로서의 승단을 매우 중요시하는 특징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북방불교가 부처님을 어느 정도 신격화하는데 비해 진리와 윤리적 교사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역사적 존재만을 중심으로 삼는다. 이 가운데 승단은 실제로 사회전체의 윤리와 도덕뿐만 아니라 때로는 법률과 같은 정치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기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방 불교 국가에서 일반인의 승려에 대한 신뢰와 존중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참여는 그들이 그 사회의 가치를 책임지고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같은 전통주의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남방불교가 아무런 변화 없이 초기 불교의 특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남방불교는 비록 북방의 대승불교처럼 불교자체내의 개혁적 요인에 의한 것은 아닐지라도 시간의 흐름과 그것이 전해진 지역의 여러 가지 외부적 상황에 따라 나름대로의 변화를 겪으면서 현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남방불교의 현대화에 가장 큰 자극이 되었던 외적 요인으로는 16∼17세기 서양세력의 아시아 진출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스리랑카에서는 이시기에 포르투갈과 독일인들의 침입으로 승단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생활체제가 극심한 혼란에 빠지면서 상좌부 계열의 불교자체가 거의 소멸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하여 18세기 태국과 미얀마로 승려들을 파견해 이전에 그들이 전했던 불교를 다시 역수입하여 체제를 정비하기도 한다.

이후 19세기 유럽열강이 아시아지역을 그들의 식민지로 강점하는 과정에는 이전보다 더 큰 혼란에 빠져 버린다. 이때 스리랑카의 불교는 한편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서구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상과 문화를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가 아닌 주로 농촌지역에서 이전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 서로간의 대립과 반목을 계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도 20세기에 접어들면 이미 많은 부분에서 서구 산업주의의 영향에 물들어 버린 현실 앞에서 농경문화적 토대 위에서 성립되었던 불교는 스스로 변해 버린 환경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서도 남방불교의 승려들은 현대화의 토대를 서양사상과 문화의 무조건적인 유입에서가 아니라 불교경전 속에서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인간의 이성을 중요시한 부분을 찾아내 서로간의 접목을 시도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불교적 이성과 논리를 근간으로 서양사상과 문화에 대한 재해석뿐만 아니라 현대과학까지도 불교적 목적에 어긋나지 않는 방향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또한 사회적인 문제에서는 부처님의 브라흐마니즘에 대한 비판에서 나타난 사회개혁정신을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 접목시킴으로써 이전까지 수행중심의 승려모습에서 벗어나 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결과 오늘날의 남방불교는 단순히 출가승 중심의 종교와 더불어 사회종교의 형태를 함께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오늘날의 남방불교는 전체적으로 스리랑카 상좌부를 모태로 삼는 관계로 국가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남방불교는 도덕적 윤리적 책임과는 별개라는 과학적 기반 위에서 발달한 산업화의 조류 속에서도 인간과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도 서로간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려는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러한 태도는 환경문제나 인간소외 등과 같은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유용한 해결책인 동시에 미래 사회에서의 불교의 역할을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김형준/중앙대 강사·델리대 박사

■불교 박사학위논문 매년 100편씩
한 해 동안 불교학과 관련된 박사학위 논문은 몇 편이나 될까. 김종명(서강대) 교수의 연구논문 ‘국내불교학 연구의 방향-북미주의 연구동향과 비교하여’란 논문에 따르면 1980년대 처음 불교학 관련 논문이 나오기 시작해 지금까지 최소한 450여 편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주목할만한 점은 80년대 들어 평균 18.1편, 90년대에는 평균 25.6편이 매년 발표될 정도로 불교학 연구가 급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결과는 세계 7대 종교 중 불교(16.9%)가 기독교(56.5%)에 이어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는 것.

또한 영국 옥스퍼드대 및 런던대, 프랑스 소르본드대 등을 비롯한 유럽의 유수대학에서 매년 10여 편 이상의 논문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 유럽불교학자들의 전언이다. 여기에 일본에서 불교학 과목을 개설하고 있는 84개 대학에서 나오는 박사학위 논문과 우리 나라에서 나오는 불교관련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하면 매년 100여 편 이상의 새로운 박사학위 논문과 전문가가 배출된다고 볼 수 있다.

■서구불교는 티베트 불교?
최근 서구에서 불고 있는 불교 열풍은 사실상 티베트 불교가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티베트 불교의 붐은 달라이라마의 개인적 인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2월로 즉위 60년을 맞은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인들에게는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세계인들에게 인류의 양심·평화의 전령사로 숭상되고 있다. 미국의 한 종교학자는 달라이라마를 가리켜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이래 인종과 종교의 벽을 뛰어 넘을 유일한 지도자”라고 극찬했다.

1959년 중국의 탄압으로부터의 망명이 오히려 티베트 불교의 독특한 문화와 종교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 현재 미국에서만 스스로 불교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5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특히 리처드 기어, 해리슨 포드, 스티븐 시걸, 올리버 스톤, 줄리아 로버츠, 마틴 스콜세지, 멜 깁슨 등도 열렬한 티베트 불교도 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 몇 년 간 제작된 영화도 〈티베트에서의 7년〉, 〈쿤둔〉, 〈레드코너〉, 〈바람말〉, 〈프리 티베트〉, 〈컵〉 등 10여 편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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