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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본사를 찾아서-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

기자명 이창윤

번뇌 잠든 큰 바다엔 부처님말씀 가득하고…

해인사(海印寺)의 사명(寺名)은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때 우주의 온갖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海]에 비치는[印]는 경지를 말한다.

창건주 순응 스님

사명이 《화엄경》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해인사가 화엄사상을 이념으로창건된 사찰임을 의미한다.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과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는 의상 스님의 가르침이 전해진 사찰 10곳[華嚴十刹]을 기록돼 있는데, 해인사 또한 화엄십찰의 하나다.

해인사의 창건주는 순응(順應) 스님이다. 스님은 신라 애장왕 3년(802)에해인사를 짓는데 해동화엄의 종조 의상 스님의 제자인 신림(神琳) 스님이그의 스승이다. 스님은 해공왕 2년(766)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와 해인사를 창건하는데, 그 과정은 전하는 기록에 따라 다소 다르다. 해인사의 창건을 기록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최치원의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900)는 순응 스님이 유학에서 돌아온 뒤 애장왕의 할머니인 성목태후(聖穆太后)의 도움으로 해인사를 창건하고 이정 스님이 그 뒤를 이어 완성했다고 전한다. 이에 비해 창건연기를 전설적으로 그리고 있는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943)은 순응·이정 두 스님이 중국 양나라 때의 고승 보지공(寶誌公)의 《답산기(踏山記)》를 가지고 돌아와 애장왕의 도움으로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로다른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두 창건설화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던 순응(·이정) 스님이 귀국해 해인사를 창건하고, 왕실(성목태후 또는 애장왕)이이를 도왔다는 큰 줄기만은 일치한다.


북악종장 희랑 스님

이후 해인사의 화엄종풍은 이정 스님의 뒤를 이어 주지가 된 결언(決言)스님과 현준(賢俊)·희랑(希朗) 스님에게 이어진다. 결언·현준 스님은'종남산엄화상보은사회(終南山儼和尙報恩社會)'를 조직했던 분들이다. 이시기에 해인사는 신라화엄종의 중심무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당시 화엄종은 북악과 남악으로 나뉘어져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북악의 종장이었던희랑(希朗) 스님이 해인사에 주석했고, 남악의 종장인 관혜(觀惠) 스님도잠시 이곳에 머물렀다. 두 학파의 주장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화엄종을 양분하고 있던 북악과 남악의 종장이 해인사에 머물렀던사실을 통해 해인사가 희랑 스님의 문도가 활동하던 부석사나 남악의 본거지였던 화엄사와 함께 화엄종의 중심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희랑 스님대에 이르러 해인사는 고려 태종의 시주로 크게 중건케 된다. 남악의 종장이었던 관혜(觀惠) 스님이 후백제 견훤의 복전이었던 것에 비해 스님은 고려태종의 복전이었다. 스님은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태조의 승리를 도왔으므로 태조가 전지(田地) 5백 결(結)을 헌납하여 당우를 중건케 했다는 것이다. 해인사가 자리한 가야산은 최치원이 가족과 함께 은거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그는 희랑 스님과 시문을 주고 받으며 교유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의 고승들

화엄종찰로서의 해인사의 위상은 고려대에 이르러서도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나 각해 체원(覺海 體元) 스님에 의해서 이어진다. 의천 스님은 40세(1095)를 전후하여 해인사에 머물렀다. 스님은 본래 화엄종의 도승통(都僧統)이었던 경덕국사 난원(景德國師 爛圓) 스님에게 출가해 그로부터 화엄교관을 배운 화엄학승이었다. 중국과 거란, 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경서를 모아 속장경을 간행했던 스님은 천태종의 개조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화엄종과선종으로 나뉘었던 불교계를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천태사상으로 회통하려 했기 때문이다. 스님이 해인사에 머물렀던 시기는 국청사에서 천태종을개창하기 전이었다. 고려 충숙왕대에 활약했던 체원 스님은 해인사에 머물며 의상 스님의 <백화도량발원문>을 주석한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와 40화엄 중 제28 관음법문을 주석한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 《화엄경 관음지식품(華嚴經觀音知識品)》 등을 저술한 화엄학승이다.

고려대장경과 법보종찰

통일신라와 고려대를 거치면서 화엄종찰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했던 해인사는 태조 7년(1398)에 강화도 선원사에서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던 고려대장경을 이곳에 다시 봉안하면서 법보종찰로서의 명맥을 잇게 된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고려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몽고군을 격퇴하려는 염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고종 23년(1323)에 설치된 대장도감에서 16년에 걸쳐 조성한 고려대장경은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유명하다. 고려대장경의 봉안을 계기로 해인사는 왕실과 재상들의 귀의를 받으며 조선조의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한결같은 사세를유지한다. 태조는 대적광전 앞 삼층석탑을 보수하고 대장경을 인출했으며,5교양종을 선교양종으로 통합됐던 세종대에도 해인사는 전국에 남은 16개사찰 중 하나로 전답 2백 결과 승려 1백 명을 지정받았다.

세조는 경전을 널리 홍포하여 군생(群生)을 제도하려고 즉위 5년(1459)대장경 50벌을 인출하고, 경상감사에 명하여 비좁고 허술한 장경판전 40여칸을 새로 짓게 한다. 이어 성종 14년(1483)에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해인사 중건의 뜻을 세웠지만 이루지 못하고, 같은 왕 19년(1488)에 인수(仁粹)·인혜(仁惠) 두 왕비가 정희왕후의 유업을 이어 등곡 학조(燈谷 學祖)스님을 총책임자로 하여 3년 동안 기울어진 판전을 비롯해 대적광전, 요사등 1백60여 칸을 세웠다고 한다. 석굴암, 불국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등재된 판전은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이 판전은 통풍을 위해 창문이 개방됐음에도 불구하고 날짐승이 날아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며, 여러 차례에걸친 화재에도 재난을 면하며 오늘날까지 온전히 보전되는 신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잦은 화재와 중창

성종대의 대규모 중창 이후 해인사는 여러 차례 중건을 거치며 오늘날과같은 가람배치를 이루는데, 불사의 대부분은 화재에 의한 것이다. 숙종 21년(1695)과 그 이듬해 일어난 화재로 만월당, 원음루 등이 불타자 뇌음(雷音) 스님이 중건했고, 영조 19년(1743)에도 수백 칸이 불타는 대화재가 일어나 경상관찰사 김상운의 도움으로 능운(凌雲) 스님이 복원했다. 또 같은왕 39년(1763)과 정조 4년(1780), 순조 17년(1817), 고종 8년(1871)에도 크고 작은 불이 일어나 설파(雪坡,1763)·성파(星坡, 1780)·영월(影月)·연월(淵月, 1817) 스님 등이 각각 중건했다. 순조때의 복원에서는 경상감찰사인 김노경(金魯敬)의 도움이 컸는데, 그는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다. 김노경은 아들을 시켜 대웅전 건립을 위한 권선문과 상량문을 짓게 했는데, 김정희는 화재를 방비하고 진압하기 위해 상량문에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의 8방 16불명(佛名)과 《아미타경》의 6방 불명으로 육위사(六偉詞,상량문 끝에 부치는 노래)를 읽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의 고승들

고려대장경이 봉안됨으로써 법보종찰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한 해인사에는이후 기라성 같은 고승대덕들이 끊임없이 주석하며 한국불교의 정맥을 이어갔다. 청허 휴정(淸虛 休靜) 스님과 함께 한국불교의 2대 문파를 형성한 부휴 선수(浮休 善修) 스님을 비롯해 승병장 사명 유정(四溟 惟政) 스님, 부휴 선수 스님의 제자인 벽암 각성(碧巖 覺性)·고한 희언(孤閑 戱言) 스님같은 선의 종장들이 이곳 해인사에 주석했다. 또한 청허 휴정→편양 언기(鞭羊 彦機)→풍담 의심(楓潭 義諶)→환성 지안(喚醒 志安)으로 이어지는법맥을 이은 호암 체정(虎巖 體淨) 스님이나 그의 제자인 연담 유일(蓮潭有一)·설파 상언(雪坡 尙彦) 스님, 편양 언기 문파의 호은 유기(好隱 有璣) 스님 등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이어온 화엄학의 맥을 조선시대까지 전한 화엄강주(華嚴講主)들이다.


해인총림 해인사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들어서도 해인사는 그 사격을 인정받아 영남불교의중심 도량으로 거듭 자리매김한다. 광무 6년(1902) 원흥사를 전국의 수사찰로 하고 전국에 16개의 중법산(中法山)을 때 영남의 중법산으로 수사찰이됐으며, 1911년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으로 전국을 31본산으로 나누었을 때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됐다.

구한말과 일제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해인사에는 많은 고승들이 주석하며 법등을 밝힌다. 근세 한국선의 중흥조라고 일컬어지는 경허 성우(鏡虛惺牛)이 광무 3년(1899)부터 이곳에 주석하며 경전간행불사와 수선사(修禪社) 신설사업의 법주가 된 것을 비롯해, 한암 중원(漢巖 重遠)·용성 진종(龍城 震鐘)·효봉 원명(曉峰 元明)·청담 순호(靑潭 淳浩)·지월 병안(指月 炳安)·구산 수련(九山 秀蓮)·인곡 창수(麟谷 昌洙)·영암 임성(任性)·자운 성우(慈雲 盛祐)·고암 상언(古庵 祥彦)·퇴옹 성철(退翁 性哲) 스님 등이 이곳에 주석하거나 거쳐갔다. 화엄도량으로 명맥을 이어왔던 해인사는 이 스님들에 의해 종합수도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1946년에는 가야총림(방장 효봉 원명 스님)이 개설됐고, 1962년에는 해인총림(초대방장 퇴옹 성철 스님)이 설치됐다.

현재 해인사는 2002년 개산 1천2백주년을 앞두고 각종 사업을 주진하고있다. 올 부처님오신날을 전후해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해인사 성보문화재전시회를 여는 것을 비롯해, 사중의 각종 성보문화재를 전시할 성보박물관을 5백 평 규모로 세울 예정이다. 또한 국제회의장을 갖춘 불교회관과 만불전도 함께 마련해 재가와 승가를 망라한 교육·수행의 도량으로 가꾼다는복안이다. 해인사는 또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일요법회를 개설하고 신앙상담소를 개설 운영하는 등 포교사업에 힘을 기울일 예정이다. 판전의 번와불사도 올해 추진하고 있는 중요 사업의 하나다. 해인사의 당면과제는 뭐니해도 상징물인 고려대장경의 완벽한 보존이다.이미 고려대장경연구소를 설립해 전산화와 과학적 보존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해인사는 고려대장경 보존에 악영향을 미칠 해인골프장 건설을 완전히취소될 때까지 각 사회단체와 연대해 지속적으로 범국민운동으로 펼쳐갈 계획이다. 또한 고의에 의한 불의의 사고를 미연에 막기 위해 감시카메라를설치하는 등 판전에 대한 종합적 보호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합천=이창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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