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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보시의 근본 지침

기자명 법보신문

가장 소중한 것까지 내놓는 것

카필라바스투는 부처님의 고국이다. 불전에서 가비라위국 또는 가비라성이라고도 불리는 곳이 이곳이며, 부처님 같은 성자의 고국임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있던 사위성의 유리왕에 의해 멸망한 비운의 나라이다. 가비라성을 침공하려는 유리왕의 두 차례의 시도는 부처님에 의해 무산되었다. 그러다가 유리왕은 부처님이 멀리 떠나 있는 기회를 포착하여 가비라성을 함락시키고, 부처님의 동족인 석가족을 학살하는 잔학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무작정 베푸는 건 보시 아니다

이때 마하남이라는 수행자는 유리왕에게, 자신이 연못에서 잠수해 있는 동안만이라도 잔학 행위를 중지해 달라고 부탁했다. 왕이 허락하자 마하남은 물속으로 들어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물속을 조사해 보았더니, 마하남은 물속의 나무뿌리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은 채 죽어 있었다. 유리왕은 이에 감동하여 잔학 행위를 중단했다. 증일아함경에서 전하는 이 이야기는 왕의 복수욕에 자기의 몸을 바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구한 보시의 고귀한 정신을 일깨운다. 이 같은 정신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대지도론에서는 ‘시비’라고 불리는 왕이 비둘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살덩이를 베어 주는 지극한 보시의 정신을 일깨운다.

매에게 쫓기던 비둘기 한 마리가 왕의 품속으로 숨어 들었다. 뒤쫓아온 매는 왕에게 비둘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왕이 모든 중생을 구호하겠다고 맹세했으므로 줄 수 없다고 말하자, 매는 날고기를 먹고 살아야 하는 자기도 그 중생에 포함되므로 자기의 먹이인 비둘기를 달라고 대꾸했다. 이에 왕은 비둘기 대신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주었다. 그러자 매는 비둘기와 똑 같은 무게만큼의 살을 달라고 했다. 왕은 온몸의 살을 차례로 베어 내어 저울에 달아 보았으나, 베어 낸 살의 무게가 계속 비둘기보다 가볍기만 했다. 이러기를 계속하다가 왕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왕이 중생을 구하기 위해 이 같은 고통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진심을 다시 토로하자, 왕의 몸은 회복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몸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6바라밀 중에서 보시 바라밀, 즉 보시의 완성은 한마디로 ‘신체를¡

버리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그러므로 보시란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까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베푸는 정신이다.

[학처요집]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승집보살학론]에서는 신체, 재물, 공덕을 베푸는 것이 보시라고 설명한다. 즉 자신의 몸과 온갖 소유물과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공덕을 베푸는 것이 보시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무작정 베푸는 것이 보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생명이나 신체를 부질없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잊지 않는다. 단 한 사람을 구제하려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손실이 되는 보시는 바른 보시가 아니다. 이러한 보시는 보살의 자비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공덕 쌓는 최고의 미덕

증일아함경에서는 6바라밀을 온전하게 실행하여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는 근본 지침을 네 가지로 제시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것은 사실상 보시의 근본 지침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4법본(法本)이라고 불리는 그 지침은 이러한 것이다.

첫째, 모든 중생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생각하여 평등하게 보시한다. 둘째, 머리와 눈 등과 같은 나의 몸, 나의 재물과 아내와 자식과 나라까지도 기꺼이 보시하되, 이런 보시에 대해 애착하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셋째, 보시의 공덕이 자신의 깨달음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미치게 하도록 보시한다. 넷째, 보시를 실천함으로써 모든 중생의 으뜸인 보살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지침들이 공통으로 암시하는 것은 자신의 보시 또는 공덕에 애착하거나 자만하지 말라는 순수한 이타적 정신이다. 불교에서는 진즉부터 보시가 공덕을 쌓는 최고의 미덕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그 공덕은 나를 위한 공덕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공덕임을 강조하는 것이 6바라밀의 보시이다.

보시의 관념은 물질을 베푸는 재시(財施) 외에,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평안하게 해 주는 무외시(無畏施), 진리와 지혜로 이끌어 주는 법시(法施)로 확장되어, 보시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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