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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울립 한송이와 이라크 전쟁

기자명 혜민 스님

꽃 한송이도 소중하게 여길 때

미국 뉴욕에도 봄이 오는가 보다. 벌써부터 따스해진 햇볕이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겨울동안 몸을 칭칭 감고 있던 거추장스런 털모자와 두꺼운 승복을 훌훌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공원과 산으로 산책을 나섰다. 열쇠, 지갑 등 몸에 항상 소지했던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최소한의 옷만 두른 채 가벼워진 몸으로 봄이 오는 길목에서 대자연과 만나고 싶었다.

봄의 햇살이 얼굴에서 온몸으로 퍼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따뜻한 기운을 내려주는 해님에게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즐거운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노란색 튜울립 한 다발을 샀다.

봄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튜울립은 보스턴의 하버드대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을 때 나에게 봄이 왔음을 가장 먼저 알려주던 꽃이다.

보스턴 시내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공원을 하나 가득 메우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던 노랑, 빨강, 하양, 보라색 형형색색의 튜울립이 손에 잡힐 듯 지금도 눈에 선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와 방금 산 튜울립을 꽃병에 담아 방 한 귀퉁이에 놓아두었다. 방안은 어느새 겨울의 칙칙한 때를 벗고 싱그러운 봄기운이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어느 고급스런 일류 호텔의 스위트룸이라도 들어 온 듯한 느낌이다. 꽃 몇송이가 주는 놀라운 위력에 『화엄경』한 대목이 절로 떠올랐다. '꽃 한송이가 지면 전 우주가 함께 진동한다'이 경구는 아마도 만물은 자성(自性)이 없이 서로 의존하면서, 존재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타낸 말일 것이다.

생각에 여기에 미치자, 기쁨도 잠시 갑자기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튜울립에 애잔한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뿌리를 내렸던 삶의 터전에서 꺾여 내 방 한구석에 놓이기까지 튜울립들은 얼마나 슬픈 외침으로 온 우주에 진동했을까? 나도 모르게 승려로써 부끄러운 생각이 울컥 밀려들었다.

비단 한송이 꽃이 이럴진대 사람들의 소중한 목숨은 또 어떻겠는가?

미국은 결국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은 군인들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또 전쟁이 끝난다 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참화로 인해 초토화 된 땅과 나무, 호수들이 다시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면 또 많은 세월이 지나야 될 것이다.

이라크의 임신부들이 전쟁이 일기 전 아이의 예정 출산일과 상관없이 하루라도 빨리 애를 낳으려했다고 한다. 전쟁이 나면 다친 군인들로 인해 임신부들이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란다.

전쟁을 감행하는 미국도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미국 내 테러를 우려해, 곳곳에는 중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을 배치돼 있다. '꽃 한 송이만 져도 전 우주가 진동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번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고, 전 우주는 또 그렇게 슬픔으로 진동할 것이다. 벌써부터 가슴속 깊이 그 파장이 밀려오는 것 같다.



혜민 스님 vocalizethis@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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