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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자와의 만남 - 이찬수 교수(강남대, 비교종교학자)

“타종교 비방은 편견 - 무지의 소치”

불교라는 명사적 표현보다 불교적이라는 인식 필요
이찬수 교수는 신학자인 동시에 불교학자이며 비교종교학자이기도 하다. 서강대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비교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동국대, 서울대, 이화여대 등에서 비교종교학을 주제로 강의를 했으며, 현재는 강남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7월 10일 경기도 분당에서 그를 만나 비교종교학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종교학을 연구하는 이유는.



“대학시절 종교적 전환을 경험한 이후 다양한 종교들 안에 드러나는 궁극적인 것 혹은 진리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나의 실존적인 관심 때문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종교이며, 종교는 그 자체가 삶이다. 다양한 종교들을 느끼면서 앎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뿐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지혜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학자로서 불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종교적인 가르침을 수치로 표현하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오해의 여지를 무릅쓰고 억지로라도 표현해보자면, 내가 아는 한 불교가 90%쯤 완성된 종교이고 기독교는 70% 가량 완성된 종교이다. 특히 교리적인 완성도에서 보면 불교는 그리스도교를 포함하고도 남을 깊이와 넓이를 가졌다고 본다.”



‘많은 종교가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왜 그런가.



“문화와 문화가 만난다는 것은 충격과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자신의 문화를 반성하고 타문화를 포용함으로써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인류문화의 결정체인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들이 서로 만나고 대화함으로써 배울 것은 배우고 고쳐야 할 것은 고쳐나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종교를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학)계의 타종교 이해 수준은.



“불교는 스스로에 대해 깊고 넓은 종교라는 자긍심만을 가졌을 뿐 정작 다른 종교나 사상을 실제로 포용할 만큼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연구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불교는 내심 기독교보다 한 수 위라는 심리적 위안을 가질 뿐, 구체적으로는 무엇이 그런지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자세는 별반 보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불교종립대학에서조차 일반 종교문화와 전통을 연구할 수 있는 학과도 개설돼 있지 않은 상태다.”



불교는 왜 타종교에 대해 알아야 하나.



“‘하나만 알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비교를 통해 자신의 종교를 더 잘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완성도가 70% 정도라고 해서 언제까지 70%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남은 30%를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많다. 불교도 나머지 10%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럴 때에만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문화가 제대로 보일 것이다. 또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양을 제대로 보아야만 불교가 미래 사회에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수천 년의 역사는 그렇게 간단하거나 만만하지 않다. 불교도 그렇지만, 기독교도 2000여 년이 넘는 역사를 통해 수많은 천재들이 평생을 바쳐 연구해왔다. ‘배울 것이 없다’고 일축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생각이며 나아가 매도일 뿐이다. 더욱이 서양에서는 대다수 불교 고전을 영역해 진지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동양에 그 결과를 역수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불교가 정말로 깊고 넓다면 밖의 것을 소화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야 한다.”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 등 일본 교토학파 철학자들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다면.



“그들은 선(禪)이나 공관(空觀) 등 불교철학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전통적인 불교의 언어와 사유틀보다는 서구의 철학적 정신을 꿰뚫음으로써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을 하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이들이 종횡무진 사용하는 서양의 언어 속에서도 언제나 불교정신은 빛나고 있다. 실제 그들의 불교철학 내지는 논리가 미국은 물론 유럽인들에게도 불교를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편승했던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 학문방법론은 여전히 우리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종교인 숫자가 전체 인구수를 초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될 정도로 우리나라에는 많은 유형의 종교와 종교인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으면 종교, 네가 믿으면 미신’이라는 식의 갈등과 배타적인 태도가 커지고 있다. 원인이 무엇이라 보는가.



“종교의 내적이고 보편적인 세계는 닫아두고 또 그 진정한 의미는 알려 하지 않은 채, 그 외적이고 차별적인 측면만 보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즉, 종교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가리는 거대한 울타리들만 만들어놓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마다 자신의 종교 안에서만 최상의 모습을 보고, 자기의 세계관만을 기초로 듣고 이해할 뿐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들의 진리를 안다면 결국 자기 쪽으로 올 수밖에 없다는, 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분명한 것은 바로 모든 종교들에서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타자와는 담을 쌓은 데서 오는 이러한 견해들은 결국 무지의 산물임을 알아야 한다.”



매년 ‘부처님 오신날’만 되면 전국의 사찰들이 긴장할 정도로 불교는 특정 종교로부터 많은 훼불을 당해 왔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옛말처럼 어쩌면 타종교로 인해 불교계마저 배타성이 강해지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된다. 특별히 개신교 안에 이러한 분위기가 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교단이나 교회에 따라 천차만별이기는 하지만 의외로 열린 마음으로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도 기독교이다. 배타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그 배타성을 타파하려는 사람들이 꿈틀거린다는 것이다. 특정 잘못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따라야겠지만, 행여 똑같이 호전적인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큰형님같은 넉넉함, 큰누님같은 인자함으로 대화의 실마리를 찾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종교관을 가져야 한다고 보나.



“순수한 불교인, 순수한 기독교인, 순수한 유교인이란 없다. 불교 속에 기독교가, 기독교 속에 불교가, 혹은 불교 속에 유교가 일정정도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사학자 캔트웰 스미스의 말처럼 종교들을 명사로서가 아닌 형용사적으로 보는 개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즉 불교, 그리스도교, 유교와 같은 명사적 표현보다는 불교적, 그리스도교적, 유교적 등의 형용사적 표현을 중시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불교적인’ 것은 불교 안에 있으면서도 불교 안에만 갇히지 않고, ‘그리스도적인’ 것 역시 그리스도교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교 안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선적인 그리스도교인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적인 사람을 불교 안에서도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여느 불교인 못지않은 불교적인 사람을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에 있어 전제돼야 할 사항이 있다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해야 이해가 되고, 그래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모른 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앞으로 계획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깊이의 차원에서 서로 소통하고 상호 충분히 배울 수 있음을 논문과 저술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알려나갈 것이다. 물론 이들을 적당히 섞어놓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철저히 그리스도교로 남으면서도 불교와 통하고, 불교는 철저히 불교로 남으면서도 그리스도교와 통하는 그런 세계임을 더 많은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무엇보다 내 자신이 온 몸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찬수 교수는 - 불자같은 열린 기독교인, “종교간 대화” 학문 목표



이찬수(40) 강남대 교수는 ‘불교를 사랑하는 종교철학자’이며 ‘불자보다도 더 불자다운 기독교인’이다.

처음에는 서강대에서 화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원은 종교학과로 진학해 ‘선과 신(信)-보조국사 지눌의 선사상을 중심으로’(서강대, 1989)란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신학과에서 다시 ‘초월 개념에서 열리는 종교 신학적 지평-칼 라너의 신학을 중심으로’(서강대, 1993)란 논문으로 다시 한 번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박사과정에서는 다시 종교학과로 돌아와 불교와 기독교의 철학을 비교한 ‘신, 인간 그리고 공-칼 라너와 니시타니 케이지 비교 연구’(서강대, 1998)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기독교 서적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불교를 생각하고 불교를 보면 기독교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감신대, 동국대, 서울대, 이화여대 등에서 비교종교학을 주제로 강의를 했으며, 지금은 강남대 교양학부 소속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불교를 비롯한 종교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 연구함으로써 불교와 기독교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할 수 있었고 삶도 풍요로워졌다”고 말하는 그는 지난 99년 말 초교파적인 교단인 ‘예수교회 서울연합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목사이기도 하다.

“머리 속으로는 불자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이 교수는 앞으로 종교간 대화, 특히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추구해 나갈 계획이다. 특히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제도권’ 기독교인들에게 올바른 불교의 모습을 알리겠다고 말한다. 실제 그가 불교를 강의할 때면 학생들과 함께 사찰을 방문하고 예불에도 참여해 직접 느껴볼 수 있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그의 평소 생각을 글로 엮어 "생각나야 생각하지"(다산글방)란 책을 펴내기도 했으며, 홈페이지(http://my.netian. com/~ chansuyi/)를 통해 각 종교들 간의 이해에도 앞장서고 있다.

“참으로 불교적이면서도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찾을수 있고,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이면서도 불교의 모습을 보는 그런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 이 그의 작은 소망이라며 보살같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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