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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을 나르며

기자명 혜민 스님

명품(名品)에 대한 집착 무상(無常) 모르는 어리석음

미국의 대학들은 6월 초순이면 대부분의 학기를 끝마친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의 이사가 여름철에 집중되게 되는데, 나도 젊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여름이 되면 연중 행사처럼 학교 선·후배들이 이삿짐을 날라 달라는 부탁을 한 두 차례 받게 된다.

이런 인연으로 지난주에도 정치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친구로부터 연구 차 1년 간 중국에 가게 되었다며 이삿짐 나르는 것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다.

이 친구의 이삿짐은 간단했다. 고작 25개 가량의 박스와 간단한 가구 몇 가지에 불과할 정도로 단출했고 그나마 박스 가운데 20여 개는 모두 책들이니, 살림살이는 그야말로 한줌에 불과할 정도로 적었다.

이삿짐을 대충 옮기고 나서 숨을 돌릴 겸 의자에 앉아 친구가 준비한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그만 봉고차 한 대 분량에 불과한 짐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던 친구가 갑자기 나에게 말했다.

“참 우습지. 학부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10년 간 인생이 저 조그만 트럭 안에 다 들어 있네. 다 정리해서 쌓아 놓으면 얼마 되지도 않는데, 가진 물건들을 펼쳐 놓고 살 때는 왜 그렇게 모든 것이 복잡하고 대단한 것처럼 느껴졌는지 몰라”

음료수를 다 마시고 마지막 이삿짐까지 나른 후 친구가 살던 기숙사 안으로 돌아 가보니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물건들이 몇 가지 남아있었다. 오래 된 전기 스탠드와 더 이상 입지 않는 옷들, 그리고 7년 전에 큰 돈 주고 장만했었다는 침대 매트리스와 오디오. 친구는 혹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져가 쓰라며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 친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이 물건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산다는 것이 참으로 무상(無常) 하구나 하는 느낌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7년 전 오디오를 처음 샀을 때 그는 분명 이 물건을 무척 아끼면서 소중히 사용했을 것이다.

먼지가 묻을까 틈틈이 청소를 해 주었을 것이고, 오디오를 길들이기 위해 좋은 클래식 교향곡만을 주로 틀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했던 물건이 지금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흉측한 폐물이 되어 기숙사 한 구석에 방치돼 있는 것이다.

위파사나 수행을 했던 남방 불교의 어느 큰스님은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잘 관찰해 나가다 보면 어느 단계에 이르러선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마음을 내자마자 그 순간에 벌써 그 일 자체에 내포하고 있는 무상(無常)을 보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 또한 폐물이 된 오디오를 보면서 내가 지금 가지고 싶어하는 물건이나 이루고 싶어하는 일들 모두가 결국에는 이처럼 무상하게 될 것이라는 진리를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일어나자 물건이나 일에 대한 집착이 갑자기 줄어들면서, 마음의 평화가 밀려왔다.

사람들이 항상 좋은 물건이나 일에 집착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이 항상 변화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어리석음이다. 돌아오는 일요 법회에는 비싼 명품만을 고집하는 우리 절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내 친구의 오디오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이다.


혜민 스님

vocalizethis@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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