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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바위산 위 사자궁전 시기리야

욕망에 사로잡힌 왕에게 천상의 궁전은 화려한 감옥이었다

‘문화삼각지’ 가운데 위치한
스리랑카 대표 세계문화유산

평민 왕비 소생이던 카샤파
아버지 암살하고 왕위 찬탈
바위 위에 궁전 세우고 은신
동생 목갈라나의 보복 전쟁에
스스로 목숨 끊어 허망한 종말

스리랑카 문화삼각지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시기리야락팔레스는 허망한 욕망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바위산 주변에는 잘 가꾸어진 정원이 조성돼 있다. 정원에는 인근 저수지에서 끌어온 물을 이용한 분수대와 거대한 연못 등이 조성돼 있어 ‘물의 정원’으로 불린다.

동생의 군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진흙탕에 발이 빠진 코끼리가 몸부림을 칠수록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죽음 앞에 발버둥 치는 코끼리 위에서 카샤파는 오히려 담담했다. 두려움과 외로움의 끝이 보이지 않았던 지난 11년의 시간이 스쳐갔다. 코끼리에서 뛰어내려 맨몸으로라도 싸울 것인가. 혹시라도 이긴다면, 그래봤자 다시 마주해야할 현실은 더 큰 죄책감이다. 스스로의 목을 겨눈 단도는 그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자비였다. 아니, 죽어서도 자신의 업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두려움으로 가득 찬, 미칠 듯이 외롭던 바위산 꼭대기 화려한 감옥에서의 삶은 끝날 것이다. 단도는 그의 바람을 이루는 마지막 기회였다. 운명은 그렇게 그를 집어삼켰다.

지평선을 품은 광활한 평원, 그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산 시기리야는 카샤파의 마지막을 지켜본 증인이다. 머리 꼭데기에 카샤파가 문신처럼 새겨놓은 욕망의 흔적을 묵묵히 끌어안은 채 바위산은 이곳을 지나는 이들에게 묻는다. 너의 욕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스리랑카를 찾는 이들은 이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도 이곳을 외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위산 꼭대기에 있던 신비롭고 화려했던 천상의 궁전, 기적과도 같은 그 경이로움을 보고 싶은 욕망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으로 조성된 궁전이 뿜어내는 유혹의 손길, 그를 탐하는 욕망 또한 여전히 유효하다.

‘시기리야락팔레스’로 불리는 바위궁전은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물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도 손꼽힌다. 그러니 어떤 관광객이 시기리야를 지나치겠는가. 순례자라도 이곳을 건너뛸 수는 없다. 오히려 두 눈 크게 뜨고 욕망의 시작과 끝을 바라본다면 그 어떤 법문보다 깊은 울림을 만날 수 있다.

시기리야 바위궁전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거대한 사자의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형상이었다. 지금은 날카로운 사자의 발톱 만이 남아있다.

시기리야는 스리랑카 고대유적을 대표하는 3도시,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 캔디를 잇는 ‘문화 삼각지[Culture Triangle]’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지상에서부터의 높이 195m.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 다가가 올려다보아도 저 바위산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거대한 바위 위로 떠오르는 태양빛이 쏟아질 때, 아니면 저무는 태양에 물들어 신비로운 붉은 빛을 뿜어낼 때면 이곳에 궁전을 지었던 카샤파의 이야기가 연민으로 다가온다.

1600여년 전, 싱할라왕국의 다투세나(455~473)왕은 수도 아누라다푸라에 거대한 저수지를 건설했다. 백성들에게 풍요를 선사했다. 왕은 존경받았다. 그의 두 아들 카샤파와 목갈라나도 아마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카샤파가 평민 출신의 왕비에게서, 목갈라나가 귀족 출신의 왕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샤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카샤파는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했다. 걱정은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은 그를 폐륜으로 내몰았다.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버지를 감금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목갈라나는 복수를 다짐하며 인도로 도망쳤다. 카샤파는 동생을 뒤쫓을 겨를이 없었다. 왕좌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숨겨 놓은 왕실의 보물을 내놓으시죠.” 아버지를 윽박질렀다. 다투세나의 대답은 간명했다. 아누라다푸라의 칼라웨와저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이 내 재산의 전부다.” 아버지로부터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카샤파는 다투세나를 암살했다. 이제 왕좌는, 왕국은, 아니 세상은 그의 것이었다.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두려움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려움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복수를 다짐하던 목갈라나의 목소리가 잊히질 않았다. 죽여 버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지워지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세상, 그들의 시선 하나하나가 자신을 노려보는 듯했다. 어디에도 그가 편안하게 쉴 곳은 없었다. 오직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곳,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산 꼭대기, 그곳이라면 아무도 그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동생 목갈라나도 쳐들어오지 못하고, 아버지의 원혼도 그 꼭대기까지는 찾아오지 못하리라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높이 195m 바위산 위에 조성된 시기리야락팔레스는 터만 남아있다. 넓은 수영장, 연회장, 궁전이 있었던 흔적은 1600여년 전 이곳에 얼마나 웅장한 건축물들이 있었는지 말해준다.

백성들을 동원해 바위산 위에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가파른 수직의 절벽으로 이뤄진 바위산, 올라갈 길은 고사하고 발 딛고 매달릴 곳조차 없는 바위산을 기어올라 궁전을 지어야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목숨을 잃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7년여의 공사 끝에 바위산에는 화려한 궁전이 들어섰다. 궁전 주변에는 수영장과 연회장도 건설됐다.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장도 두 곳이나 있었다. 무엇보다 바위산 아래 궁전 입구에는 웅크리고 앉아있는 거대한 사자상이 조성됐다. 날카로운 발톱을 앞으로 내밀고 포효하듯 입을 벌린 사자의 목구멍, 그곳이 바위궁전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의 입구였다. “사자의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자, 누구도 살아나가지 못하리라.” 카샤파의 엄포이자 그의 두려움이었다. 궁전은 ‘사자의 목구멍’이라는 뜻의 시기리야로 불렸다.

카샤파는 총애하던 무희 한 명만을 데리고 올라갔다. 화려하게 꾸며진 궁전,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수영장, 무희의 춤이 끊이지 않는 연회장에서 그는 홀로였다. 아무도 바위궁전에 들어올 수 없었다. 대신들조차 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바위산 아래 별도로 만들어진 알현실에서 왕을 기다려야 했다. 바위궁전에서 그가 행복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11년, 무려 11년이었다. 행복했을까.

그의 두려움은 현실로 나타났다. 인도로 망명한 동생 목갈라나가 아버지의 복수를 외치며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난공불락의 바위산도 화려한 궁전도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전쟁에서 패한 카샤파가 단도로 목을 찔러 자살한 후 동생 목갈라나는 헛된 욕망이 빚어낸 바위궁전을 승단에 보시했다.

바위궁전은 500여명에 달하는 여인들의 벽화로 치장돼 있었다. ‘시기리야레이디’로 불리는 여인들은 한결같이 풍만한 가슴과 화려한 장신구, 온갖 꽃으로 치장돼 있었다. 혹시라도 아버지 다투세나의 원혼이 카샤파를 찾아온다면 이 여인들이 그의 원한을 달래주길 카샤파는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바람인지 한눈에 간파한 스님들은 벽화를 지워버렸다. 500여명에 달했던 시기리야레이디의 모습은 이제 10여점 남짓, 그리고 바위산 곳곳에 채색의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카샤파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무모했던 욕망이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하고 자신을 두려움 속에 가둬버렸음을. 그는 아버지와 백성들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진짜 보물이 무엇이었는지도 몰랐다. 바위산 꼭대기의 궁전이 결코 그를 지켜줄 수 없다는 것도, 그곳이 궁전이 아닌 감옥이 될 것임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토록 열망했던 왕국, 손아귀에 넣고 싶었던 세상이 왜 어느 순간 두려운 존재로 바뀌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의 두려움은 욕망과 무지가 빚어낸 괴물이었다. 그 괴물에 사로잡혔던 왕의 마지막 선택은 또다시 허망했다.

바위궁전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다.

그래서 시기리야바위궁전은 찬란하고 슬프다. 카샤파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욕망의 사슬을 끊을 수 있었다면 시기리야의 이야기가 이렇게 처연하진 않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도피였다.

그런데 잠시 목갈라나를 살펴보자. 인도로 망명한 왕자,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이가 어떻게 군대를 이끌고 돌아올 수 있었을까. 목갈라나가 이끌고 온 군대는 남인도 타밀족이었다. 타밀족이 누구인가. 그의 조상 둣타가마니, 바라감바후 왕은 타밀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기도, 그들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타밀족 또한 엄연한 스리랑카의 또 다른 주인이다. 기원 전부터 스리랑카에 살았으며 그들의 뿌리인 남인도 타밀과도 교류했다. 때때로 싱할라왕국을 위협하는 침략세력이었지만 싱할라왕국의 지배력이 견고할 때는 왕실과 왕국을 수호하는 용병의 역할을 수행했다. 타밀족은 힌두교 전쟁의 신 스칸다를 신봉했다. 그들이 전쟁에 능한, 용맹한 전사의 민족임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불교에 귀의해 살생을 씻을 수 없는 죄업으로 여겼던 싱할라족에게 전쟁을 수행하고 외세를 막아줄 타밀족은 두렵지만 불가피한, 중요한 존재였다. 심지어 ‘부처님 치아사리를 수호하는 역할은 타밀족의 책임’이라고 명시한 비문이 남아있을 정도다. 그러니 목갈라나가 남인도에서 이끌고 온 군대 역시 타밀용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리랑카는 보물섬 아닌가. 용병들에 대한 임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처연하고 슬픈 이야기 속에도 역사의 진실은 숨 쉬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42호 / 2018년 6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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