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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학회, ‘불교학 미래’ 세미나 1. 불교 문헌학적 연구의 한계와 전망

기자명 강형철

“문헌학도 본질적으로 그 시대의 상식·연구자 편견서 못 벗어나”

문헌학, 객관 담보한 학문이지만
사람이 정보를 정리·구분하기에
'그 시대적 상식' 벗어날 수 없어
과거에는 사실로 여겼던 ‘가피’
현대엔 달리 보는 게 단적인 예

한국불교학회는 5월25일 ‘불교와 불교학, 현재의 반성과 미래의 지향’이라는 주제로 춘계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전통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문헌의 내용을 파악하고자 하는 문헌학적 연구의 일반적 태도는 연구 성과의 객관성을 담보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정보들을 정리하고 구분하는 기준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은 누구나 시대의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특정 분야의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시대를 초월하는 사유를 보이는 사람의 등장은 인류사를 통틀어서 드물지 않은 사례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든 ‘시대의 공기’를 마시지 않고 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문헌학은 본질적으로 시대의 상식과 편견에 종속되는 경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문헌학적 연구가 그 성과를 해당 시대의 상식에 입각한 서술을 통해서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고전 문헌에서 누군가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가피를 입은 경험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읽고서, 연구자 개인으로서는 그런 경험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당연하게 실제 사실인 것처럼 논문에 서술한다면, 이는 현대적 의미에서 ‘학문적 태도’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을 실제 사실처럼 논문에 고증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공정이 들어갈 지 혹은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 상상하면, 그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불과 한, 두세기 전에만 해도 동아시아의 문화권에서 ‘친견’과 ‘가피’가 의심 없이 거론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문헌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연구를 기술함에 있어서 가지게 되는 ‘시대의 암묵적인 제약’을 실감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그런 가피의 경험을 일종의 환상으로 가정하고, 친견 체험자의 무의식을 분석하는 방식을 통해서 서술한다면, 그 진위여부에 관계없이 하나의 ‘학설’로서는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사례는 문헌에 기록된 사실에 대해서 각각 자신의 편견을 반영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쪽은 ‘학문적 태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다른 한 쪽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편견에 대한 평가의 비대칭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보살의 친견’을 사실로서 보는 것과 환상으로 보는 것 사이의 학문적 평가에 있어서 비대칭의 기준은 ‘그 시대의 상식’이다.

그런 상식에 대한 종속은 신비적이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마음’ ‘의식’ ‘정신’ 등으로 현대에 번역되는 몇 가지 불교 용어들이 현대인이 사용하는 의미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와 같은 개념의 불명확성은 어떤 경우에는 번역상의 한계에 의해서 다소 부적절한 번역어를 불가피하게 사용해서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고대인들과 현대인 사이의 ‘마음’의 개념 차이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시대의 문헌을 연구하는 작업의 특성상 당연하게 나타날 수 있는 오독과 오해이며, 연구사례를 축적하면서 잘못된 이해의 ‘정정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 문헌학의 본령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항상 불완전한 ‘현시점의 연구’를 남길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현시점의 연구를 스스로 인지하기만 하면, 사실 그런 한계는 문헌학 내부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불교문화권의 전통적인 교조적 태도와 모호하게 결합될 때, 부정적인 시너지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쿨랑주에 의해서 1864년에 출간된 ‘고대 도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태도와 불과 조상신을 숭배하는 신앙 형태, 그것이 사회제도에 미친 영향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서이다. 비록 당시의 정보 한계 때문에 나타나는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리스인의 종교성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의 연구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아마도 유럽인들이 지니고 있던 ‘이성적인 그리스인’이라는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기 위한 의도가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런 태도는 불교학ㆍ인도학 연구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불교의 초기 경전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붓다의 합리적인 태도에 대해서 언급하는 수많은 연구들은, 그 PTS 판본을 몇 페이지만 넘기면 다른 경에서는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붓다가 천신(deva)들과 대화를 나누고, 악마인 마라가 붓다의 강의를 방해하는 장면이 나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초기 경전이나 율장에 나타나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표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렇게 일부의 맥락만을 인용해서 주장을 서술한 뒤에, 그와 반대되는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자료들에 대해서는 고의적으로 다루지 않는 태도를 ‘모른 척하기’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모른 척하기’의 문제점은, 그 고의성 여부를 완전하게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실질적으로 다루는 문헌의 모든 내용을 논문에 담을 수 없고, 그중에서 연구자 본인의 관점에서 현안과 관련하여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만을 인용하는 것이 논문쓰기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중심 사상은” “결정적인 기준은” “다른 것들과 구분하게 하는 요소는”과 같은 문구로 시작하여, 본인이 다루고 싶은 내용만을 인용해도 한 편의 글 안에서는 논리적 완결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 경우 반대되는 내용의 누락이 고의적인 ‘모른 척하기’가 아니라, 중요성의 결여에 대한 학문적인 판단을 통해서 일어났다고 주장할 경우 그것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대승경전에서 붓다가 전지전능한 신처럼 묘사되는 것이 당시 불교도들의 이상적인 모습이라면, 현대의 연구자들이 붓다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역시 현대의 이상적인 종교인의 모습을 투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른 척하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의 이상과 부합하기 때문에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이 분야의 비전문가들에게도 쉽게 확산될 우려가 있다. 우파니샤드에 호의적인 일부 연구자들이 뚜렷한 제식주의적 경향을 제거하고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성찰을 추구하는 철학 사상으로만 묘사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태도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그런 경향은 불교학의 주변부에서 고의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주 나타나며, 앞에서 언급한 시대의 상식에 종속되는 문제와 결합될 때 의외로 강력하게 작용되어 새로운 학계의 상식으로 정착되기도 한다.

우리는 불교 문헌을 저술했던 승려들이 어떤 계통의 수행에 집중했는지, 실제로 명상을 했는지, 신도들과의 친분에 어떤 즐거움과 갈등이 있었고, 그것이 문헌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우리가 문헌을 통해서 다루는 승려들은 극소수에 해당하는 엘리트들이라 할 수 있고,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대다수의 승려들과 신도들이 어떤 형태의 신앙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런 내용이 문헌에 없어서만이 아니라, 근대불교학에 출발선에서부터 그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초창기 근대불교학자들이 당시 불교국가의 교단생활을 연구의 대상으로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처럼, 문헌이 작성되는 시대의 교단생활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고고학적 유물을 교단사 연구에 활용하는 방법론이 이런 점들을 보완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문헌 자체의 연구에 있어서 연구가 편중되는 경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문헌학 연구에 있어서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 옛날 사람들의 자연철학적 관점에서의 착각과 편견, 잘못된 이해에 관한 것들이다. 인식론이나 존재론에 관한 다양한 논사들의 다양한 견해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문에서 다루어지고 있지만, 바닷물이 왜 짠지에 대한 아비달마 승려들의 좌충우돌하는 논쟁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불교를 하나의 종교나 철학으로 파악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면서, 정작 당시 승려들의 머릿속에 있던 철학적 입장 ‘이외의’ 생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거나, 특히 명백히 비과학적인 생각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경향은 근대불교학의 출발선에서 엘리트들이 엘리트들의 불교를 대상으로 하여 연구를 진행했다는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문헌학이 다루는 거의 모든 주제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실제로 명상과 관련되어 있다. 명상 체험을 직접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얻은 통찰이 반영되는 내용이 논서뿐만 아니라 불교문학, 불교예술에까지 산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헌학의 방법론적 한계상, 연구자 개인의 명상 체험을 기반으로 연구내용을 서술할 경우 그것은 논문으로 성립할 수 없으며, 현대 명상가들의 체험을 기반으로 문헌 속의 명상 체험을 분석하는 것도 실질적으로 금기시된다. 이것은 ‘문헌학’이라는 규정 속에서 취해야 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강형철
동국대 인도철학불교학 연구소
전문연구원

그러나 문헌 속에 나타난 명상 체험과 그 영향을 다루면서, 학문적인 신중성 때문에 다른 문헌 이외의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지 않도록 학자들 스스로를 제약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명상가들의 문헌학자에 대한 비판과 비아냥에 대해서 문헌학자들은 어떤 답변도 내놓지 않는다. 정작 불교학 외부에 있는 분야의 학자들이 문헌학자들의 산스크리트 문헌 번역을 인용하면서 이 현상이나 체험을 해석하고 새로운 철학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했었다는 점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현재에도 뇌파 연구 등을 통해서 명상의 효과가 객관화되는 과정에서 명상에 관한 문헌 속의 기술을 연구하는 문헌학자들이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역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기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이는 문헌학자들이 명상의 체험을 다루는 데 있어서 소극적이고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명상의 체험을 다루면서도 자신의 체험과는 상관없고, 문헌의 기술은 잠정적으로 신용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의 체험은 믿지 않겠다는 적극적이면서 이중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초기 근대불교학자들이 보였던 불교문화권의 교단에 대한 불신과 무시의 태도와도 분명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비적인 것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맹목적인 불신은 동일한 범주의 심리 작용이며, 그 중간에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있어서 문헌학자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다.


[1442호 / 2018년 6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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