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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비싸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올해 7월부터 시행된다. 장시간 노동으로 악명이 높은 우리나라가 이를 계기로 그 악명을 벗을 수 있기를 바란다. 장시간 노동에 따른 피로가 감소함에 따라 산업재해가 줄고 노동 생산성이 올라가는 효과가 기대되기도 하고,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14~18만 개의 신규 일자리가 생길 것으로 기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여가 시간이 늘어남으로써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된다는 것이 반갑다.

물론 반론이 있다. 특히 주 52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생활이 유지되는 서민층의 입장에서 소득의 감소로 인하여 생활고가 심각해진다는 반론이 주목된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 가령 주 60시간을 일하던 사람들은 8시간의 임금을 못 받게 되니 기존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특히 빠듯하게 생계를 유지해온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충격이 클 수 있다.

소득에 여유가 있는 계층에서는 일정한 정도의 소득감소를 어느 정도 버텨낼 수 있지만, 저소득층에서는 삶이 더욱 팍팍해지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상쇄하려면 최저임금을 알맞게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최저임금을 가파르게 올리면 최저임금으로 피고용자를 고용할 수밖에 없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버티기가 힘들어진다며 최저임금을 그렇게 올리면 안 된다는 입장도 있다. 물론 여기서 영세 자영업자의 경우 최저임금 부담보다는 임대료 부담이 더 큰 문제라는 반론도 있다. 그런데 지난 5월28일에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상여금과 복리후생비까지 포함하는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최저임금을 줄이는 효과를 내는 개정안이 통과된 것이다. 중소 상공인들을 포함해서 고용주 측 일부에서는 반색을 한다. 물론 노동계에서는 최저임금법의 개악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최저임금이 7530원이라는 사실 앞에서 망연자실해진다.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환영하는 고용주들은 피고용자들이 7530원의 시급을 받아서 어떻게 생계를 꾸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 의식주에 최소한으로 소비를 한다고 하더라도 7530원의 시급으로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할까? “가난은 비싸다”라는 말이 있다. 의식주 모든 것이 가난한 이들에게는 훨씬 더 비싸다는 말이다. 주택이 있는 사람보다는 전세 사는 사람이, 전세 사는 사람보다는 월세 사는 사람이 주거비가 더 든다. 여기에서 그러면 서울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답이 될 수 없다.

오늘날 더욱 심해지고 있는 빈부양극화는 공동체의 붕괴를 위협하고 있다. 부자가 더 부유해지는 것에 대해서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회는 문제가 있다.

초기불교경전인 ‘시갈로바다 숫타(Sigalovada Sutta)’에서 붓다는, 우선 소득의 25%는 누리고 싶은 것을 누리면서 쓰고 싶은 곳에 쓰고, 그다음으로 소득의 50%는 생계유지 내지 사업에 쓰고, 나머지 25%는 긴급 상황 대비용으로 저축하라는 기본적 원칙을 제시한다. 오늘날 식으로 풀이한다면, 50%는 생계유지 내지 교육 등의 자기계발에 사용하고, 25%는 직접적인 생계를 넘어서서 취미나 독서나 문화 활동 등에 소비하고, 나머지 25%는 불우이웃을 돕는다든지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 등 각종 보험비용으로 사용하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시갈로바다 숫타’와 같이 소득을 배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은 좀처럼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 사회가 그러한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주 52시간 근무제나 최저임금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인간적 생활을 확보하는 문제이고, 우리 사회의 공동체 구성원들 가운데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하는 문제다.

류제동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초빙교수 tvam@naver.com

[1443호 / 2018년 6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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