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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5대 총무원장 월산 스님

나설 때와 물러설 때가 분명했던 수행자의 표상

1943년 금오 스님 은사로 출가
성철·자운스님 등과 봉암사 결사
1969년 영암스님 이어 총무원장
불국사 주지 맡아 수행도량 일신
1988년 ‘법보신문’ 초대 발행인

평생 수행자의 삶을 산 월산 스님은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불국사를 찾은 김대중 신민당 총재와 악수하고 있는 월산 스님. ‘월산선사법어집’
평생 수행자의 삶을 산 월산 스님은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불국사를 찾은 김대중 신민당 총재와 악수하고 있는 월산 스님. ‘월산선사법어집’

“생전에 노사(老師)의 일언일구는 범성(凡聖)을 초월하고 일체 속박을 뛰어넘는 사자후였다. 항상 향외치구(向外馳求)를 꾸짖으며 부처는 자성을 바탕으로 지을지언정 마음을 떠나 불조를 논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더욱 새로워지고 있다.” (전 원로의장 탄성 스님)
“대종사께서는 경허-만공-보월-금오의 덕숭정맥을 잇는 명안종사로 정화 이후 종단의 화합과 발전의 정신적 지주셨다.” (전 총무원장 법장 스님)
“선사께서는 참으로 불지법해(佛之法海)와 조사의 묘도(妙道)를 거침없이 밝혀서 사생구류(四生九類)에 보우(寶雨)와 같은 자비를 베풀어 주신 스승이셨다.” (원로의원 성타 스님)

성림당 월산 대종사는 여러 스님들이 언급하듯 수행자의 표상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침체된 한국불교를 쇄신하고자 뜻을 세우고 문경 봉암사에서 당대 최고의 선사들과 ‘부처님법대로 살자’며 결사를 진행했으며 1950~60년대 은사 금오 스님과 더불어 전통불교회복 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총무원장, 원로의장 등 주요소임을 맡아 혼란한 종단을 안정시키는 데도 일조했다. 그러나 “다투면 부족하고 사양하면 남는다”는 말을 늘 새겼던 스님은 대중의 요구에 따라 소임을 맡으면서도 스스로 물러나야 할 때라 여기면 지체 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선사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은 인물이기도 했다.

월산 스님은 1913년 5월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향의 서숙과 소학교를 다니며 학문을 익혔지만 출세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망국의 한을 달래려 중국 등을 유람하며 조국광복을 염원했다. 스님이 불연을 맺게 된 것은 1943년경이었다. 신심 깊었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스님은 우연히 안변 석왕사를 찾았다가 그곳에서 안광 스님을 만나면서 불교에 심취했다. 출가자로서의 됨됨이를 한눈에 알아봤던 안광 스님은 월산 스님을 금오 스님에게 소개했다. 당시 금오 스님은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쌍계사 칠불선원, 동화사, 선학원 등에서 조실을 맡아 후학들을 지도하며 이름을 날렸던 선사였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금오 스님을 만난 월산 스님은 그길로 출가를 결심하고, 1944년 도봉산 망월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월산 스님은 해방을 전후해 덕숭산 수덕사를 찾았고,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추앙받았던 만공 스님을 만나 ‘이뭣고’를 화두로 받았다. 공양주 소임을 자처하며 만공, 금오, 전강 스님 등과 함께 수선안거를 마친 스님은 다시 3년간 운수행각에 나섰다. 수덕사를 떠나 은사 금오 스님의 보림처였던 전남 보길도 남문사에서 비룡 스님과 함께 용맹정진을 했으며, 경북 청도 적천사 토굴에서 생사를 걸고 홀로 험난한 구도의 길을 걸었다. 이 무렵 문경 봉암사에서는 젊은 수좌들을 중심으로 결사운동이 시작됐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가을 성철, 우봉, 보문, 자운 스님 등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수행자 본연의 모습을 되찾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혁신운동이었다. 18개로 구성된 청규인 ‘공주규약’을 토대로 ‘부처님법대로 살자’는 수좌들의 수행결사 정신은 당시 한국불교에 큰 울림이 됐다.

봉암사 결사는 입소문을 타고 적천사 토굴에서 정진하고 있던 월산 스님에게도 전해졌다. 스님은 그길로 봉암사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20여명의 수좌들이 정진하고 있었으며, 월산 스님도 걸망을 풀고 결사에 동참했다. 하루 한 끼로 견디며 스무 시간 가까이 정진하는 고된 일과였지만 월산 스님은 도반들과 함께 부처님 법을 탁마했다. 그 시간은 월산 스님이 평생 구도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한 토대가 됐다. 또한 “수행자의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가난은 수행자를 수행자답게 만들어 준다. 그러니 어찌 스스로 가난해지려고 애쓰지 않는단 말인가?”(‘월산선사법어집’)라며 후학들에게 수행자의 청빈을 당당하게 설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봉암사 결사’를 통해 한국불교 정체성 회복을 발원했던 스님은 1954년 은사 금오 스님과 함께 ‘전통불교회복’ 운동에 뛰어들어 비구중심 종단출범의 기틀을 다졌다. 1961년 팔공산 동화사 주지를 시작으로 1963년 설악산 신흥사 주지, 속리산 법주사 주지 등을 잇따라 맡으면서 쇠락한 전통사찰을 일신했다. 그러나 스님은 스스로 소임을 멀리하려 했다. 수행자로서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경계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스님이 훗날 후학들에게 “주지나 종단의 소임에 마음이 끌리면 안된다”며 “그런 일 하려고 중노릇 한 것이 아니니 소임을 살더라도 하심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절대로 자리에 탐착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말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월산 스님이 처음 종단 소임을 맡은 것은 1969년 9월이었다. 이 무렵 조계종은 혼란기였다. 1950~60년대 전통불교 회복운동의 기수로 통합종단조계종 출범을 주도했으며 초대 종정 효봉 스님에 이어 2대 종정에 오르기도 했던 장로원장 청담 스님이 돌연 종단 탈퇴를 선언한 상태였다. 자신이 제안한 ‘종단유신재건안’을 중앙종회가 채택하지 않은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갑작스런 청담 스님의 종단 탈퇴 선언에 종단 내부는 급격히 흔들렸다. 선학원 출신 수좌들은 9월1일 선학원에서 ‘전국비구승대회’를 열겠다고 예고했다. 이들은 청담 스님의 종단탈퇴를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승려대회를 통해 △청담 스님의 탈퇴경위 청취 △비상사태 수습방안 대책마련 △종단 정화 진전 상황 재검토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영암 총무원장 등 종단 집행부가 만류하며 수습에 나섰지만 좀처럼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종단 안팎에서 집행부의 총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중앙종회는 1969년 9월1일 제21회 임시회에서 영암 총무원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제5대 총무원장으로 당시 법주사 주지 월산 스님을 선출했다.

‘대한불교’(1969년 9월28일자)에 따르면 조계종은 9월24일 서울 조계사에서 월산 스님을 비롯한 총무원 신임 간부에 대한 진산식을 봉행했다. 종단 탈퇴를 선언하면서 종단의 큰 혼란을 야기했던 청담 스님을 다시 장로원장으로 추대하는 의식도 열었다.

월산 스님은 “산중에서 운수를 벗 삼아 수도정진을 해야 할 본인이 뜻밖에 종단의 부름으로 중책을 맡게 됐다”며 “사부대중의 지혜와 뜻을 한 데 모아 일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스님은 이어 종단의 운영방향에 대해서도 공약했다. 특히 스님은 종무행정의 방향과 관련해 “△말사주지는 법계시험을 거친 자로 등용하고 △본사주지는 말사주지회의서 선출하고 △총무원장은 본사주지를 역임한 자로 하며 △종회의원도 각 교구별로 안배하고 상하원제 도입”을 예고했다. 이는 파격적인 안이었다. 본사주지를 말사주지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하는 것은 현행 산중총회의 모태가 되는 것이었고, 중앙종회의원을 각 교구별로 안배하는 것은 중앙종회의원에 교구 대표권을 부여하겠다는 것이기도 했다.

월산 총무원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종단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때를 같이해 낭보도 날아들었다. 대법원은 1962년 통합종단조계종 출범 이후 서대문측 총무원(대처측)이 제기한 ‘통합종단 조계종 종헌 결의 및 종정추대 무효 확인 소송’과 관련해 1969년 10월23일 조계종(비구측)의 승소를 결정했다. 이는 1954년부터 15년간 지속돼 온 비구․대처 갈등의 종식을 의미할 뿐 아니라 통합종단조계종의 정당성을 최종 확인하는 결과였다. 월산 스님은 즉각 담화를 발표하고 “그동안 불교내부의 모든 잡음과 내분을 일소하고 통합종단으로 대동단합해 불교발전을 위해 노력하자”고 호소했다. 통합종단 출범에 반발해 종단등록을 하지 않은 사암에 대해서도 등록할 경우 언제든지 종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비구․대처의 긴 갈등에서 벗어난 조계종은 1970년 들어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도제양성․역경․포교의 3대 목표를 체계적으로 추진함과 동시에 종단위상 제고를 위한 사업에도 착수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종단의 오랜 숙원이었던 불교회관 건립이었다. 당시 조계사 대웅전 옆에 2층 규모의 ‘정화기념관’을 총무원 청사로 이용했지만 종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현대식 대형 건물을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조계종은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 불교회관 건립을 숙원으로 삼았다. 불교회관은 1965년 7월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영암 스님에 의해 최초 설립계획이 발표됐다.

영암 스님은 조계사 대웅전 뒤편 200여평 부지에 지상 17층 높이의 건물을 건립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청담 스님의 종단탈퇴선언과 그에 따른 후유증으로 영암 스님이 총무원장에 물러나면서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영암 스님의 뒤를 이어 총무원장에 오른 월산 스님은 불교회관 건립을 역점사업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6억원 정도가 소요되는 건축비를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조계종은 종단 산하 사찰의 유휴지를 매각해 이 비용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현재 코엑스가 위치한 봉은사 부지 10만평이 매각됐다. 그러나 매각과정에서 당시 봉은사 주지 서운 스님이 “주지도 모르게 매각이 진행됐다”며 강하게 반발하면서 큰 혼란을 야기했다. 종단 내부적으로 비판여론이 커졌고, 사회 문제로까지 비화됐다. 종정 고암 스님을 비롯해 장로원장 청담 스님 등 중진스님들이 나서 수습에 나서면서 일단락되긴 했지만 ‘봉은사 토지매각’의 전말은 오늘날까지 미궁에 빠져 있다. 봉은사 토지매각 여파로 월산 스님은 총무원장 사퇴의사를 밝히고, 1970년 4월부터 종무행정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에 따라 중앙종회는 1970년 7월17일 새 총무원장으로 청담 스님을 선출했다.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월산 스님은 수덕사 말사인 전월사 토굴에서 수행에 전념했다. 그러나 1973년 주지 문제로 불국사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주지직무대행에 임명됐다. 1974년 6월 다시 불국사 주지에 정식 임명되면서 대대적인 사찰정비에 착수했다. 불국사 불국선원과 강원을 개원해 관광지에 머물던 사찰을 수행도량으로 탈바꿈시켰다.

1978년 조계사와 개운사 총무원으로 양분된 상황에서 조계사측 총무원장을 다시 맡아 양측의 화합을 주선했으며 1986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월산 스님은 포교에도 매진했다. 불국사 조실 때는 경주에 부인선원을 개원, 재가자들의 선수행을 지도했으며, 1988년 문서포교의 원력을 세워 불교 주간지 ‘법보신문’을 창간해 초대 발행인을 맡기도 했다. 그렇게 평생 수행자로서 한국선불교의 전통 계승을 위해 앞장섰던 월산 스님은 1997년 9월6일 불국사에서 세수 86세, 법랍 55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43호 / 2018년 6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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